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王建)은 918년 (신라 경명왕 2)에 고려(高麗)를 세우고, 이어 936년에 후 3국을 통일하여 다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민족 대 통일을 실현한 왕건은 북진정책(北進 政策)을 국시(國是)로 하고 고구려의 옛 땅(故土)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역대 군주들은 유학(遊學)을 치국 이념으로 하고 모든 제도를 갖추어 귀족 중앙 집권 체제(貴族中央集權體制)를 확립함으로서, 종래의 신라 골품제도가 폐지되는 커다란 사회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불교는 왕실의 보호 아래 사회의 정신면을 지배는 한편, 문치주의(文治主義)는 숭문경무(崇文輕武)의 길로 치달아 마침내 무신(武臣)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른바 최씨 무단 정치(崔氏武斷政治)시대를 전개시킴으로서 사회가 몹시 소란할 때, 북방 대륙에서는 거란(渠丹)·여진(女眞)·몽고(蒙古)등이 일어나 이 들 세력과 고려의 북진 정책이 잦은 충돌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고려는 무력으로 이를 물리치거나 또는 뛰어난 외교술(外交術)로 막아내곤 하였으나, 결국은 세계를 정복하려는 몽고의 힘 앞에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를 정복한 몽고군의 무자비한 남살 여복(男殺女服)의 만행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비참한 현상이었으며, 따라서 국토는 그들에 짓밟혀 초토화(焦土化) 되었으니, 약소국이 당하는 수모가 이런 것이라면 신이 존재치 않음을 한탄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는 오랫동안 대몽투쟁(對夢鬪爭)에서 국력이 소모되고, 이에 따라 국민들로부터 이반(離反)되어 가자, 마침내 불력(佛力)을 빌어 국가를 보위하고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8만대장경(八萬大藏輕)을 조판(彫版)하였다.
이같이 방대한 8만대장경은 세계 출판사상 최초의 것으로서, 우리나라 출판문화가 선진화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며, 따라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발명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고려 초기에 송(宋)나라의 자기(磁器)를 수입하여 이를 참고로 고려 독자적인 청자를 제작함으로서, 이른바 고려 청자 문화를 정립시켜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역시 문화 민족의 저력을 과시한 것이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륙에서 명(明)이 일어나고 원(元)이 쇠약해지자 공민왕(恭愍王)은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실시하였다.
공민왕 스스로 솔선 수범하여 ①몽고풍 폐지 ②원 연호 폐지 ③관제 복구 ④정동행성(征東行省) 폐지 ⑤쌍성총관부(雙省摠管府)폐지 ⑥동녕부(東寧府)정벌 ⑦부역자 숙청 등 과감한 정치로 초기는 매우 큰 성과를 얻었으나, 고려 귀족 계급이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로 갈리어 대립하더니, 마침내 양파가 충돌하여 친원파인 최영(崔營)은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단행하고, 친명파인 이성계(李成桂)는 이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혁명을 일으킴으로서 고려가 주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드디어 조선국(朝鮮國)을 세워 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