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일전은 백화산성(白華山城) 내에 있었던 건물인데, 어느때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태을암에서 동북쪽으로 약 400여미터 지점에 200평 남짓한 평평한 터가 하나 있는데, 이를「태일전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옛터가 태일전터이며 또한 태일전이 어떠한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인지 이를 실증할 수 있는 사료(史料)가 발견되지 않아 내용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태일전이란 명칭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태일(太一)은 천지의 시조를 일컫는 것으로서 곧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전(殿)은 대궐을 뜻하므로 이 태일전은 바로 하느님을 모시는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일컫는 하느님이란 우리 나라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태일전은 곧 단군의 영정을 안치(安置)하는 곳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의성현(義城縣)의 고적조(古跡條)에 보면 「태일전을 빙혈(氷穴) 옆에 있다. 매년 상원(上元)에 임금께서 향을 내리시어 제사를 지낸다. 성화(成化) 14년 무술(戊戌)에 충청도 태안군으로 옮겼다..」
「太一殿在氷穴傍每歲上元降香以祭成化十四年戊戌移忠淸道泰安郡」
이 기사에서 보는바와 같이 의성현에서 태일전을 성화 14년에 태안군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성화 14년은 조선조(朝鮮朝)의 성종(成宗)9년 (1478)에 해당 된다.
그리고「신증동국여지승람」의 태안군의 사묘조(祠廟條)를 보면「태일전은 백화산 고성(古城) 안에 있다. 성종(成宗)10년 기해(己亥)에 경상도 의성현으로 부터 이곳으로 옮겨 안치 하였다.」
「太一殿在白華山古城內 成宗十年己亥自慶尙道義城縣移安干址」
이 기사에서 보면 성종(成宗)10年 기해(1479)에 의성현에서 이곳으로 이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기록을 비교하여 볼 때 앞의 「의성현」의 내용은 태일전을 태안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고,「태안군」의 기록 내용은 의성현으로부터 영정을 태안으로 이안(移安)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이안(移安)이란 내용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는데, 이안이란 곧 신주나 영정 따위를 옮기어 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성현 태일전에 안치되어 있던 단군 영정(檀君影幀)을 태안의 백화산성 내에 있는 태일전으로 옮겨온 것이지 태일전 건물까지 옮겨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의성현에서 넘겨준 연도와 태안군에서 받은 연도가 1년 차이가 있는데, 이는 그렇게 문제시 할 필요는 없다.
당시의 교통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무술 연말(戊戍年末)에 의성현을 출발했다면, 다음 해인 기해 연초(己亥年初)에 태안에 도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왜 단군 영정을 멀리 의성에서 태안으로 옮겨 왔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명(明)나라 사신이 안흥항을 통하여 입조(入朝) 내왕(來往)할 때 수로(水路)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의 국조(國祖) 영정을 태안으로 이안(移安)하여 그의 영험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中國) 사신이 입출항(入出港)하는 안흥항과 태일전이 있는 백화산성이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함으로 뒤에 태일전을 다시 안흥성 내에 있는 태국사(泰國寺)로 옮겼다고 한다.
1920년경에 안흥성을 찾은 위당 정인보(爲堂鄭寅普)가 태국사에서 태일전(太一殿)이라 쓴 현판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화산성의 태일전에서 태국사로 단군 영정을 이안(移安)한 것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발상(發想)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신뢰성이 결여되고 또한 객관성이 없다.
하느님으로까지 숭앙하는 국조(國祖)인 단군 영정을 일개 사찰에 봉안하고 중국 사신의 수로(水路)의 안전을 기원해야 하는 그러한 절박한 사태였든가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명(明)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받들었다고 하더라도, 국조 영정을 이안(移安)하면서까지 중국의 사신을 송영(送迎)해야 하는 그러한 비굴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으로 경제적 사대(事大)는 하였는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사대는 하지 않았었다. 당대의 위정자(爲政者)들이 그렇게 민족 의식이 메말라 있었고, 또한 굴종(屈從)의 늪에 매몰(埋沒)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의 사신(使臣)들을 맞이하고 보냄에 있어 그들의 무사함을 빌기 위해 국조의 영정을 안치하고 기원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다.
그렇다면 왜 무슨 목적으로 멀리 의성에서까지 이곳 태안으로 국조의 영정을 이안(移安)해 왔는가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성에서 태안으로 옮겨오기 전인 1479년 이전의 태안반도의 역사적 실상을 살펴보는 것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태안반도는 일찍부터 왜구(倭寇)가 출몰하여 그들이 계속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서슴없이 자행해 왔음으로 주민들이 수모와 고통을 받으며 살아온 곳이다.
왜구(倭寇)가 이곳 태안반도에 침입하는 것이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1년(1352)부터이다. 이렇게 침입하기 시작한 왜구는 계속하여 조선조(朝鮮朝)의 초기에까지 이어졌다.
특히 1373년(공민왕 22)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태안군이 폐군(廢郡)을 해야 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후 1416년의 봄철 조선조(朝鮮朝)의 태종(太宗)께서 수렵차 이곳에 임행(臨幸)하셨다가 폐허화 된 이 지역의 실상을 살펴보시고 즉시 복군(復郡)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뒤 왕명에 따라 복군됨으로서 다시는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폐군의 참상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국조신(國祖神)의 가호(加護)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성의 태일전에 안치되었던 국조 영정을 이곳 태안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같이 국조 영정을 안치 함으로서 이 지역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왜구의 침입을 방비코자 한 것이지 중국 사신의 안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역설하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