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종일선생 사적비는 원북면 반계리「닻개」에 자리하고 있는데, 크기는 가로 180㎝, 세로 156㎝, 높이 186㎝로 된 석비(石碑)이다.
옥파 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지사(愛國志士)인데 사적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한 平生을 나라 사랑의 一念으로 살다간 偉人이 있었으니 그 이름 千秋萬世에 빛날 愛國志士 沃彼李鍾一先生이다.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이곳 원북면 반계리 89번지에서 星州 李氏 高士敎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호를 沃坡·默菴이라 했고, 天然子·中皐散人·玉泉子·中軒·三一子 등은 선생의 筆名이다. 沃坡는 일찌기 총명한 재질과 뛰어난 學究力으로 漢學에 專念하더니 이미 16세에 文科에 급제 하였다. 그 후 1882년 修信使 朴泳孝와 함께 사절단의 일원으로 日本을 다녀와 그곳의 開化된 문물을 접하고 느낀바 있었으니, 이때부터 선생의 가슴속에는 개화의 의지가 불붙기 시작했다.
그 뒤 벼슬이 正二品 中樞院 議官이 되었으나 쇠퇴기의 국운을 통탄하며 취임 10여개월만에 관직을 그만 두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민중 계몽과 인재 양성이 중요함을 느끼고 신문 발행과 교육 사업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興和學校와 國文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1894년 普成普通學校 교장에 취임한 후 京鄕의 7개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忠愛에 둔 교육 목표로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國文硏究所 연구위원으로 한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생는 1898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순 한글로 편집된 帝國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10년간 민중 계몽과 개화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으나, 日帝에 의해 강제로 폐간 되었다. 1908년 선생은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피임되어 日帝의 온갖 회유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濟世救民의 정신으로 언론 활동을 전개시켰다.
선생은 正論直筆의 해박한 논설로 警鍾一世의 본보기가 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군사.종교.여성 등 筆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선생의 활동은 日本 관헌의 속박과 감시로 수차에 걸쳐 피검되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大韓協會·自强會·國文硏究會 등의 구국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 등을 역임 하였고 한편으로는 孫秉熙와 함께 나라를 걱정하면서 天道敎에 入敎하여 敎會日報를 통하여 구국의 종교 사상을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요즘 새마을 정신운동과 같은 新村運動을 제창 우리의 정신을 개조하여 구습을 타파하고 근면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역설 하였다.
이같은 선생의 선구자적 애국.애족의 정신은 결국 1919년 2월 어느날 吳世昌·權東鎭·崔麟 등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듣고 그 자리에서 민족 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수락하고 독립선언서 원고를 스스로 조판.교정.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하였다.
기미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다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인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가출옥 하니 외아들 學淳마져 호열자병으로 사망한 뒤였다.
출옥한 뒤 3년간 한국독립사를 집필하여 처음 발행한 3권을 오세창.권동진에게 한권씩 전하였으나 日警에게 압수당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一生을 몸바친 선생은 1925년 8월 31일 조국광복을 보지못하는 한을 품은채 서거하니 묘소는 망우리에 조영되었다가 뒤에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하였다.
民族主義 사상의 확립과 자강부국을 이룩하자는 실학으로 출발한 선생의 사상은 애국애족의 구국 정신과 독립운동으로 승화되어 타올랐으니 어찌 몇자의 글로 그 표현을 다 하리오.
그러나 선생의 고귀한 삶을 영원히 기리려는 뜻으로 돌에 새겨 後人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1987년 12월
저 절 로 朴春錫 짓고
長 嚴 李仲淳 쓰고
서산군수 孔秉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