김옥현은 조선조(朝鮮朝)의 정조(正朝) 5년(1781)에 세환(世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문민공 김일손(文愍公 金馹孫)의 후손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인데, 정조(正祖) 21년(1797) 5월에 그의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서산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옥현은 16세의 소년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산에 와서 정성으로 아버지를 돌보며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시간 있을 때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애원하니 잔인한 옥리(獄吏)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안 옥현은, 다시 관찰사(觀察使)에게 혈서(血書)로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역시 여의치 않음을 알고 최후의 수단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소하기로 결심했다.
서울에 올라온 옥현은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엎드려 있다가 대신들이 출입할 때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아무런 보람 없이 이미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강 밖으로 쫓겨났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경(死境)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에 옥현은 장소를 바꾸어 혜정교(惠政橋)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 동짓날(冬至日)에 임금께서 대가를 타고 행차한다는 소리를 듣고 엎드려 있다 웃옷을 벗고 쇠를 두들기며 호소를 하였다.
옥현의 이 같은 호소에 임금이 감동되어 마침내 옥현의 아버지는 왕명으로 사형(死刑)에서 감형(減刑)되어 3년 간의 서울 근교(近郊)로 유배(流配)토록 하였다. 유배지로 따라간 옥현은 아버지 뒷바라지로 어느덧 3년을 맞이한 어느 봄날, 나라에 경사가 있음을 듣고 바쁜 걸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온 옥현은 특사(特赦)로 부친이 출옥됨을 알고 너무 기뻐서 단숨으로 아버지의 유배지에 달려가 알렸다. 그러나 옥현은 그동안의 누적된 고생으로 마침내 득병(得病)하여 자리에 눕더니 드디어 정조(正祖) 24년(1800) 4월 4일에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19세의 독신으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屍身)을 부석면 가사리에 운구하여 안장(安葬)시켰다. 이같이 아들의 극진한 효성으로 출옥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그 심경 누가 알 수 있었으리요.
그 후 조선조(朝鮮朝)의 순조(純祖) 8년(1808)에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호남지방(湖南地方)을 채방(採訪)할 때, 이곳에 들려 옥현의 행적을 알고 이를 가상히 여겨 상주(上奏)하니 곧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즉 동년 8월 9일에 터를 잡고 상량(上樑)하여 9월 27일에 현액(懸額)하니 현재 태안읍 동문리 대림아파트 앞에 서있는 것이 바로 옥현의 효도비이다.
梨遠面 所在地에서 北쪽으로 약 4km쯤 가면 官里 1區 파금봉(播金峰) 산하에 손탁수(孫倬洙)의 효자문(孝子門)이 자리하고 있다. 손탁수(孫倬洙) 효자문은 1925년에 이민녕(李敏寧) 서산군수(瑞山郡守)가 부임하면서 각 사림(士林) 단체로부터 대효자(大孝子) 손탁수(孫倬洙)의 효자문(孝子門)을 세워 효(孝)의 근원을 후세에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자 이민녕(李敏寧) 서산군수(瑞山郡守)는 손탁수(孫倬洙)의 효(孝)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그의 아들 손병철(孫秉哲)을 도와 손탁수(孫倬洙)의 효자문(孝子門)을 건립(建立)하기에 이른 것이다.
효자 손탁수는 출천지 대효자인 손순(孫順)의 39世孫으로 서기 1838년 10월 10일 현재(現在) 손효자문(孫孝子門)이 자리하고 있는 이원면 관리1구에서 손영기(孫永祺)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손효자(孫孝子)는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 온화하고 거짓이 없고 부모에게 효행이 지극하고 형제 우애(友愛)함은 물론 이웃과 친절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집을 나갈 때면 반드시 다녀오겠다고 부모에게 고(告)하고 다녀와서는 보고들은 것을 모두 고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손탁수(孫倬洙)가 효성이 지극한 것을 알고 좋은 음식물을 손효자(孫孝子)에게 주며 부모님께 갖다 드리라고 하였다. 한 때는 대효자(大孝子) 손탁수(孫倬洙)에게 하늘의 시험인지 그의 부친이 모함에 의하여 공주부에 투옥하게 되었다. 때는 엄동(嚴冬)인데 손탁수(孫倬洙)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줄 것을 옥문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손탁수(孫倬洙)는 아버지의 식사를 구걸하러 나가는 시간외에는 밤이나 낮이나 눈이오나 비가 오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효자가 얼고 굶주려 죽을 염려가 있다고 걱정하며 더운물을 가져다 주고 따끈한 음식을 가져오는 등 관심이 대단하였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손효자(孫孝子)의 소문이 공주부(公州府)에 알려지자 공주부에서는 감동하여 즉시 방면(放免)하였다.
손효자(孫孝子)는 부친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닭을 층층으로 키워 매일 한 마리씩 대접하는데 하루는 부친이 저녁 식사하다가 목에 닭의 뼈가 걸렸다. 손효자는 당황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손효자(孫孝子)는 천둥번개가 요란한 그믐밤 왕복 100리 길의 태안읍을 단숨에 달렸다.
천둥번개가 요란한 그믐밤 3경 태안의 거리는 적막하였다. 손효자(孫孝子)는 방법이 없어 크게 울었다. 심야에 사람의 큰 울음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은 놀라서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연유를 물었다. 연유를 들은 사람들은 감동하여 다투어 유명한 약방들을 찾아 약을 구했다. 많은 약들을 구해 왔지만 그 중에서도 닭 뼈가 목에 걸린데는 코끼리뼈가 가장 신효(神效)하다고 하였다.
많은 약을 얻은 손효자(孫孝子)는 나를 것 같은 기분으로 집에 달려오는데 괴이한 불빛이 앞을 밝혀 어려움 없이 집에 왔다. 집에 돌아온 손효자(孫孝子)는 지성(至誠)으로 아버지에게 약을 대접했다. 약을 드신 아버지는 신통하게도 닭 뼈가 목에서 없어졌다. 그러나 손효자(孫孝子)의 효성도 아랑곳없이 아버지의 성품(性品)이 너무 엄해서 손효자(孫孝子)에게 자주 종아리를 때렸다. 그런데 손효자(孫孝子)는 평소에는 아버지로부터 종아리를 맞아도 울지 않더니 한 번은 슬피 울었다.
아버지는 더욱 화가 나서 손효자(孫孝子)에게 호통을 치며 물었다. 다른 때는 매를 때려도 울지 않더니 이번에는 슬피 울고 있으니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우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손효자(孫孝子)는 대답하기를 전에는 아버지께서 매를 때리시면 몹시 아팠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음은 아버지의 기력이 약해지셨음을 느끼고 슬퍼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아버지는 노환(老患)으로 오랫동안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 손효자(孫孝子)는 아버지의 병(炳)이 위독한지 아니한지를 알기 위해서 아버지의 분(糞)을 맛보았다. 분(糞변)이 쓰면 위독하지 않고 변이 달면 위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효자(孫孝子)의 아버지는 손효자(孫孝子)가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지만 운명 직전에 이르렀다. 손효자(孫孝子)는 잠시라도 생존하시도록 하느라고 자신의 손가락을 칼로 베어 피를 내어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 그래서 손효자(孫孝子)의 아버지는 3일간 더 살수가 있었다.
손효자(孫孝子)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덤 앞에서 3년간 시묘(侍墓)를 살았다. 손효자(孫孝子)는 시묘(侍墓)를 사는 동안 다리의 각기병으로 고통이 심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와서 다리를 품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신통하게도 손효자(孫孝子)의 각기병이 거뜬히 없어졌다. 그렇지만 손효자(孫孝子)는 효도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음인지 56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손효자(孫孝子)의 아들 손병철(孫炳哲)의 효성이 또한 대단하였다.
손병철(孫炳哲)은 아버지의 무덤을 할아버지의 무덤 옆에 모시고 한 달에 두 번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10리 길을 가서 통곡하며 성묘를 했다. 사람들은 제2의 대효자(大孝子)가 나왔다고 경탄했다. 이민녕(李敏寧) 서산군수(瑞山郡守)가 손탁수(孫倬洙) 효자의 효자문(孝子門)을 세우게 된 직접적인 동기도 아들 손병철(孫炳哲)의 효행에 감동(感動)하였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탁수 효자문(孫倬洙 孝子門)이 건립(建立)한지 52년만인 1977년 새마을운동을 창시한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손탁수(孫倬洙) 효자문(孝子門)을 보수하라고 25만원을 하사하셨다. 이 효자문(孝子門)이 자리하고 있는 관리 1구 주민들도 효본(孝本)을 받아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행정관서에서도 이 마을을 효도(孝道)마을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관동국민학교 애향단 학생들도 주일마다 손효자문(孫孝子門)을 찾아 주위를 청소하고 보호하니 효의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유동원은 원북면 장대리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말씀을 한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유동원은 성인이 된 다음 손씨 여인(孫氏 女人)과 결혼하였는데, 그 또한 극진한 효부(孝婦)였다. 이 효부는 천성이 지순(至順)하고 부지런하며 근검 절약하여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는 또한 항상 구미(口味)에 맞는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고 아울러 가족의 건강 관리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회갑일(回甲日)을 맞이하여 부상(父喪) 3년을 추복(追服)하였다. 즉 조석 상식(朝夕上食)과 추석 성묘를 3년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실행하였다. 그는 유복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여 그 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부부가 한결같이 효행이 극진하였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효자집이라 불렀고, 또 이웃 동네에서는 이 마을을 효잣말(孝子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관계 당국에서 1927년에 정문을 세워 기념하게 되었다.
조시현은 원북면 장대리에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시현의 나이 5살 때에 아버지가 별세하니 집은 매우 가난하고 몸은 불구(不具)였다. 그러나 나이 비록 어리고 불구의 몸이지만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성장하면서 어머니 봉양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이같이 20여년간 손수 밥짓고 빨래까지 하면서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었다. 그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팔아 쌀과 고기를 마련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자신은 초근 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이어가며 오로지 어머니 봉양에만 최선을 다하였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섬기었지만 그 보람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갔다. 이 때 시현은 손가락을 단지(斷指)하여 주혈(注血)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정성에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현은 어머니의 사후(死後) 7일간은 금식(禁食)하고 또 3년간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으며, 그리고 제삿날에는 눈물로 옷깃이 늘 젖어있었다고 한다. 불구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어머니를 섬기었으므로 그를 가리켜 출천(出天)의 효자라 했다. 뒤에 이 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충청남도지사(忠淸南道知事)로부터 포상이 있었다.
지시정은 일찍 근흥면 두야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주(淸州)였다. 그는 용무(用務)로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느날 매우 불길한 꿈을 꾸었다. 그 후 불안한 마음 감출 길 없어 즉시 서울을 떠나 귀향(歸鄕)길에 올랐다. 수 백리를 며칠간 걸어서 집에 이르르니 어머니는 이미 별세한 뒤였다.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채 묘막(墓幕)에서 시묘(侍墓)하다 몸이 쇠약해져 마침내 묘막에서 숨을 거두니 때는 조선조(朝鮮朝)의 정조(正祖) 13년(1789)이었다.
이렇게 시정(時淨)이 죽으니 그의 아내 가씨(賈氏) 또한 남편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며 단식 7일만에 순사(殉死)하였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동년 7월에 정문(旌門)을 세워 그 갸륵한 뜻을 기리고 있다.
남면 몽산리에서 출생. 본관 김해, 어려서부터 효행심이 두터웠으며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아 친척간 우애하고 화목하니 문중이 다 기뻐하고 사방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을사년(乙巳年)에 모친이 병을 얻으니 옆을 떠나지 않고 약과 시탕을 성의를 다하여 모시다가 위급지경을 당하니 울며 손가락을 찍어 수혈하여 수일 회생하고 부친이 또 병이 있어 낮에는 옷 띠를 풀지 않고 밤에는 눈 섶을 붙이지 아니하다 위독을 당하여 손가락을 절단 수혈하여 병이 완쾌 회복되어 연 수십여년에 상을 당하니 애통지적에 유감됨이 없으며 그형 용구도 모친의 병에 아우와 같이 근심하여 대변의 맛을 보아 병을 증험하고 북두칠성을 향하여 내 몸이 대신 병나기를 기도하였다. 1925년 7월 공부자 성적도 오륜행실도에게 내린 포창 완의문을 받았다. 이 완의문에는 도유장 대표 및 약장 21명과 8도 도유사가 서며하였다.
김용수의 효행비는 1991년 4. 20 남면 진산리에 그 뜻을 기리고자 효행비 건립추진위원회의 주선에 의해 건립되었다.
손도길은 소원면 소근리 657번지에서 1987년 9월 22일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이다. 손도길은 평소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인근지역 주민들로부터 보기 드문 효자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여섯살때 친척집에서 복숭아 2개를 얻었으나 먹지 않아 왜 먹지 않느냐고 물으니 집에 계신 부모님께 드릴거라 하여 귀여움을 받았으며 가난한 살림에도 끼니때마다 고기나 생선을 구워 봉양하였고 밖에서 귀한 과일이나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가지고 와 부모님께 봉양하였다. 연로한 노모께서 병이 깊어 위독할 때 단지하여 노모께 주혈해 드리는 정성을 다하였으나 3일을 더 연명하시고 세상을 떠났다.
노모께서 돌아가시자 묘소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고자 하였으나 아버님이 생존해 계셔 아버님의 염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3년상을 치루었다. 돌아가신 노모께서 현몽하여 천묘 하여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여 이상히 여긴 도길은 산소를 자세히 살피자 봉분 언저리가 눈이 녹지 않는 것을 보고 습지에 묘를 쓴 것으로 판단하여 3년상을 치른 후 천묘하였다. 1955년 경찰서장 소원면장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1993년 성균관에서 표창하였다.
근흥면 두야리에서 거주한 효자 지시정의 부인이다.
일찍 남편으로부터 효행(孝行)을 배워서인지, 시부모(媤父母) 섬기기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불행히도 남편이 일찍 별세하자 3년간 그의 묘소에서 울음을 그칠 줄 모르고 애통해 하다 결국 3년상을 마친후에 순사(殉死)하니 세상 사람들이 열녀(烈女)라 했다.
조선조(朝鮮朝)의 영조(英祖) 5년(1729)에 부부함께 명정(銘旌)이 내려졌다.
태안읍 평천리 3구에 있는 한 우물곁에는 자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은 한 여인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있는 비석이다. 정확하게 이 비석의 주인은 어느 때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곳 평천리에서 오래 살아온 경주최씨의 후손인 최봉세의 처 함창김씨를 기리는 비석이라고 만 알려지고 있다
처음 이 비석은 나무판에 비문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나무가 썩고 낡아 부서졌기 때문에 그 나무비석은 땅에 묻고 지금의 비석을 세웠다 하는데 그 연대도 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최씨 가문의 비석이 세워지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평천리에는 경주최씨 최봉세가 살았는데 그들은 여러 대를 이곳에서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최봉세는 집안이 가난하여 노총각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나이 많은 덕거머리총각인 최봉세는 조그마한 낚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여 얻어진 수입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함창김씨를 밑며느리로 맞아들이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김씨는 성품이 착해서 시어머니와 남편을 지극히 공경하여 온 동네가 그의 효성에 화제가 되었고 최봉세도 아내의 내조에 힘이 생겨 전보다 더 많은 고기를 잡아오곤 하였다.
"늦장가를 들더니 하늘의 천사를 색시로 삼았어 복도 많은 사람이여 !" 최봉세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고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다. 그런데 그들의 행복은 몇년이 못가서 깨어졌는데 그것은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의 죽음이었다.
어느 날 최봉세는 전과같이 쪽배를 타고 정주내 앞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배가 거문녀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사나운 돌풍이 일어나더니 집채만한 파도가 그만 최씨가 탄 배를 삼키고 만 것이다.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니 집에서는 난리가 났고 온 동네 사람들도 걱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을 당한 것이 뻔하니 시체라도 찾아봅시다.!" 동네 사람들은 바닷가로 몰려가 여러 날을 시체 찾는 일에 전력했으나 시체는 찾을 길이 없었다. 최씨의 어머니도 아내 김씨도 함께 바닷가를 헤맸으나 최씨의 시체는 찾을 길이 없었다. 이제 모두 포기하고 기진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의 아내가 밤중에 없어진 것이다. 시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며느리가 보이지 않자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바닷가로 나가 남편의 시체가 밀려오지 않았나 살피러 나갔거니 생각했으나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다음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동네 사람 몇을 불러 바닷가로 나갔다. 그러나 며느리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고 수리머리(독수리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생긴 이름) 해변에서 며느리가 벗어놓은 신발이 가즈런히 놓여 있는 것만 발견하게 되었다.
"자살한 것이 틀림없어 !"
"젊은 나이에 아직 애도 딸리지 않았는데 죽기는 왜 죽는담!"
"남편을 너무 사랑한 탓이여 !"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벗어 놓은 신발을 보는 순간 그만 정신을 잃고 가물키고 말았다. 그리고는 여러 시간만에 깨어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며느리의 애틋한 사랑에 감동되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이제 두 내외의 시체를 찾는 일도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고기잡이를 나갔던 한 청년이 헐레벌떡 동네로 뛰어오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시체를 찾았다 ! "
"최씨 부부의 시체가 수리섬 장벌에 밀려왔어 !"
하면서 동네 사람들에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며칠을 두고 찾아도 찾지 못하던 시체가 그것도 두 사람의 시체가 한꺼번에 밀려왔다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수리머리 장벌로 몰려갔다. 과연 거기에는 아직도 시체가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최씨의 부인이 남편의 허리를 두 손으로 확 부등켜 안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나 힘있게 부등켜 안고 있는지 팔을 펴서 시체를 나누어 놓으려해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 남편의 시체를 찾으려고 물로 뛰어 든 거야!"
"시체라도 찾아 고향땅에 묻어주려고 부인이 죽어 그 혼령이 남편을 고향 바닷가로 데리고 온 것이여 !"
"참으로 보기 드문 열녀로구먼!"
동네 사람들은 죽음으로까지 남편을 섬긴 최씨 부인의 사랑에 한마디씩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동네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는 부부의 시체를 한곳에 장사해 주고 거기에 나무로 만든 묘비를 세웠는데 이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렸고 임금께서는 고을군수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주라고 했던 것이다.
"천하에 드문 열녀로다. 그의 갸륵한 마음을 비석에 담아 길이 후세까지 전하도록 하라 ! " 이렇게 하여 비목이 없어지고 돌로 비석을 세웠다 하는데 비석을 세운 자리도 그 당시 30여 세대가 함께 마시던 우물(대동샘) 곁에 세웠다 한다. 비석을 우물곁에 세운 까닭은 동네 여인들이 매일 드나드는 우물곁에 세움으로 여인들에게 열녀의 상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어 윤곽만 남은 이 비석은 옛날 여인들의 아름다운 미덕을 말해주듯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며 급변하는 오늘의 부부윤리와 부부의 사랑에 대하여 하나의 교훈과 귀감으로 남아있다 하겠다. 조선조의 순조8년(1808)에 명정(銘旌)이 내려졌다.
이씨는 일찍 소원면의 국씨 가문(鞠氏家門)에 출가하였다. 그는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지효(至孝)하여, 출가해서는 시부모 모시기를 정성으로 하며 아울러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이렇게 시부모께 효도하고 남편을 섬기며 단란하게 살아오던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병석에 눕더니 병세가 점점 위독해지고 있음을 안 이씨는, 자기가 대신 죽을 터이니 남편의 병을 즉시 완쾌시켜달라고 천지 신명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기도에도 아무런 보람없이 임종(臨終)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그는 남편에 앞서 자결하려고 했는데 주위 사람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윽고 남편이 숨을 거두자 굳게 결심한 이씨는 동뢰 동실 동혈(同牢同室同穴)함이 여자의 본분이니 남편의 뒤를 따름은 당연한 일이라 하며, 용모 단정히 가다듬고 마침내 그날 밤 음독 순사(飮毒殉死)하였다. 뒤에 충청남도와 서산군에서 포상(褒賞)이 있었다.
이씨는 태안읍내에 거주하는 윤필청(尹弼淸)의 부인이었다. 그는 일찍 출가하여 단란한 가정 생활을 꾸려오다, 갑자기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 과부가 되었다. 이씨는 즉시 남편의 뒤를 따라 순사(殉死)하려고 결심했으나, 주위의 강력한 만류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늙은 시부모와 어린 자녀를 위해 살아가기로 다짐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베를 짜고 있었는데, 마침 흑심을 품은 세리(稅吏)가 들어와 이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이에 강력히 항거했으나 불가항력으로 성폭행 직전에 이르게 되자, 이씨는 칼로 세리의 얼굴을 찌르고 자신은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스스로 잘라버렸다. 그런데 스스로 자른 손목에서 출혈이 심하여 마침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뒤 영조(英祖) 32년(1756)에 명정(銘旌)이 내려졌다.
이 정씨 부인은 일찍 남면의 신장리에 거주하는 박명도(朴命道)에게 출가하였다.
이렇게 박명도에게 출가한 그녀는 단란한 생활을 꾸려오던 어느날 용무(用務)로 남편이 안면도에 가던 중 갑자기 돌풍으로 인해 나룻배가 뒤집혀 익사(溺死)하니 시체도 찾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씨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라 순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