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蘇州) 가씨로서 태안읍 상옥리서 출생했으나 생졸 연대(生卒年代)는 미상이다.
일찍 일본(日本國)에 유학하여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니 마침 국내서는 방방곡곡에서 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때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경(日本警察)은 매일같이 마을을 돌면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에 간직하고 있었던 항일(抗日) 의식은 더욱 확고 부동하게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는데, 어느날 자기 처가 일경에게 회롱당하는 것을 보고 이에 분격하여 칼을 들고 나가 일경을 살해함으로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나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연행되어 갔다.
옥파 이종일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의 닻개(碇浦)에서 성주 이씨인 교환(敎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일찍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머리가 매우 명석해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그를 추종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호를 옥파라 하였는데, 그후 천도교에 입교(1905)한 다음 묵암(默菴)이란 도호(道號)를 받았으며, 그 밖엔 필명(筆名)으로 천연자(天然子)·중고산인(中皐散人)·중헌(中軒) 등이라 하였다.
옥파선생은 일찍 15세 때에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나 상경(1873)하여 다음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1882년에는 박영효(朴泳孝) 수신사를 따라 일본(日本)에 건너갔었는데, 당시의 일본사회의 개화된 실상을 목격하고 귀국하였다.
옥파선생은 이때부터 마음의 한 구석에서 개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적으로 개화이념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후로 16년 뒤인 1898년의 운양 김윤식(雲養金允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윤식 선생은 당시 대한학자(大漢學者)였는데, 옥파선생은 그의 계동(桂洞) 자택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열강의 각축전 속에 국운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만큼 누란의 위기에 봉착했던 구한말(舊韓末), 이때 옥파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구국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우선 固陋한 舊習을 打破하지 못하고 있는 國民들에게 개화사상과 자강의식을 鼓吹시키고 啓蒙하기 위해 純한글로 된 帝國新聞을 創刊하였던 것이다.
또한 옥파는 오늘의 새마을 정신에 해당되는 이른바 「新村精神」을 제창하여 국민의 의지적이며 보존적인 정신을 개조하여 진취적이며 활성화된 국민의식의 재구성을 추구하였다.
이같이 선각자로서의 뛰어난 探究力과 총명한 재질을 지닌 옥파선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警鐘一世의 直筆을 휘두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옥파는 실학계통의 학문을 전수하여 이를 실천하였으니, 즉 새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신교육을 실시하여 인재양성은 물론,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한편 발달한 서양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여 시국근대화를 촉진시켜 국력을 권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옥파선생은 獨也靑靑한 志操와 의로운 행동으로 68년간의 생애를 통해 애국애족의 일념에 한 점의 추호도 없었으며, 더구나 3.1독립 운동에 즈음하여 일제하의 장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 要路에 배부한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1독립 운동이 獨立宣言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때에 이 33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33인의 이름은 우리 近代史의 위치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중 일부 인사들이 변절 또는 挫折하였으니,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옥파는 33인의 命脈的 의미를 살린 인물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옥파선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아심마저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옥파이종일선생은 길이 千秋에 特技해야 할 人物인 것이다.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총칼과 맞서 싸우며 오로지 救國一念 속에서 한스런 생을 마친 고귀한 분이었다.
이미 90년전에 제창한 옥파의 포부와 애국사상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게 빛나고, 또한 후인들에게도 길이 木鐸이 되고, 아울러 不滅의 상징으로서 민족의 指標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특히 오늘에 사는 우리들의 정신 계발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옥파는 3.1독립 운동 당시 民族代表로서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낭독한 독립운동가이며, 따라서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 개화사상가, 한글학자 실학자 여성운동의 先覺者 그리고 민족주의자로서의 뛰어난 애국사상가였다.
沃坡先生의 獨立思想을 행동화의 길로 더욱 치닫게 하고 아울러 大韓의 獨立을 熱望케한 것은 1910년의 9월 末頃부터였다.
月南先生의 권유로 獨立協會에 加入하였고, 또한 普成社內에 獨立運動의 中樞的 역할 수행을 위해 秘密結社로 天道敎國團을 조직하고 그의 團長에 就任하였는데, 이때 名譽총재로는 손병희, 부단장 김홍규 그리고 총무엔 張孝根이 선출되었다. 그 후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 毒殺事件으로 인해 民衆이 격분하여 切齒腐心하고 있을 때 沃坡先生은 이제야 말로 우리의 宿願인 民族主義 民衆運動을 本格化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 기회에 民衆示威 救國運動을 전개하는데 진정한 민중 운동으로 펴나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獨立宣言書를 身命을 바쳐 인쇄하기로 결심하고 沃坡李鍾一, 張孝根 崔南善, 金弘奎, 申永求 등과 普成社에서 문을 굳게 잠그고 비밀리에 인쇄에 들어갔는데, 우선 1次로 1919年 2月 25日에 25,000枚를 인쇄하여 天道敎本部로 운반하여 보관하고, 다음 2次로 同月 27日에 다시 1萬枚를 增刷하여 모두 3萬5千枚를 인쇄하였다.
이렇게 獨立宣言書의 인쇄를 성공리에 마친 沃坡先生은 28日 저녁 孫秉熙 宅에 찾아가 民族代表 33人의 한 사람으로 獨立宣言書에 署名捺印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3시쯤 되었을까 몹시 마음이 설레인다」고 述懷하고 있는데, 沃坡備忘錄에 따르면 당시의 心境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나라가 自主獨立國임을 世界萬邦에 宣言하고 國民들은 萬歲를 高唱하는 聖스러운 날이다. 오늘의 擧事가 기필코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月 1日은 토요일이며 날씨도 淸明하고 따뜻하였다. 沃坡先生은 泰和館에서 義菴 孫秉熙씨의 지시를 받고, 즉 獨立宣言書를 직접 인쇄하고 배부하였으니 朗讀하라고 해서 沃坡李鍾一先生은 郞郞한 목소리로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을 宣言하노라‥‥‥」하고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이때 孫秉熙는 崔麟에게 日本警務總監府에 電話로 所在를 알리게 하고 당당하게 스스로 잡혀가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李甲成을 總督府에 보내어 獨立宣言書를 제출케 하고, 鐘路警察署에는 다시 人便을 보내어 알렸다.
義菴의 이 같은 處事에 일부 代表들이 露骨的으로 不滿을 吐露했으나, 天道敎의 代表들은 대부분 義菴의 지시를 따랐으며, 그리고 基督敎의 代表들은 차려 놓은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예수께 기도만 올리면서 경건하고 긴장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같이 擧事의 내용을 알린 약 20여분 뒤에 日本警察은 5대의 自動車와 수 십명이 달려와 삽시간에 泰和館을 포위하였다.
이때 義菴은 泰然自若한 姿勢와 仙骨風으로 日警을 壓倒하고 있었다. 그리고 韓龍雲은 「오늘의 우리 모임은 곧 獨立萬歲를 高唱하여 獨立을 爭取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장서고 民衆이 뒤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身命을 바쳐 自主獨立國이 될 것을 期約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正正堂堂하게 最後의 1人까지 獨立爭取를 위해 싸웁시다」라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뒤이어 大韓獨立萬歲를 소리 높이 3唱하고 民族代表 一同은 義菴을 선두로 日警에게 체포되어 鐘路警察署에 連行되어 갔다.
이렇게 連行된 一行中에는 그들의 酷毒한 拷問으로 인해 일부 人士들이 變節하고 있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孫秉熙 吳世昌 權東鎭 崔麟 李昇薰 韓龍雲 李明龍 洪秉箕 權秉悳 金昌俊 등은 毅然한 氣魄을 보여 기분이 상쾌하다고 沃坡先生은 自己의 備忘錄에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沃坡先生은 不義 不正을 보고는 참을 수 없는 潔癖性이 있어서 비겁한 자들의 소행은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爲人이었다.
萬歲獨立運動後 즉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나, 日本警察의 訊問에서 沃坡先生은 「우리의 독립 운동은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身命을 다바쳐 계속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日本警察로부터 「李鍾一이라는 자는 지독한 악질이다」라는 욕설을 들었다. 또한 그들로부터 民族代表者가 된 동기를 말하라고 하니 沃坡先生은 나는「帝國新聞 社長으로 10여년간 實務까지 맡았으므로 항상 民族思想을 堅持하고있었다. 우리나라는 日本에 강제로 倂合되었으니 獨立國이 되는게 나의 所願이다. 그렇게 되려면 獨立宣言書 代表者의 한 사람이 되어 民衆을 편안하게 이끌어야 하겠다는 決心으로 가담 했다」고 주저치 않고 힘주어 답변했다.
그 후 재판 결과 拘束된 一行中 李鍾一 孫秉熙 崔麟 吳世昌 權東鎭 李昇薰 韓龍雲 咸台永 金昌俊 등은 3年의 最高刑을 言渡받고 服役中에 만기 3個月을 앞두고 2年 9個月만에 假出獄되었는데, 이때 沃坡를 비롯하여 吳世昌 權東鎭 崔麟 金昌俊 咸台永 韓龍雲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出獄된 沃坡 조금도 信念을 굽히지 않고 다시 獨立運動을 展開하기 위해 自主獨立宣言文을 손수 作成하여 己未 3.1獨立運動 3周年이 되는 날인 1921年 3月 1日에 재차 示威를 벌릴 계획이었으나, 印刷中에 日警에게 발각되어 未遂에 그치고 말았다.
이 第2의 自主獨立宣言文의 내용을 살펴보면「우리 大韓은 당당한 自主獨立國이며 平和를 愛護하는 世界의 으뜸가는 國民이다」로 시작하여「우리들의 獨立투쟁은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普成社 社員들은 다시 蜂起하여 祖國獨立을 위해 最後까지 목숨을 바칠 것을 決意하고 宣言한다」라고 하였다. 이어「우리의 國魂이 健全하면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蹶起해서 일본을 逐出해야 하며, 그리고 社會主義風潮를 拂拭해야 한다」고 하였다.
끝으로「우리의 前進에는 光榮과 幸福이 있을 뿐이니 속히 이 독립운동의 隊列에 모두 참가하여 주기 바란다」는 내용인데, 이는 매우 希望的이고 說得力이 있는 宣言文이다.
이 自主獨立宣言文은 純漢文으로 쓰여져 있는데 모두 726字로 되어 있다. 己未獨立宣言書에 비하여 그 내용이 더욱 强硬하고 또 自主獨立을 切實히 渴求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즉 獨立이란 單語를 13번이나 되풀이하여 使用하고 있는데 반하여, 己未獨立宣言書에서는 단 3번 밖에 使用치 않았다.
沃坡李鍾一先生은 1898年 8月에 帝國新聞을 創刊하여 10餘年間 經營해 오다 결국 日帝에 의하여 강제 廢刊 당했는데, 이 帝國新聞은 당시 우리 社會가 漢文을 숭상하고 한글을 諺文이라 하여 賤視하여 外面하던 때에 先覺者의 慧眼으로 과감히 한글 專用의 우리나라 最初로 女性 대상 日刊紙를 創刊했다는 것은, 앞을 내다 본 先覺者의 創意力이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帝國新聞을 발행하기 위해 약 8개월간의 치밀한 계획과 연구를 거듭하였는데, 최초로 신문 발행에 관해 상의한 사람은 柳永錫이었다.
柳永錫과 신문 발행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 新聞刊行의 目的을 다음과 같이 沃坡 는 力說하였다.
「생각하건대 國家의 開明과 開化를 위해서는 新聞만한 것이 없고 또한 國家의 主人으로서는 民衆이 으뜸이므로 우리들의 使命이 더욱 重且大하다고 하였다.
또 獨立新聞은 民衆을 선도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아직은 婦女子層을 開明케 하는데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내가 앞으로 新聞을 발행한다면 期必코 創刊號부터 婦女子의 啓蒙紙로 시작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같이 부녀자를 대상으로 신문 간행을 꾀한 것은 우리 국민의 過半數 이상이 婦女子인데, 그들은 漢文知識이 거의 없는 下層階級에 속해 있으므로 이들을 한글로 계도함으로서 막대한 女性資源을 國家發展에 活用하고자 함이었다.
이같이 未開한 國民을 開化시키는 媒體로서는 무엇보다도 新聞만한 것이 없음을 沃坡先生은 鐵石같이 믿고 있었다.
또한 新聞이란 文明과 開化를 促進시키는 도구로서 필요한 것이며, 나아가 國民大衆을 弘報하는데 가장 緊要한 것으로서 新聞만한 것이 없다고 했으며, 그리고 徐載弼을 방문하여 時國觀에 대해 歡談하는 과정에서 徐氏가 말하기를 民權은 곧 人民의 權利이며 正道이므로 이를 固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힘을 다해 이 事業을 추진해야 하는데 그 方法의 하나로서 新聞을 創刊하는 것이 제일이니 힘을 다해 신문을 발행하라고 강조했다.
옥파선생은 앞에서 言及한 柳永錫을 비롯하여 崔廷植 李鍾冕 李鍾文 鄭喬 張志淵 劉盤 南宮檍 尹致昊 張孝根 등과 熟議한 끝에 마침내 1898年 8月 8日字로 帝國新聞의 창간 第一號를 발행함으로서 우리 나라 最初의 女性新聞이 되었으며, 따라서 우리 나라 발행의 日刊新聞으로서는 세번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같이 帝國新聞의 女性啓蒙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創刊 당시 2千部를 발행하던 것이 불과 3個月만에 3千 5百部로 增刊되었으니 女性代辯紙로서의 名實相符한 그 使命을 다하였으며, 특히 獨立協會 회원의 弘報機關化할 정도로 그 威勢가 당당하였으니 당시의 高宗皇帝께서도 帝國新聞의 論調와 그 使命感의 至大함을 알고 發行者인 沃坡李鍾一先生을 致賀하였다.
이처럼 제국신문이 女性啓蒙에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즉 3.1獨立運動 당시 수 많은 女性들이 피를 뿌리고 苦楚를 겪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우리 民族史에 영원히 빛날 이름들이 있으니 그는 柳寬順을 비롯하여 金마리아 吳玄洲 吳玄觀 李貞淑 李信愛 등을 우선 들 수 있다.
獨立運動에 참가했다 하여 日本警察에 체포된 女性들이 무려 400여명에 달했었다 하니, 이는 당시의 女性運動이 방대하였음을 端的으로 말하여주는 것이고, 또한 그 底力은 오로지 帝國新聞의 先驅的인 女性啓蒙 및 그 啓導에 힘입은 까닭이었다.
沃坡先生은 帝國新聞을 創刊 그의 발행에만 專念한 것이 아니라, 이 밖에도 大韓皇城新聞 獨立新聞 大韓新報 萬歲報 大韓每日新報 그리고 天道敎月報課長 등을 거치면서 國民啓蒙을 위한 많은 글을 執筆하여 실로 그의 言論思想은 國民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갔던 것이다.
특히 그의 春秋筆法의 銳利한 筆鋒은 당시 腐敗 不正을 일삼는 執權層을 놀라게 하였으며, 滔滔하게 흐르는 江물처럼 한구석의 막힘도 없는 沃坡先生의 筆致는 國民들에게 널리 膾炙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淸高하고 銳利한 沃坡의 史筆論法은 絶望의 문턱앞에 섰던 舊韓末의 우리 社會에 등불이 되었으며, 그리고 나라의 앞날을 提示하는 청사진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帝國新聞은 당시의 啓蒙的인 기능면에서 國民들에게 새롭고 希望的인 큰 힘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沃坡先生은 論說을 통해 國民의 進路를 啓導하고 아울러 政治 經濟 社會 文化 敎育 宗敎 言論 軍事 外交 女性問題 등은 물론 精神文化面에도 直筆을 휘두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따라서 沃坡의 論說은 올바른 비판과 代案의 提示로 國家興隆의 推進的 의견을 담당했던 것이었다.
沃坡李鍾一先生은 나라가 開化하고 富國强兵을 이룩하려면 敎育以外의 좋은 길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民權이 바로 國權인 까닭에 民力을 기르고 봉건체제를 改善하기 위해선 우선 民衆啓蒙學校를 設立하여 人材育成을 先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沃坡先生은 國力培養의 지름길은 오로지 敎育밖에 없음을 굳게 믿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1898년 11월 서울에 興化學校를 세웠으며, 다시 3年後인 1901年에는 國文學校를 建立하고, 이어 普光學校(1905)와 普成學校(1908) 校長에 就任하여 직접 敎育活動에 힘을 쏟았다. 당시의 우리 社會相이 人材育成과 才能開發이 시급함을 切感하고 이렇게 몸소 敎育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또한 沃坡先生은 敎師는 酵母役割을 해야 한다고 敎師論을 主唱하였는데, 敎育을 이렇게 비유하였다. 즉 敎育은 國家의 뿌리가 되고 知識은 나무의 줄기가 되며 國權은 나무의 열매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敎師는 이러한 敎育이라는 나무를 어떻게 하면 건전하게 자라나고 뿌리가 튼튼하며 열매가 풍성하게 잘 열리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또한 직접 가꾸는 育林人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敎育風土라는 분위기의 淸濁이나 맛 그 花采, 그리고 방향까지를 결정하는 酵母의 역할을 담당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敎師各自가 누룩의 구실을 하면 머지않아 敎育全體를 바꾸어 놓을 만큼 그 役割은 대단히 큰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沃坡先生은 특히 家庭敎育의 重要性을 강조하면서 敎育 中에서도 家庭敎育이 첫째가는 교육으로서 이것은 義를 존중하는 인간으로의 形成을 위한 父母들의 노력이 절대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아울러 沃坡先生은 父母들의 言行은 물론이지만 家庭에서 듣고 보는 가운데 자연히 익히고 깨우치는 것이 많으므로, 엄격한 家訓으로 또는 家法으로 가정이 지닌 敎育的 분위기가 家風의 重要性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로부터 偉大한 인물은 이 같은 家法이 엄격한 家庭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沃坡先生은 어린이의 成長과 育兒法에 대하여도 言及하였는데, 특히 어릴 때의 家庭敎育이 平生을 左右한다고 강조하며, 사람은 동물이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장난을 좋아하며 몸을 움직이고 싶어하는데, 이는 자연의 理致이니 禁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장난이 지나칠 때는 이를 미리 禁止시키고, 그 대신 숫자 놀이 그림조각 맞추는 법 나무가지로 城을 쌓고 집 짓는 법 등을 가르쳐야 한다. 이는 思考力을 기르며 合算과 나눗셈을 가르쳐서 슬기의 門을 열리게 하는 것이다. 또 목마와 종이 연(紙鳶) 그리고 어름치기 등의 놀이를 해서 身體를 단련시켜야 한다.(智德體⇒全人敎育) 아울러 食事하고 잠자는 시간은 일정시간을 정해서 이를 어기지 않도록 말과 행동과 어른 공경하는 예절과 친구 사귀는 법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沃坡先生은 앞에서 말한 帝國新聞을 순한글로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그가 한글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沃坡先生은 1909年 9月 大韓帝國國文硏究所의 硏究員에 被任되어 한글연구에 專念하였다. 그는 한글의 實用主義的인 見解를 주장하였는데, 다른 학자들이 古篆이나 梵字 起源說을 주장한 것에 반하여 沃坡先生은 發音器官說을 강조하였다.
訓民正音 解例本이 발견(1940)되기전의 沃坡先生의 이 器官說은 놀라운 卓見이었다고 南廣祐교수는 언급하였다.
즉「ㅇ ㅅ ㄱ ㄴ ㅁ」 등의 5字를 基本으로 하여 여기에 加劃加點하여 製字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아울러 喉齒牙舌脣音이 각각 발음 기관설을 상징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순음 또한 沃坡先生의 諺文義解에 따르면 天音(初聲)24자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5音 | 天音 | 形象(發音) | ||
---|---|---|---|---|
宮 | 土 | 喉音 | ㆁ ㆆ ㅎ ㆅ (으 흐 ㅎ ㆅ) |
목구멍 形象 소리가 목구멍서 남. 이의 형상 소리가 잇사이서 남. |
商 | 金 | 齒音 | ㅅ ㅿ ㅈ ㅊ ㅆ ㅉ (스 ㅿ 즈 츠 쓰 쯔) |
이의 형상 소리가 잇사이서 남. |
角 | 木 | 牙音 | ㄱ ㅋ 그 ㄲ (그 크 그 ㅺ) |
어금니 형상 소리가 어금니쪽서 남. |
徵 | 火 | 舌音 | ㄴ ㄷ ㅌ ㄹ ㄸ (느 드 트 르) |
말린 혀의 형상 혀의 움직임으로 소리 남. |
羽 | 水 | 脣音 | ㅁ ㅿ ㅂ ㅍ ㅃ (므 ㅿ 브 프 ㅽ) |
입술의 형상 입술의 움직임으로 소리 남. |
ㅇ ㅣ ㅡ ㅗ ㅜ ㅏ ㅓ ㅛ ㅠ ㅑ ㅕ(ㅇ이으오우아어요유야여)는 宮이요 土인 목구멍 소리이며, 따라서 이 地音11字를 基本으로 여기에 加点加劃하여 만든 것이다.
ㅇ ㅅ ㄱ ㄴ ㄷ ㄹ ㅁ ㅂ (응읏윽은읃을음읍)이 人音 8字는 바로 天音의 分子이면서 다만 그 音만을 달리하여 天과 地의 끝 위치에 있어서 天의 道를 行하며 地의 德을 세워, 가는 곳마다 융합되며 베푸는 곳마다 변화해서 天地人(三才)의 合一하는 大本이며 大功勞者인 것이다.
대개 이 3音은 모두다 天5 地2라는 7字에 基因하여, 변해서 35字가 되고 두 번 다시 변하여 43音이 되어 서로 符合하면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면서 각기 그 글자를 이루고, 글자마다 音을 달리하여 千言萬語를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또한 沃坡先生은 한글의 敎授法을 硏究하여 從來의「가갸거겨」식으로 가르치지 말고 天音(ㄱ ㄴ ㄷ ㄹ‥‥)과 地音(ㅏ ㅑ ㅓ ㅕ‥‥)의 글자를 합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논리적이고 科學的인 敎授法이었다.
이같이 우리 한글을 體系的이고 合理的으로 硏究함으로서 周時經선생보다도 10여년이 앞선 것이라 하니, 이는 한글 學者로서의 명분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한글」이란 명칭을 沃坡先生이 最初로 使用했다고 하니 이점에 대하여는 앞으로 충분히 硏究되어야 할 문제이다. 沃坡李鍾一先生은 우리 한글만으로 모든 學問이 가능한데 왜 한글을 소홀히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어려운 漢文을 배우다가 다 깨치기도 전에 漢文속에서 늙어버리게 되니, 어느 겨를에 새 학문을 배울 시간이 있느냐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國文은 世界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제목으로 帝國新聞(1900. 1. 10)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
우리나라도 國文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漢文과 比較하면 國文이 훨씬 편리하고 과학적인 理致로 짜여져 있어 배우기도 쉽고 漢文보다 表現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 가히 世界의 글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온 國民은 모두 國文을 힘써 사용하고 연구해서 발전시키면 世界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글이 될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한글을 諺文 또는 아녀자의 글이라 賤視하고, 배우기 어렵고 쓰기 힘들며 말을 만들기도 어려운 漢文만 글로 여겨 政府文書나 通信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漢字만 使用하고 있다.
우리 국문은 世宗大王이 創製하셨는데 字母音을 구별해서 즉「 ㄱ ㄴ ㄷ‥‥」등 17字의 子音과「ㅏ ㅑ ㅓ ㅕ‥‥」등 11字의 母音을 만들어 이것이 합해져야 글자가 되도록 하였다.
子音은 입안의 소리나는 곳에 따라 입술에서 나는 소리, 혀에서 목구멍에서 잇사이에서 등 다섯 군데 소리가 달라서 입 모양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母音도 입 벌리는 정도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고 각각 子音과 합해져 하나의 글자가 된다. (ㄱ과 ㅜ가 합해서「구」가 되고 구에다 ㅓ를 더해「궈」를 만들고 궈에다 ㄴ 받침을 해서『권」이 된다).
이렇게 한글은 理致가 분명하고 말을 만드는 方法이 科學的이므로 우리는 비록 諺文이라 賤視하고 있지만 外國人들은 한글의 精妙함을 칭찬하고, 우리 國民들이 이런 글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책도 많이 만들고 新聞도 刊行해서 文盲한 사람이 없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主人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글을 팽개쳐 둔 채로 있다. 가령 東西洋의 史記 聖典이나 法律 章程 등을 모두 한글로 번역해 사람들이 읽기 쉽게하면 모든 사람들이 세상 형편을 알게 되고, 또 좋은 책을 읽어 행실을 바르게 가지려 노력하고, 다른 나라의 사정을 알고 경쟁심이 일어나 나라를 위해 힘쓸 것이니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라 하겠다. 배우기 어려운 漢文에 매달려 科擧試驗에 급제하는 것만 성공으로 알고 다른 事業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 어떻게 나라가 발전할 것인가.
위의 말은 漢文을 숭상하지 말고 배척하며, 한글만 공부하는데 힘쓰란 말이 아니고, 한글도 漢文과 같이 중하게 여겨서 널리 쓰고 연구해서 발전시키면 한글이 世界에 빛남과 아울러 나라도 명예롭고 富强해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沃坡先生은 大韓協會報 第2號에서「國文을 論함」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 國文은 28字만으로도 千言萬語를 능히 만들어낼 수 있는 神技한 글자로서 그 배우는 법도 역시 쉬워서 하루 이틀이나 4. 5일 동안이면 그 뜻을 환히 깨닫고 책을 대하면 수월하게 읽을 수 있으니, 그 편리하고 알기 쉬운 것은 世界 여러 나라 글중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강조했다.
沃坡先生은 1858年에 出生하여 1925年에 他界할 때까지 一生을 오로지 나라 사랑의 一念으로 獻身한 보기 드문 愛國思想家였다. 특히 言論을 통해 國民을 啓導하였는데, 그는 政治 經濟 社會 文化 敎育 軍事 外交 등 多方面에 걸쳐 直筆을 구사하여 社會改革에 劃期的인 成果를 거두었다. 이 같은 多方面에 걸친 내용을 모두 考察함이 당연한 것이었으나, 地面上의 制約으로 인하여 일일이 言及하지 못하고 本論에서 우선 沃坡의 獨立思想을 비롯하여 言論 敎育 한글 등에 관한 분야만 言及한 것은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새마을 운동의 根幹인「新村精神」을 비롯하여 實學 및 宗敎思想을 다루지 못한 점은 몹시 안타깝지만 다음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스런 일은 지난 1979年 3月 沃坡李鍾一先生의 生家를 박춘석(朴春錫)이 발견하고, 그 후에 沃坡李鍾一先生追慕業遠北推進委員會를 組織하여 그동안 生家를 復元하고 祠宇(忠愛祠)를 建立(1990年 5月)하여 그의 高潔한 愛國思想을 繼承하는 한편 泰安郡民의 精神的 支柱로 받들기 위해 94년 3월 1일부터 3.1절 기념행사를 그의 生家와 忠愛祠 광장에서 거행하여 오고 있다.
이종헌은 1890년 4월 9일 안면읍 승언리 91번지에서 이규삼(李圭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16세 때까지 한문을 배우던 중, 마침 우국지사 김병년(金炳秊)이 안면도에 낙향하여 이곳에서 新敎育을 통해 조국 광복을 이룩하고자 광무(光武) 10년(1906) 12월 28일에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세웠다. 이 때 이종헌은 그 동안 배워오던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광영학교의 고등과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후 1918년에 광영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열심히 후진 교육에 매진함으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모교(母校)의 제9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광영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종헌은 시대적인 사명 의식을 뼈져리게 느끼면서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대한독립결사단을 조직하고 그의 단장이 되어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하여 오던중, 1919년 3월 1일 천지를 진동시킨 독립만세의거(獨立萬歲義擧)가 일어나자 3월 6일 서산읍에 있는 야소교회와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니 삽시간에 수 천명의 군중이 이에 합세하여 가두 시위를 폈다. 이 때 이종헌 교장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한 편, 교직원·제자 재학생 그리고 애국 청년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에 가세하였다.
이같은 군중 시위에 조국 광복을 확신한 이종헌은, 대한독립결사단 운영을 더욱 활성화시켜 오던 중 같은 해 11월에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과 관계하고 있는 이종성(李鍾聲)이 대한독립단 수령 윤종정(尹宗楨)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경기도·충청남도 등지를 왕래하며 암약(暗躍)하던 중에, 마침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재무관 한태국(韓泰國)·서병철(徐丙轍)을 만나 서로 협력을 다짐하게 되었다.
이때 서병철은 고향인 서산에 내려와 대한독립단 서산지단을 조직하고, 아울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할 것을 이종성에게 지시한바 그는 이같은 밀령을 받고 안면도에 내려와 광영학교 이종헌 교장을 만나니, 서로 뜻이 통하여 맹우(盟友)로서의 굳은 다짐을 하고 이에 따라 이종헌은 서산지단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이종헌은 먼저 조직한 결사단과 일체(一體)가 되어 교육 사업을 통한 애국 사상의 고취와 독립 투사 양성을 위한 동지를 규합하기로 결심했다.
이에따라 직접적인 애국 행동의 표현으로 독립 운동의 자금 조달을 꾀하기로 하고 우선 가재창(賈在昌·오몽근(吳夢根)·임정호(林楨鎬)·염성환(廉星煥)·편무연(片茂捐)·이재국(李宰國)·박준용(朴準用)·박봉래(朴鳳來)등을 단원(團員)으로 가입시키고, 또한 태안·부석·남면 등 서산 일대의 애국인사들을 순방하며 독립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이종성·이기환(李基煥)·가재창·그리고 이종헌 등이 상경(上京)하여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재무관인 서병철·김상옥(金相玉)에게 전달하였다. 이처럼 독립단의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이종헌 단장은 마침내 일경(日本警察)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종헌은 많은 사람을 독립단에 가입시키고 또한 군자금을 모금한 우두머리라 하여 심한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결국 공주지방법원에서 2년6월의 언도(言渡)를 받았으나 이에 승복치 않고, 다시 경성복심원(京城覆審院)에 항소하여 재판을 받던 중, 검사가 원심에 승복하기를 권하니 이종헌은 손목에 차인 쇠고랑으로 책상을 치며 검사는 왜 본인의 항소권(抗訴權)을 막는가 하고 고함을 치니 법정이 매우 소란하였다. 검사는 이에 대노하며, 피고는 신성한 법정을 모독했다 하여 즉석에서 9년을 求刑하니, 판사도 이에 동조하여 4년형(形을) 언도하였다. 이종헌 단장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 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옥하였으나, 그 후도 조국 광복에 대한 의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일경(日本警察)의 고등요시찰인물(高等要視察人物)로 감시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학교 교육(學校敎育)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낚시회·화수회·시제·대동계 등의 명목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활약하여 오다 마침내 8. 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니 이종헌은 초대 안면면장으로 추대되어 면민 복지 증진과 조국 발전에 헌신하여 오다· 마침내 1957년 6월 18일 타계(他界)하니 향년 67세였다. 이같이 이종헌 면장은 일생을 통해 조국 광복과 면민의 복지 향상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니 그 고귀한 뜻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지난 1977년 12월 13일에 대한독립 유공자로 추천되어 대통령의 표창을 추서(追敍) 받았다.
1923년 4월 8일 태안 도내리에서 출생 인천상고 재학시와 이리식산은행 근무시 독립투쟁타가 일경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29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사함.
1986년 12월 16일 독립운동 유공자로 대통령표창 추서
문봉의 선생은 충남 태안 안면 출신이다. 그는 1919년 9월 안황으로 부터 대한독립애국단의 취지와 목적을 듣고 이에 가입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 등이 주도 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였는데 재무감독 겸 충청도 방면의 조직을 맡았다. 당시 대한독립애국단에서는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통하여 임시정부 연통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10월 동단의 단장 신현구의 지시에 따라 충청도 지역의 조직 확대와 자금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동년 11월까지 충청남도 청양군, 논산군, 예산군 등지에 지부 조직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년 12월 초에는 직접 충청도 지역에 내려가 청양군의 정상길 등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자금수합 활동도 폈다.
또한 11월 하순경 동단의 단장 신현구가 일경에 피체됨에 따라 본부 조직의 개편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동년 12월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과 힘을 합쳐 혈복단을 새로이 조직하여 동단의 충청남도 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자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전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24년 3월 30일 근흥면 안기리 353번지에서 부 한관(韓館)씨와 모 박정덕(朴貞悳)여사 사이 4남으로 태어난 한준(韓準) 선생은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선생은 16세 때부터 일제에 항거, 항일운동을 하면서 마을 청소년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사상을 불어넣어 주다가 수 차례 일경에 붙잡혀갔으나 어린 소년이란 이유로 훈방된 뒤 사상적 감시대상 인물로 지목돼 갖은 고초와 압박을 받게 됐다.
18세때 경성사범학교를 졸업 서산군 부석국민학교 교원으로 발령 받은 그는 당시 감시의 눈길이 매서워 불평 한마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정신과 항일애국사상을 가르치다가 일인교장에게 적발돼 대전지방법원에서 1년 6월형을 언도 받게 된 것.
그러나 검사가 원심판결에 불복 항소하는 바람에『일본천황에 대한 불경』 죄목으로 3년 징역형을 받아 인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판결문을 보면 교사재직 당시 일본사상에 푹 젖은 학생이 교실에 들어와서 천황과 궁성 등의 사진을 담는 봉호대가 비뚤어져 있는 것을 바르게 걸어 놓아야 한다고 지적하자, 천황의 대가리를 잘라온 자에게 포상을 한다며 저것들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한다고 일제에 항거했다는 것.
3년 형기 3개월을 앞둔 1944년 4월 29일 일제의 수형자징병 방침에 따라 가출옥한 그는 즉시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키 위해 안흥항에서 해상로를 찾던 중 체포되고 강제징병 당해 북만주에서 병영생활을 하다가 남양군도로 배속돼 이동 중 8. 15광복을 맞아 극적으로 귀한했다.
광복 후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은 오로지 반공애국이라고 판단하고 경찰에 투신, 남로당조직 토벌에 앞장섰고 6.25 동란이 발발하자 방위군 중위로 복무하면서 많은 공로를 세웠으나 50년 8월 18일 충남지구 전투에서 산화했다.
조카들에 의해 뒤늦게 항일공적인 판결문 등 관련기록이 밝혀져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유족으로는 딸 惠子씨와 동생 韓洽(서산시 동문동 741-4) 조카 韓英(서울 양천구 신정동 목동아파트 902동 1002호) 등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