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후진이요 호는 송재공(松齋公)이시며 선조조(宣祖朝) 때 선무공신(宣武功臣)이시다. 관직은 어모장군충무위부사과(禦侮將軍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시고 또한 국조개국(國祖開國) 이하 지양무(至揚武) 22공신의 한분이시다.
공은 신라 경순왕 22세손이요 관조 김녕군(貫祖金寧君), 김시흥(金時興)의 14세 손으로서 선조인 호조판서 순(順) 영의정 관(觀)의 후예이시다. 그리고 단종 복위 운동의 주역이었던 사륙신 충의공 김문기(忠毅公 金文起)의 6세손으로 사대부의 후손이다.
공은 조선선조8년(1574)에 충청북도의 영동(永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지혜가 뛰어나고 용맹하여 동네에서 칭송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후 1590년 태안군 근흥면 도황리로 이주하여 우거(寓居)하였다.
공께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국수호의 사명감을 느끼고 호남지방에서 의병 5천명을 모집하여 창의사(倡義使)로서 남해지역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진중에서 해전에 임했다.
공은 전략과 용맹이 뛰어나 일본수군(日本水軍)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나, 애석하게도 선조31년(1597) 11월 노량진대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뒤 고종10년(1873)에 고종황제께서 장계(狀啓)를 내리어 그의 충용과 전공의 업적을 충훈부에 소재(昭載)하고 기린각에 보존케하여 정훈 자손 만대에 관대예우하라는 계하사목(啓下事目)을 내리었다.
충훈부에서는 실사절목(實事節目)을 등사반포하고 지방관에게 요목빙고(要目憑考)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같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위국충성은 영원히 천추만대에 빛날 것이며 후손들은 선조의 이 거룩한 성업을 길이 받들어 귀감으로 삼을 것이다.
공의 자는 치경(致卿)이요, 호는 석포(石浦)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不義)에 도전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또한 학문과 무예(武藝)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마침내 조선조(朝鮮朝)의 영조 1년(1725)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영조4년(1728)에 이인좌(李仁佐)가 충청북도의 청주(淸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원수(大元帥)라 칭하며 진천(鎭川)을 거쳐 죽산(竹山)·안산(安山)등에 진격했다.
이인좌가 안성산상(安城山上)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석포는 도순무사 오명항(都巡撫使吳命恒)과 합세하여 이를 쳐서 평정하였다.(討平)
이에 조정에서는 석포에게 양무원종 이등공신(揚武源從 二等功臣)을 봉하고 녹권(錄券)을 특사(特賜)하는 한 편 복호(復戶)를 내렸다. (공의 9대손인 원모(元模))가 남면 몽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지난 1987년에 작고하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영조(英祖)가 내린 반교문(頒敎文)을 원문(原文)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현(鄭俔)은 조선조 선조 28년인 1595년에 절충장군이었던 정순복(鄭順福)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本貫)은 온양이요 호는 인재(仁齋) 자(字)는 원효(源孝)로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에도 능하였지만 무예에 더욱 뛰어나 벼슬이 종5품인 군기시(軍器寺)의 판관(判官)에 올라있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삭호(削號)하고는 서궁(西宮)에 유배 시키는등 비율리적인 행위를 하는것을 보고는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원종훈(原從勳)공신의 녹권(錄券)을 받았다.
그러한 정현(鄭俔)은 인조 5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온 나라안이 수라장이 되어갈때 인조 임금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하여서는 강화섬을 끝까지 지킨 중견장교 중의 하나였다.
그 후 아버지인 정순복(鄭順福)이 돌아가자 벼슬을 내놓고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온양에 내려와 살게되었는데 1636년인 병자년에 오랑캐들이 다시 처들어와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게되자 온양에서 우리지역의 소원면 모항리에 낙향하여 살다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42세의 젊은 나이였다.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모항리에 살고 있다.(조선환여승람)
조목의 자는 희보(熙甫)요, 호는 낙분당(樂分堂)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인데, 고려 충선왕(高麗忠宣王)때의 공신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이다.
일찍 연일현감(延日縣監) 재직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들 형제를 불러놓고 숙의(熟議)한 끝에 왜병(倭兵)을 침략자로 단정하고 이를 응징(膺懲)하여 나라를 구하는 것이 국민된 도리임을 깨닫게 하고, 마침내 3부자(3父子)는 나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3부자는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紅衣將軍 郭再佑義兵將)과 합세하여 일당백(一當百)의 정신으로 왜군을 무찌르는데 수 차에 걸쳐 혁혁(赫赫)한 전공을 세웠다.
현재 원북면 대기리에 자리한 홍현사(弘賢祠)는, 낙분당(樂分堂)의 영정을 안치한 사당으로서 그의 후손이 관리중에 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홍현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조선조의 숙종6년(1680)에 태안군 원북면 대기리에서 절충장군 조도(趙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후 33세 때인 숙종39년(1713)에 증광시(增廣試)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부장(部將)·사보서별제(司甫署別提)·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거쳐 다시 웅천(熊川)·부안(扶安)·사천(泗川)·덕흥(德興)·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또 삼도통후후(三道統侯侯)·재령(載寧)·진도(珍島) 군수, 무산 부사(茂山府使)·전주(全州)·대구진(大邱鎭)의 영장(營將) 그리고 평안(平安)·함경순영(咸鏡巡營)의 중군(中軍)을 역임하였는데, 위의 열두고을(12州郡)에서 한결같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이 고을에 모두 선정비를 세워 공의 뜻을 기리고 있었다.
특히 웅천 현감으로 있을 때는, 주민들이 선정에 감화되어 더 머물러줄 것을 애원하자 목민관으로 4년간 더 근무하였는데, 마침 조영세(趙榮世)어사의 선치(善治) 상주로 인하여 당상(堂上)에 오르고 함경 중군을 두번씩이나 역임하였다.
그리고 1737년 초임시에 장살(長箭) 780·부장창(浮長槍) 1,200병(柄)·노괘철(爐掛鐵) 120坐를 신조(新造)한 별비지공(別備之功)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또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사복장(司僕將)을 지냈는데, 영조(英祖) 21년(1745) 3월20일 함경감영(咸鏡監營) 임소에서 별세하니 향년 65세 였다. 동년 9월20일에 원북면 대기리에 예장(禮葬)하였다.
현재 공의 7세손인 재풍(載豊)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