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란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열국(列國)의 하나였던 노(魯)나라에서 공자(孔子)가 주창(主唱)한 유학을 받드는 교(敎)를 일컬음인데, 이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경전(經典)으로 삼고 있다. 유학사상(儒學思想)은 천명(天命)을 근본으로 하여, 인(仁)에 의해서 일관된 인도(人道)를 도(道)로 하고, 또한 이 도를 실제로 행하는 덕(德)을 존중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상설(詳說)한 것으로, 이는 중국(中國)·우리나라·일본(日本)등을 비롯한 동양 전역(東洋全域)에 걸쳐서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자(孔子)의 뒤에 아성(亞聖)이라 불리우는 맹자(孟子)와 순자(筍子) 등이 출현(出現)하여 성론(性論)을 부르짖고, 다시 한당(漢唐)시대에 들어와서는 학자들이 훈고학(訓고學)에만 몰두(沒頭)하였으나, 마침내 송대(宋代)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는 경서(經書)의 주석(註釋)에만 있던 훈고학(訓誥學)을 배척하고, 보다 심오(深奧)한 철학적 고찰(考察)을 통하여, 우주(宇宙)와 인성(人性)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북송(北宋)의 주돈이(周敦餌)를 위시하여 많은 거유(巨儒)가 뒤를 이었다. 특히 성리학은 주자(朱子)에 이르러 집대성(集大成)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고려 말엽(高麗末葉)인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꽃을 피웠다. 중국에서 미완(未完)된 부분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이황(李滉)에 의해 완성을 보았으니, 이황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거유(巨儒)였다.
오늘날에도 일본(日本)·중국(中國)·미국(美國) 심지어 소련(蘇聯)에서도 이퇴계(李退溪)를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니, 이는 그의 학문적 가치가 지고(至高)함을 단적(端的)으로 입증(立證)하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교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 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조에 보면「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立太學敎育子弟)라는 기사가 보인다.
태학이란 오늘의 국립대학(國立大學)과 같은 교육 기관인데, 지금까지 고찰된 바에 따르면 문헌상(文獻上)에 나타난 기록으론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의 창건(創建)이 최고(最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372년이면 유학이 발생한지 이미 10세기가 흘렀는데, 그동안 유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정식의 교육시설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그리고 우리측의 사료(史料)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으나, 일본(日本)측의 사료(日本史料)에 따르면 백제(百濟)의 오경박사(五經博士)가 도일(渡日)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분명히 백제(百濟)에도 유학의 교육시설이 설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 본기(新羅本紀) 신문왕(神文王) 2년(682)조에 의하면, 「6월에 국학(國學)을 세우고, 경(卿) 한 사람을 배치했다…」(六月立國學置鄕)一人…)는 기록이 보인다.
국학이란 고구려의 태학과 같이 오늘의 국립대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실은 어떤 내용을 교수(敎授)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경(卿)이란 오늘의 스승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三國時代)는 불교(佛敎)가 성해서, 오히려 유교(儒敎)는 발전을 보지 못한 체 그대로 고려국(高麗國)으로 명맥만 이어져 내려온 셈이 되었다. 고려에서도 불교가 매우 왕성하게 떨치고 있었음으로 국학(國學)과 문묘(文廟)는 설치되어 있었으나, 역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매우 부진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고려말기(高麗末期)에 이르러 중흥(中興)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즉 주자학(朱子學)의 수입과 더불어 새로운 유학(儒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성리학(性理學)의 태두(泰斗)라 일컫는 정몽주(鄭夢周)도 바로 이때의 인물이었다.
그 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국(朝鮮國)의 건국(建國)과 더불어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채택하여, 이른바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을 펴니 유교는 매우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조 시대에 이르러 비약적인 유교의 발전을 보게 되었으니, 바로 이때 대학자인 이퇴계가 출현했던 것이다.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조는 건국 초부터 문화 정책을 펴기 위해 전국의, 부·목·군·현((府牧郡縣)의 소재지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인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을 실시케 하였으니, 이때 우리 태안에도 향교가 건립되는 것이다. 이 태안향교(泰安鄕校)는 인근의 서산향교 보다 1년 뒤인 태종(太宗) 7년(1407)에 창건(創建)되어 그동안 여러 차례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과 건물의 규모 등에 대하여는「제3편 고적과 유물」조의 제1절 지정 문화재 란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