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390여년 전인 1594년의 일이다. 「세스페더스」신부(神父)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들어옴으로서 시작되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세(領洗)를 받은 분은 서기 1784년의 이승훈(李承薰)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승훈이 영세를 받은 것은 국내(國內)에서가 아니라 그가 동지사(冬至使) 일행으로 중국(中國)에 갔을 때 북경(北京)에서 그라몽(Grammont)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영세명으로 「베드로」란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그 해 3월에 귀국한 이승훈은 서울 명동(明洞)에 있는 김범우(金範禹)의 집을 천주당(天主堂)으로 삼아 본격적인 종교 활동을 펴니,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천주교 활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천주교가 근 백여 년 간 모진 박해와 수난을 받으면서 많은 순교자(殉敎者)를 발생 시켰으나, 결국은 1882년 미국과의 수호조약(修好條約) 체결을 계기로 천주교 활동이 자유롭게 전개되어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해방된 1945년에는 서울·대구·전주·광주·춘천·평양·함흥·연길 등의 8개 교구에 7명의 주교, 교구장 2명을 비롯하여 신부는 132명이 한국인, 54명의 독일인, 38명의 프랑스인, 10명의 아일랜드인 그리고 160개의 성당에 신자는 무려 18만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렇게 나날이 교세가 확장되어 마침내 1962년에는 노기남·서정길 주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대주교로 승품(昇品)되었으며, 또한 그 후 1969년에는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한국 최초의 추기경(樞機卿)에 임명됨으로서 우리나라 천주교가 마침내 국제적인 종교상의 권위(權威)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천주교중앙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1989년 12월 말일 현재 신자 수가 무려 2,613,00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사제(司祭) 수는 한국인 1,401명에 외국인이 225명으로 사제 1인당 신자 수가 1,607명으로 되어 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많은 박해와 수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이 천주교가 어느 때 태안 지역에 들어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조(朝鮮朝)의 정조(正祖) 15년(1791) 10월 사헌부 계언(司憲府啓言)에 의하면 「서산의 양반들이 천주학(天主學)을 전수(專修)하여 윤리에 배반되는 언행이 많으니 읍졸(邑卒)로 하여금 이를 엄중히 다스리어 서학(西學)의 뿌리를 뽑게하라」는 기록으로 볼 때, 서산 지역에는 이미 1791년 이전에 서학이 전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활동에 앞서 우선 학문으로서의 서학을 연구하려는 일부선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1839년의 기해사옥(己亥邪獄)의 천주교도(天主敎徒) 학살 사건에 이어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원군(大院君)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신자(信者)들은 각 지방으로 은밀히 숨어들어 전교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 무렵 서산의 해미(海美)와 팔봉(八峰) 그리고 태안 지역의 안면도 등지에 신자들이 숨어서 비밀리에 전교 하였으니, 이때 비로소 태안 지역에도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후 1866년에 병인사옥(丙寅邪獄)이 일어나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형을 단행할 때, 해미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피살(被殺)되었으니, 지금의 해미면 조산리에 세워진 순교탑(殉敎塔)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해미의 천주교도 피살 사건 때 일부 신자들이 배를 타고 안면도 고남면의 누동리(다락골)로 피신하였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박해 시대에 군란을 피해 한집 두집 모여 들어와 신자끼리도 서로 모르고 옹기도 굽도 생활하면서 지내다가 공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초대 회장인지 그 전에 회장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장봉규(요한)회장이었다.
이 내용으로 보아 해미 박해 사건 이전인 1860년경에 이미 안면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태안 지역에 천주교가 최초로 전래된 곳은 안면도의 누동리인데, 이 누동리에서 그 후 태안읍으로 전파되었는지 아니면 서산에서 태안으로 들어왔는지 이는 분명치 않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태안에는 이미 공소가 설치 되어 있었다.
그 후 1964년 8월 4일 태안공소에서 태안본당으로 승격하였는데, 당시의 신자 수는 540명으로 이 중 300여명은 누동공소의 신자였다.
동년 8월 14일 태안본당 초대 신부로 콜롬비아인 「야고비」가 취임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9대째 신부가 부임하여 왔는데, 현재는 지난 1989년 2월 24일에 부임한 서동진(벨라도)신부이다. 태안 천주교는 그 동안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태안본당 관할에 13개 구역과 11개 공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신자 수는 오늘 현재(1990.6.29) 1,694명에 이르고 있다. 각 구역 및 공소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구역 및 공소 | 주소 | 회장 | 신자수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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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1구역 | 태안읍 동문리 1구 샘골 | 이경복(빈첸시오) | 57명 | |
동문2〃 | 〃 동문리 2구 | 이선자(베로니카) | 88 | |
동문3〃 | 〃 〃 3구 | 최성준(안토니오) | 79 | |
동문4 | 〃 〃 4구 | 최기선(아가다) | 106 | |
동문5〃 | 〃 〃 5구 | 김상환(안드레아) | 63 | |
동문6〃 | 〃 〃 1구 | 이상철(시몬) | 91 | |
남문1〃 | 〃 남문리 2구 328 | 김우일(필립보) | 78 | |
남문2〃 | 〃 〃 2구 | 김봉순(안나) | 129 | |
남문3〃 | 〃 〃 1구·3구 | 이옥향(헬레나) | 105 | |
장산구역 | 태안읍 장신리 1구 303 | 김홍범(요한) | 32 | |
삭선구역 | 태안읍 삭선리 1구 523 | 이문규(아오스딩) | 103 | |
남산1구역 | 태안읍 남산리 1구 | 이경자(안나) | 31 | |
남산2구역 | 태안읍 남산리 2구 | 김윤수(하상바로우) | 60 | |
평천공소 | 태안읍 상옥리 1구 598 | 김용돈(베드로) | 44 | 평천·인평 |
이원공소 | 이원면 당산리 3구 115 | 조순열(안나) | 24 | 상옥합침 |
원북공소 | 원북면 신두리 2구 140 | 윤학병(요한) | 50 | |
소원공소 | 소원면 신덕리 2구 677 | 김정숙(데레사) | 57 | |
근흥공소 | 근흥면 정죽리 | 이해선(시몬) | 54 | |
남면공소 | 남면 신장리 | 김석구(시몬) | 64 | |
창기공소 | 안면읍 창기리 2구 | 방동규(바오로) | 33 | |
안면공소 | 안면읍 정당리 1구 94 | 김동후(도마) | 49 | |
누동공소 | 고남면 누동리 2구 453 | 신길수(마지아) | 222 | |
가사공소 |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 3구 1031 | 김건석(라우렌시오) | 9 | |
송시공소 | 서산군 부석면 송시리 2구 188 | 김진오(오질론) | 66 |
※시목계획서 1990, 천주교 대전교구 태안교회에 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