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태안군이 이미 서산군에 병합되어 태안군은 행정상 하나의 면(面)으로 격하되어 있었으므로 서산군의 입장에서 3·1독립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서산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시위가 처음으로 전개된 곳은 해미였다. 해미에서 상업을 하던 한병선(韓炳善)이 고종황제(高宗皇帝) 인산(因山)에 서울에 갔다 독립운동 시위대열에 끼어 들어 「시위」를 하다 독립선언서를 얻어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한씨는 고심 끝에 평소 자별하게 지내던 기지리(機池里)의 이계성(李啓聖)을 찾아갔다. 이씨를 찾은 한씨는 담소를 하며 또 어저께 서울에 가서 목격한 것을 이야기하니, 평소에 느꼈던 이상으로 애국심이 불타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 자리에서 한씨는 찾아온 뜻을 분명히 이씨에게 말했다.
이씨는 굳은 결심을 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한씨의 손을 꼭 잡으며 곧 실천에 옮길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만약 거사중에 일경에 잡히게 될 경우라도 한씨의 사주(使嗾)임을 절대 발설치 않을 것이니, 한씨는 계속 은밀하게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두 사람은 굳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이계성은 즉시 실천에 들어갔다. 마침 3월 23일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김연택(金然澤)·김관용(金寬容)·류세근(柳世根) 등과 굳게 밀약을 하고 졸업식을 마친 후 졸업생 전원과 재학생들을 인솔하여 산정(山亭)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갈 무렵 일경에 붙들려 경찰 주재소(지서)로 모두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계성은 모두 자신이 단독으로 계획한 주모자임을 밝히니, 밀약 했던 김연택·김관용·류세근 등도 자신들이 계획한 일이 틀림없으니 다른 학생들은 모두 석방시켜 줄 것을 간청함으로서 결국 4명만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주재소에서는 이 사건의 주모자는 서울에 자주 내왕하는 한병선이 틀림없음을 단정하고, 우선 한병선의 집을 감시하며, 이계성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면서 이번 사건의 배후 조종자가 틀림없이 한병선이니 그대로 실토하면 너는 무죄석방이라 하며 때론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이계성은 혀를 깨물고 끝까지 부인하였으므로 결국은 이씨만 옥고를 치루고 한씨는 계속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펴나갈 수 있었다.
사나이와 사나이의 철석같은 약속을, 만난을 무릅쓰고 지켜낸 이 의리는 너무나 값진 것이며, 또 두 사람의 애국충정에 머리가 수그러질 뿐이다.
이 같은 해미에서의 독립운동 시위사건이 있은 후, 군내 각지에 은밀히 전파되어 정미·운산·서산·태안 등지에서도 연달아 독립시위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서산군의 관할 하에 있던 당시의 정미시장(貞美市場) 독립만세 사건은 그 규모가 매우 크고 또 격렬했었다.
이인정( 李寅正)·남주원(南柱元)·남상락(南相洛)·장기환(張基煥) 등이 핵심이 되어 천의 (天宜 )장날을 이용하여 주재소를 습격하고, 아울러 장에 모인 인원을 모아 놓은 다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다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마침내 주모자 이인정과 남주원은 1년 6월 그리고 남상락과 장기환은 각각 1년의 형기로 공주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또한 운산면 태봉리에 사는 이봉하(李鳳夏)가 중심이 되어, 부락민을 동원하여 마을 뒤 태봉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주모자 이봉하는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연행된 일반인은 모두 석방되었다.
이같이 표면적인 시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므로 이후부터는 시위운동은 자제하고 은밀히 지하에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군자금을 모금하여 독립운동가를 돕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갔다.
특히 해미의 억대리 출신인 서병철(徐丙轍)은 조선 독립단(朝鮮獨立團)서산지부 조직을 위해 동지 규합에 몰두하던 중에, 유태길(劉泰吉)여사의 도움으로 서산읍 장리에 사는 김병년 승지를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김승지를 만난 서병철은 김승지로부터 지부 조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고 즉시 안면도로 들어가 조선독립단 서산지부 초대 지부장으로 전종린(全鍾麟)을 추대하고, 이어 오몽근(吳夢根)·이종헌(李鍾憲)·가재창(賈在昌)·임종석(林鍾錫) 등의 동지를 물색하여 안면도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조직을 강화하여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하 조직체를 중심으로 활동을 펴며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모금을 하여 오던 중 어느 부호자(富豪者)의 밀고에 따라 일당이 모두 잡혀갔는데, 서병철은 4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2년형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루어야 했다.
그리고 특기할 사항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이었던 옥파 이종일(李鍾一) 선생은 태안 출신으로 15세에 상경하여 서울을 무대로 나라사랑에 전념하다 67세로 일생을 마친 거룩한 애국지사였다.
3·1운동의 거사계획 및 독립선언서의 인쇄 책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태화관에서 직접 낭독했던 장본인이 이종일 선생이었다.
3·1운동 당시 이종일 선생이 고향인 태안에서 독립운동 시위대열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에서 3·1운동 계획을 직접 지도하고 민족대표로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고결한 애국지사가 태안 출신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보다 구체적인 옥파의 업적에 대해선 다음의 인물편을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