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지적했듯이 1945년 8월 15일의 조국 광복과 더불어 즉시 자주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없었으니, 여기에는 많은 어려운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즉 대외적으로는 미소(美蘇)의 신탁통치(信託統治)요, 대내적으론 사상적 대립으로 인해 국론 통일을 보지 못한채 해를 거듭하던 중 마침내 1947년 9월 17일 U·N 총회에서 미국 대표에 의해 「U·N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그 국회에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U·N 임시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다.」는 제안을 하였는데, 이를 그 해 11월 14일 U·N에서 43대 0으로 가결하였다.
이같은 결의에 따라 U·N은 한국에 동위원단을 파견하였으나, 북한에 점령한 소련군의 방해로 인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그 결과를 U·N 소총회(小總會)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를 접수한 U·N 소총회는 1945년 2월 6일 「가능한 지역내의 선거 실시에 관한 권한」을 U·N 한국위원단에게 부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위원(南朝鮮過渡政府立法委員)은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하여 이를 1945년 3월 17일 미군정법령(美軍政法令) 제175호로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동년 5월 10일 드디어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선거가 남한(南韓)지역에서만 실시되었다.
따라서 우리 태안 지역에서도 선거가 실시 되었는데, 이때는 태안이 서산군의 관할하에 편입되어 있었다.
서산군의 선거구가 갑·을구로 분리되어 각구에서 1명씩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태안은 을구에 속해 있었다.
을구는 태안, 인지, 부석, 팔봉, 남면, 안면, 근흥, 소원, 원북, 이북면 등 10개 면이었다.
을구에서 6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하였는데, 정당 조직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한 시기였으므로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며, 따라서 선거 운동도 조직적이 되지 못하였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처음으로 실시되는 자유선거이며, 또한 자주 독립 국가의 수립이라는 점에서 유권자들은 금력이나 혈연을 초월하여, 인물 위주의 애국지사를 선출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동향이었다.
이같이 유권자들은 항일투쟁(抗日鬪爭)과 독립 운동을 하였거나 또는 농민과 서민 대중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열변을 토하는 입후보자를 선호하였다.
유권자들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선거 운동의 과정을 지켜보고, 마침내 역사적인5.10선거를 끝내니 그 결과 을구에서는 김동준(金東準)씨가 16,260표를 얻어 당선이 되었는데 후보자별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1948. 5. 10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서산을 구 | 이종철 (李種喆) |
무소속 | 입법의원 | 중 졸 | 서산읍 읍내리 | 49 | 9,767 | 실 격 당 선 |
김기인 (金起寅) |
〃 | 농 업 | 대 졸 | 해미면 읍내리 | 47 | 1,812 | ||
박동래 (朴東來) |
〃 | 〃 | 전문대졸 | 안면읍 읍내리 | 47 | |||
김동준 (金東準) |
〃 | 〃 | 대 졸 | 태안면 어은리 | 44 | 16,260 | ||
이상기 (李相麒) |
〃 | 회 사 원 | 〃 | 태안면 동문리 | 45 | 3,483 | ||
김제능 (金濟能) |
대 동 청년회 |
농 업 | 〃 | 서산읍 읍내리 | 38 | 6,62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실태를 살펴보면, 앞서 실시한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대부분의 입후보자들이 어느정도 선거 기반을 닦은 뒤에 출마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특히 안만복(安萬福) 입후보자는 대중속에 깊이 파고들어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격려하였으므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와는 달리 1명 선출에 무려 10명이 입후보하는 일대 난입 상태를 이루었다.
1950년 5월 30일 드디어 예정한대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고 동년 6월 19일 국회를 개원했으나, 불행하게도 1주일 뒤 6월 25일에 북한 공산군의 불법남침(不法南侵)으로 인하여 국회는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당시의 입후보자의 득표 현황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50. 5. 30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서산을 구 | 이상기 (李相麒) |
무소속 | 회 사 원 | 대 졸 | 태안면 동문리 | 46 | ||
김동준 (金東準) |
〃 | 국회의원 | 〃 | 태안읍 어은리 | 45 | |||
장동국 (張東國) |
〃 | 무 직 | 국 졸 | 소원면 신덕리 | 45 | |||
홍일섭 (洪日燮) |
〃 | 〃 | 〃 | 태안군 장항읍 | 45 | |||
신항균 (申恒均) |
한독당 | 문 방 업 | 〃 | 서산읍 읍내리 | 45 | |||
안만복 (安萬福) |
무소속 | 농 업 | 〃 | 인지면 둔당리 | 40 | 7,685 | 당 선 | |
이경진 (李暻鎭) |
〃 | 〃 | 〃 | 부석면 가사리 | 40 | |||
안덕순 (安德淳) |
한 청 | 의 사 | 한 학 | 원북면 반계리 | 37 | |||
유병하 (柳炳夏) |
무소속 | 농 업 | 국 졸 | 인지면 예당리 | 31 | |||
이상희 (李相禧) |
〃 | 회 사 원 | 대 졸 | 태안면 동문리 | 28 |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되었는데, 을구에서 입후자로 등록된 사람이 무려 11명으로서 지난 제2대 때 보다 오히려 한명이 증가 된 난입상을 면치 못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지난 1·2대 선거와는 달리 약간 소란한 편이었으나 을구에서 출마한 유순식(柳順植)씨가 압도적인 특표로 당선되었다.
각 입후보자의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1954. 5. 20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서산을구 | 양두희 (梁斗熙) |
무소속 | 무 직 | 중 졸 | 군산시 개복동 | 63 | 2,050 | |
김동준 (金洞準) |
민국당 | 농 업 | 대 졸 | 태안면 어은리 | 48 | 3,756 | ||
이경진 (李暻鎭) |
무소속 | 언 론 인 | 대학중퇴 | 부속면 가사리 | 44 | 4,532 | ||
안만복 (安萬福) |
민국당 | 국회의원 | 국 졸 | 인지면 둔당리 | 44 | 3,561 | ||
안덕순 (安德淳) |
무소속 | 의 사 | 〃 | 원북면 반계리 | 41 | 2,084 | ||
유순식 (柳順植) |
자유당 | 농 업 | 중 졸 | 서선읍 읍내리 | 41 | 7,854 | 당 선 | |
채상근 (蔡相根) |
무소속 | 〃 | 국 졸 | 안면면 승언리 | 36 | 3,741 | ||
문제중 (文濟中) |
〃 | 〃 | 대 졸 | 남 면 몽산리 | 34 | 3,280 | ||
박완교 (朴完敎) |
〃 | 〃 | 〃 | 서울용상구한강로 | 30 | 2,620 | ||
이원우 (李元雨) |
〃 | 〃 | 〃 | 안면면 고남리 | 30 | 1,828 | ||
편중범 (片仲範) |
〃 | 회 사 원 | 중 졸 | 안면면 승언리 | 29 | 3,115 |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전대(前代)에 비해 입후보자 수가 절반 이하로 줄은 것이다.
이같은 입후보자가 3분의 1호 줄은 것은 기탁금(寄託金) 제도가 생긴데서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입후보자의 수는 적었지만 선거전은 매우 치열 했었다. 을구에서는 유순식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는데, 각 입후보자의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1958. 5. 2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서산 을구 |
안만복 (安萬福) |
민주당 | 농 업 | 국 졸 | 인지면 둔당리 | 48 | 13,047 | |
유순식 (柳順植) |
자유당 | 민의원의원 | 대 졸 | 태안면 남문리 | 45 | 20,775 | 당 선 | |
장봉진 (張鳳鎭) |
무소속 | 회 사 원 | 무 학 | 서울종로구 신교동 | 45 | 2,171 | ||
박완교 (朴完敎) |
〃 | 〃 | 대 졸 | 서울종로구 한강로 | 34 | 7,2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되었는데, 제3대때와 같이 무려 11명이 대거 출마하는 난입 상태였다.
이 때는 4. 19 학생의거(學生義擧)로 인하여 자유당(自由黨)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야당이던 민주당(民主黨)이 활기를 찾기 시작 했다.
본군에서도 4.19 이전의 야당계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미 입후보 등록을 마친 유순식(柳順植)씨는 선거구에 내려오지도 않은채 사퇴하고 말았다.
4.19후의 선거였으므로 민주당이 우세하였다. 이때 민주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한 안만복싸가 선두를 달리며 우세를 떨치고 있었다.
선거 운동은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서 진행되었다고는 하나 일부의 출마자들이 음식물 제공과 더불어 금전 거래를 하는 등 불미한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투표결과 안반복 후보자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 되었는데, 각 후보자별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60. 7. 29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서산 을구 | 이경진 (李暻鎭) |
무소속 | 농 업 | 대학중퇴 | 부석면 가사리 | 50 | 8,549 | |
안만복 (安萬福) |
민주당 | 〃 | 국 졸 | 안지면 둔당리 | 50 | 10,924 | 당 선 | |
문원모 (文元模) |
무소속 | 〃 | 〃 | 남 면 몽산리 | 50 | 3,313 | ||
유제풍 (柳濟豊) |
〃 | 〃 | 〃 | 부석면 가사리 | 50 | 2,051 | ||
유순식 (柳順植) |
〃 | 민 의 원 | 대 졸 | 태안면 동문리 | 48 | 7월26일 | 사 퇴 | |
장봉진 (張鳳鎭) |
〃 | 광 업 | 국 졸 | 서울종로구신교동 | 47 | 5,061 | ||
채상근 (蔡相根) |
〃 | 농 업 | 〃 | 안면면 승언리 | 42 | 4,885 | ||
김동렬 (金東烈) |
〃 | 〃 | 중 졸 | 태안면 동문리 | 41 | 2,291 | ||
김영수 (金永洙) |
〃 | 대학강사 | 대 졸 | 소원면 시목리 | 34 | 3,414 | ||
정동훈 (鄭東勳) |
〃 | 언 론 인 | 〃 | 안면면 창기리 | 29 | 3,878 | ||
한영수 (韓英洙) |
〃 | 무 직 | 〃 | 소원면 영전리 | 25 | 3,205 |
국회의원 선거법이 개정됨에 따라 종래의 갑.을구로 분리하여 실시해 오던 선거를 제6대 국회의원부터는 충남제9지역 선거구로 단일화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선거는 1963년 11월 23일 실시되었는데, 8명이 입후보하였다. 입후보자 8명이 모두 정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것이 특징인데, 여당인 공화당은 조직력과 행정력의 지원을 받아 우세를 떨치고 있었다.
또한 공화당은 지방사업에 대한 선심적(善心的)인 공약(公約)을 함으로써 유권자들로부터 많은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따라 야당에서는 공화당을 규탄하면서 아울러 한편으로는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야당 후보자를 많이 선출하여 다수 의삭을 차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중앙에서는 야당측 입후보자를 돕기 위해 이범석(李範奭)등 많은 인사들이 서산에 내려 왔었다.
그런데 정당법의 절차에 따라 지구당으로 등록된 것은 공화당을 비롯하여 민정당과 국민의당 뿐이었다.
드디어 11월 23일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공화당의 공천으로 출마한 이상희(李相禧)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다.
출마한 8명의 득표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1963. 11. 23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9지역선거구 | 이경진 (李暻鎭) |
한농당 | 농 업 | 대학중퇴 | 부석면 가사리 | 54 | 7,316 | |
이상희 (李相禧) |
공화당 | 〃 | 대 졸 | 태안읍 동문리 | 40 | 18,924 | 당 선 | |
이풍우 (李豊雨) |
민주당 | 상업 | 대 졸 | 서산읍 양대리 | 38 | 5,074 | ||
장경순 (張慶淳) |
" | 농업 | " | 대산면 기은리 | 37 | 12,368 | ||
김영수 (金永洙) |
국민의당 | " | " | 소원면 시목리 | 37 | 9,265 | ||
조제현 (趙濟顯) |
보수당 | " | " | 서산읍 동문리 | 30 | 8,832 | ||
이두연(李斗淵) | 자유당 | " | " | 소원면 신덕리 | 29 | 2,412 | ||
한영수 (韓英洙) |
민정당 | " | " | 소원면 영전리 | 28 | 13,491 |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1967년 6월 8일에 실시 되었는데, 이 때의 출마자는 6명으로 지금까지의 선거 중 제일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입후보자는 적었지만 선거전은 매우 치열한 열전이 전개 되었다.
특히 이상희(李相禧)는 공화당, 한영수(韓英洙)는 신민당(新民黨)의 공천을 맡고 출마 하였는데, 그 동안의 업적을 발판으로 토착 세력 속에 깊숙히 파묻혀 있던 나창헌(羅昌憲) 후보자와의 3파전 양상이 짙게 나타나고 있었다.
공화당은 그간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국가 발전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공개 하면서, 지방 사업에 대한 공약을 제시 함으로서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신민당은 대중 경제와 이중 곡가제(二重穀價制)를 주장 하면서 정부가 중농 정책에 실패 했다고 힐난하게 비난하는 가 하면, 통일사회당의 정동훈(鄭東勳) 후보는 진보적인 자신의 정당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같이 선거전은 매우 고조되어 가고 있었는데, 중앙에서 공화당 의장인 김종필(金種泌)씨가 서산의 양유정에 내려와 찬조 연설을 하였는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투표 결과 이상희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는데, 각 입후보자의 득표현황을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1967. 6. 8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정당명 | 직 업 | 학 력 | 주 소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9지역선거구 | 나창헌 (羅昌憲) |
자유당 | 농 업 | 중 졸 | 서산읍 동문리 | 67 | 6,835 | |
이경진 (李暻鎭) |
민주당 | 〃 | 대학중퇴 | 태안읍 남문리 | 57 | 1,609 | ||
이상희 (李相禧) |
공화당 | 국회의원 | 대 졸 | 태안읍 동문리 | 44 | 57,559 | 당 선 | |
정헌제 (鄭憲濟) |
대중당 | 무 직 | 대 졸 | 서산읍 온석리 | 41 | 2,879 | ||
정동훈 (鄭東勳) |
통사당 | 농 업 | 〃 | 안면면 창기리 | 36 | 1,930 | ||
한영수 (韓永洙) |
신민당 | 〃 | 〃 | 소원면 창기리 | 33 | 24,053 | 차 점 |
제8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1년 5월 25일에 실시 되었는데, 이는 1969년 1월 23일 법률제2088호로 개정 공포된, 이른바 보장 입법(保章立法)에 의한 선거법 개정과, 1970년 12월 22일 법률제2241호 개정 공포된 소위 협상 선거법(協商選擧法) 등 두차례의 개정을 거쳐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 하였다.
제8대 선거에서는 모두 6명이 출마 하였는데, 지난 7대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한영수(韓英洙) 후보자와 공화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한 박승규(朴乘圭)가 우세 하였다.
이같이 양 후보자가 우세하였는데, 선거가 종반전으로 접어들면서 명화섭(明華燮) 후보가 가세 하면서 선거전은 3파전으로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투표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실시 되었는데, 개표 결과 박승규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의 영광을 차지 했다.
이때 각 후보자의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읍의 도표와 같다.
(1971. 5. 25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직 업 | 연령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11지역선거구 | 박승규 (朴乘圭) |
서산읍 동문리 | 공화당 | 대 졸 | 사 장 | 48 | 42,150 | 당 선 |
명화섭 (明華燮) |
해미면 반양리 | 신민당 | 국 졸 | 농 업 | 48 | 13,606 | ||
한영수 (韓英洙) |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 국민당 | 대 졸 | 정당인 | 36 | 30,585 | 차 점 | |
정헌제 (鄭憲濟) |
서산읍 동문리 | 대중당 | 〃 | 농 업 | 44 | 1,823 | ||
이원근 (李元根) |
서산읍 읍내리 | 통사당 | 〃 | 〃 | 36 | 949 | ||
정재복 (情在福) |
남 면 진산리 | 민중당 | 국 졸 | 〃 | 25 | 758 |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3년 2월 27일에 실시 되었는데, 이는 1972년 12월 30일에 공포된 새국회의원 선거법과 동법 시행령 및 정당법 개정안에 의한 것이었다.
개정된 새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르면
첫째, 선거구제를 1선거구에 2명씩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하여 국회의원 정수는 선거구 선출 146명과,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 선출 73명 모두 219명으로 하였으며,
둘째, 선거 운동은 철저한 공영제로 하였고,
셋째, 선거 기간은 종래의 20일에서 18일로 단축하고,
넷째, 무소속 입후보자를 허용하는 등으로 바뀌어졌다.
이에 따라 종래의 서산군에 당진군을 합한 충남제7선거구로 개정되었는데, 출마자는 오히려 줄어서 모두 5명이 등록을 하였다.
이때의 선거전은 서산지역에서 출마한 박완교·한영수와, 당진 지역에서 출마한 유제연 후보자가 당선되었다.
특히 한영수 후보는 4전5기(四轉五起)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는데, 그동안 낙선의 설욕(雪辱)이라도 한양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다.
각 후보자의 특표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73. 2. 27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7지역선거구 | 박완교 (朴完敎) |
소원면 신덕리 | 공화당 | 대 졸 | ||
유제연 (柳濟淵) |
당진군 신평리 | 신민당 | 〃 | 당 선 | ||
박희정 (朴熙政) |
서울 용산구 효창동 | 통일당 | 〃 | |||
차의영 (車儀榮) |
당진군 당진읍 | 무소속 | 〃 | |||
한영수 (韓英洙) |
소원면 영전리 | 〃 | 〃 | 당 선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되었는데, 20일간의 협상 끝에 타결된 국회의원 선거법 중 개정 법률안을 1977년 12월 17일 국회에서 의결하여 동년 12월 31일 법률 제3093호로 공포하였다.
이같이 개정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제7선거구인 서산·당진 지역에서 6명이 출마했는데, 공교롭게도 서산·당진에서 각각 3명씩 입후보 하였다.
입후보자 6명 중 3명이 정당의 공천을 받았고 그 외는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는데, 심현직·한영수·유제연·이명휘의 4파전으로 선거전은 고조되어 갔다.
이같이 치열한 선거전 속에서 투표결과 공화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한 심현직 후보자와, 신민당의 공천으로 출마한 한영수 의원이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다.
(1978. 12. 12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7지역선거구 | 심현직 (沈絃稷) |
서산읍 동문리 | 공화당 | 대 졸 | 54,699 | 당 선 |
유제연 (柳濟淵) |
당진군 신평면 | 신민당 | 〃 | 26,799 | ||
한영수 (韓英洙) |
소원면 영전리 | 〃 | 〃 | 40,874 | 당 선 | |
김현욱 (金顯煜) |
당진군 당진읍 | 무소속 | 〃 | 15,217 | ||
박완교 (朴完敎) |
소원면 신덕리 | 〃 | 〃 | 17,655 | ||
이명휘 (李明徽) |
당진군 당진읍 | 〃 | 〃 | 23,764 |
제11대 국회의원 서거는 1981년 3월 25일에 실시되었는데, 출마자는 모두 5명이었다.
이 5명의 입후보자 중 4명이 서산지역 출신이고 당진 지역에선 한 명의 후보자뿐이었는데, 선거전은 민주정의당의 공천으로 출마한 김현욱과 2선 의원의 관록을 지닌 한영수 후보자와의 2파전이었다.
마침내 3월 25일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를 마치고 개표한 결과 한영수·김현욱 후보자가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로써 지난날 소외시 되었던 당진 지역에서 김현욱 후보자가 당선됨으로써 지역의 균형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각 후보자의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1981. 3. 25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7지역선거구 | 박승규 (朴承圭) |
서울 성동구 광장동 | 한국국민당 | 대 졸 | 15,078 | |
박태권 (朴泰權) |
서울 구로구 개봉동 | 원일민립당 | 〃 | 11,359 | ||
김현욱 (金顯煜) |
당진군 당진읍 | 민주정의당 | 〃 | 69,967 | 당 선 | |
한영수 (韓英洙) |
서울 강서구 신월동 | 민주한국당 | 〃 | 51,376 | 당 선 | |
장기욱 (張基旭) |
서산읍 읍내리 | 무 소 속 | 〃 | 31,408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5년 2월 12일에 실시하였는데, 1984년 7월 25일 법률 제3732호에 따라 선거관리위원회법이 개정됨으로써, 서울특별시·직할시·도선거관리위원회의 의원 9인 중 3인은 국회의 교섭 단체를 가진 정당이 각 1인씩 제청하는 위원을 위촉하며,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 위원 9인 중 3인과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 위원 7인 중 3인을 각각 국회의 교섭 단체를 가진 제1·제2·제3당이 1인씩 추천하는 위원을 위촉하였다.
각급 선거관리위원회 일반 위원은 법관을 최우선 순위로 하고 재야 법조인 교육자 및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던 덕망 인사 등으로 위촉하게 되었다.
또한 서산·당진 지역이 종래의 제7선거구에서 제8선거구로 개정되었으며, 이때의 출마자는 당진 지역에서 1인, 서산 지역에서 3인으로 모두 4인이었는데 초선의원인 김현욱과 장기욱 후보자가 우세하였다.
마침내 2월 12일 조용한 가운데 투표를 마치고 개표 결과 김현욱·장기욱 후보자가 당선되었다.
후보자별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1985. 2. 12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득표수 | 비 고 |
---|---|---|---|---|---|---|
충남 제8지역선거구 | 김현욱 (金顯煜) |
당진군 당진읍 | 민주정의당 | 대 졸 | 83,576 | 당 선 |
김영수 (金英洙) |
소원면 시목리 | 한국국민당 | 〃 | 22,596 | ||
박태권 (朴泰權) |
서산읍 읍내리 | 신한민주당 | 〃 | 35,647 | ||
장기욱 (張基旭) |
서산읍 읍내리 | 민주한국당 | 〃 | 46,841 | 당 선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8년 4월 26일에 실시되었다.
1988년 3월 17일 법률 제 4003호에 의해 국회의원 선거법에 개정됨에 따라, 종래의 중선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선거관리위원회법 시행규칙(1988. 3. 17 중선관규칙 제65호)을 개정함으로써 구·시·군 선거관리위원회가 284개로 증설되어 그 중 224개는 지역 선거구 선거사무를 담당하는 지역구선거관리위원회로 지정하고, 선거구가 아닌 구·시·군 선거관리위원회는 60개로 조정되었다.
이같이 종래의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개정됨에 따라 서산군만으로 선거구가 되었는데, 출마자는 12대 때 보다 2명이 증가된 6명이었다. 는데, 선거전은 유근환·박태권 후보자와의 근소한 차이로 박태권 후보자가 당선되었다.
후보자별 득표현황을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1988. 4. 26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득표수 | 비 고 |
---|---|---|---|---|---|---|
서 산 군 | 유근환 (柳根桓) |
서산읍 석남리 | 민주정의당 | 대 졸 | 35,148 | 차 점 |
박태권 (朴泰權) |
서산읍 동문리 | 통일민주당 | 〃 | 36,311 | 당 선 | |
장경순 (張慶淳)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 평화민주당 | 〃 | 2,732 | ||
박성호 (朴性浩) |
서산읍 읍내리 | 신문주공화당 | 〃 | 28,189 | ||
서희종 (徐喜鍾) |
서산읍 동문리 | 신한민주당 | 〃 | 997 | ||
유영래 (柳榮來) |
태안읍 인평리 | 무 소 속 | 〃 | 3,097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92년 3월 24일에 실시되었다.
국회의원 선거법의 개정과 선거관리 위원회법 시행규칙의 개정으로 인해 지난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보다 1개 직할시의 증설로 15개 시·도 위원호가 되었으며, 지역구는 13개 구가 늘어난 237개로 구·시·군 위원회는 308개 위원회가 되었다.
또한 인구 증가 및 행정구역 개편 등으로 조정된 투표구 수는 지난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보다 1,375구가 증가한 15,187구가되었다.
그리고 태안군이 복군(復郡)된 후 처음으로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이지만 선거구가 분리되지 않아 서산시·서산군·태안군이 단일 선거구로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5명이 출마했는데 그 중 3명은 정당의 공천을 받았고 2명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
선거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부터 더욱 치열해 졌는데, 특히 유세장에서 서로 비방하는 인신 공격까지 나올 정도의 과열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결국 초선의원인 민자당 공천의 박태권 호보자와 3선 의원의 관록을 과시하는 민주당 공천의 한영수 후보자와의 2파전이었다.
드디어 3월 24일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불과 1,357표 차로 박태권 후보자를 따돌리고 한영수 후보자가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각 후보자의 득표 현황을 보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1992. 3. 24시행)
선거구명 | 후보자 성명 | 주 소 | 정 당 | 학 력 | 득표수 | 비 고 |
---|---|---|---|---|---|---|
서산시·서산군 | 박태권 (朴泰權) |
서산시 동문동 | 민 자 당 | 대 졸 | 35,586 | |
한영수 (韓英洙) |
소원면 영전리 | 민 주 당 | 〃 | 36,943 | 당 선 | |
박성호 (朴性浩) |
서산시 읍내동 | 국 민 당 | 〃 | 15,559 | ||
문석호 (文錫豪) |
서산시 동문동 | 무 소 속 | 〃 | 10,822 | ||
장기옥 (張基玉) |
서산시 동문동 | 〃 | 〃 | 7,1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