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강점기(日本强占期)의 36년간은 우리 역사의 암흑기였다.
유구한 우리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그 흐름의 수레바퀴를 그대로 전진시켰다면 오늘의 우리 위상은 선진국 대열에 끼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그들이 비인간적인 야심을 채우려고 우리 민족사의 발전의 축을 멈추게 하고 일본이 시도하는 방향으로 강제 유인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침체기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농업 발전을 꾀한다는 미명하에 농민의 토지를 수탈하여 결국 우리 농민들은 80%에 이르는 소작농으로 전락되었고, 또 미곡 증산을 독려하여 생산량의 53.3%를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1933년 1,630만석 생산에 870만석을 일본에 반출).
그런가하면 공업발전의 미명하에 한국공업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 되었고, 따라서 일본 재벌의 침투로 인해 우리 민족의 재벌은 5%에 지나지 않았었다.
또한 일본은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악랄한 흉계로 우리말 사용을 금지시키는가 하면, 우리 신문사를 폐간시키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어 우리민족을 일본화 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 강점하에서 우리 태안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는데, 당시의 태안군의 실태를 살펴보면 14개 면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우선 부내면(府內面)·남면(南面)·근서면(近西面)·원일도면(遠一道面)·원이도면(遠二道面)·북일도면(北一道面)·북이도면(北二道面)·동일도면(東一道面)·동이도면(東二道面)·소근면(所斤面)·안흥면(安興面)·이원면(梨園面)·안상면(安上面)·안하면(安下面)등 14개 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통폐합하여 반으로 축소시켰다.
그 내용은 태안면·안면면·남면·근흥면·소원면·원북면·이북면 등 7개 면으로 줄었지만 관할 구역은 배로 증가된 셈이다.
아울러 각 면에는 면장·회계원·그리고 서기 4명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단 태안면만 서기 1명이 많은 5명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1924년 말일 현재, 태안군내 각 면의 인구 실태를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면 | 가구 | 인구 | 가구 | 일본인 | 가구 | 외국인 | ||||||
---|---|---|---|---|---|---|---|---|---|---|---|---|
남자 | 여자 | 합계 | 남자 | 여자 | 합계 | 남자 | 여자 | 합계 | ||||
태안면 | 1,624 | 4,608 | 4,378 | 8,986 | 12 | 12 | 13 | 25 | 5 | 13 | 4 | 17 |
안면면 | 1,547 | 4,511 | 4,169 | 8,680 | 5 | 6 | 3 | 9 | ||||
남면 | 889 | 2,625 | 2,577 | 5,202 | 2 | 2 | 2 | 4 | ||||
근흥면 | 1,050 | 3,129 | 2,958 | 6,087 | 18 | 35 | 16 | 51 | ||||
소원면 | 1,152 | 3,198 | 3,027 | 6,225 | 2 | 4 | 5 | 9 | ||||
원북면 | 994 | 2,822 | 2,620 | 5,442 | 2 | 2 | 2 | 4 | ||||
이북면 | 826 | 2,247 | 2,101 | 4,348 | 2 | 3 | 2 | 5 | ||||
총 계 | 8,082 | 23,140 | 21,830 | 44,970 | 43 | 64 | 46 | 107 | 5 | 13 | 4 | 17 |
일본강점기에 그들은 우리고장의 미풍은 장려하고 악풍과 후진적인 것은 개혁에 나간다는 취지에서 지방개량기관 등을 설치하고 영농법을 개선한다든가 축산업 수산업 등을 발전시켜 획기적인 소득을 가져온다 해도 이는 우리 농민의 몫이 아니라 모두 일본인에게 수탈 당하고 또는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물자 등으로 탈취됨으로서 우리의 경제생활은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농민들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차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산업에 종사할 의욕마저 상실한 채 기진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1916년경에 설치되었던 지역별 진흥회 실태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읍면별 구분 | 창립연월일 | 회수 | 회원수 | 도에서 표창 받은회 명칭 |
지정장려하는 회의 명칭 |
비고 |
---|---|---|---|---|---|---|
태안면 | 1916. 9.30 | 9개 | 622명 | 동문리회 | ||
안면면 | 1917. 2.15 | 9 | 1,230 | 고남리회 | ||
남면 | 1917. 3.15 | 8 | 603 | 달산리회 | ||
근흥면 | 1916. 12.2 | 6 | 970 | 안기리회 | 안기리회 | |
소원면 | 1918. 5.20 | 3 | 349 | 신덕리회 | ||
원북면 | 1916. 10.1 | 9 | 644 | 양산리회 | ||
이북면 | 1916. 11.10 | 4 | 391 | 관리회 | ||
총 계 | 48 | 4,809 | 2개회 | 6개회 |
이 진흥회는 태안 지역에 48개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그 회원 수는 무려 4,809명이었다.
이 48개 진흥회 중에서 태안의 동문리진흥회와 근흥의 안기리 진흥회는 모범회로서 충청남도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태안면 남문리진흥회」를 소개한다. 이 진흥회는 1916년 9월에 조직되었는데 회장 김병선(金炳善)에 회원 151명이었다. 이 진흥회의 진행상황을 살펴보면
그리고 이 밖에 남문리 진흥회에서는 향약(鄕約)을 권장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6년 4월 1일 농사법을 개선하고 그 발전을 도보하기 위해 농회(農會)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출하여 업무를 개시하였는데, 그 사업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1917년 4월 10일 축산업을 개선하고 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축산동업조합」을 조직하고 업무를 개시했는데, 그 업무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어업의 개선과 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920년 1월 20일 근흥면의 신진도리·가의도리 어민과 일본인 합동으로 「어업조합」을 조직하고 그 회장에 최완수(崔完洙)를 추대하여 근흥면 정죽리에 사무실을 개설한 뒤 업무를 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끝으로 태안 주민의 생활 상태를 살펴보면 생산량의 40∼90%를 소작료로 수탈 당함으로서 소작인의생활은 더욱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소작농이 8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며, 따라서 토지는 매우 척박하고 수원이 없어 냇물이 흐르지 않는 데다, 수리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논은 대부분이 천수답뿐이었다. 게다가 흉년이 들면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만주(滿洲)산의 조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결국 이는 매판자본을 살찌게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농가에서는 부업으로 양잠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규모가 적고 또 양잠술이 낙후되어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어촌에서는 바다를 제2의 생활터전으로 활용함으로서 어느 정도 생계의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일본강점하의 우리 국민의 생활상은 한마디로 비참할 뿐이었다. 우리 손으로 생산한 쌀을 수탈 당하고 생활고에 허덕이며, 또한 모든 산업활동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이용되는가 하면, 심지어 말을 못하게 하고 성(姓)마져 빼앗기는 일본화(日本化)과정에서 숨이 막히어 허우적거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