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배란 지명(地名)을 말함인데, 이는 소원면 의항리(所遠面 蟻項里)2구에 있다.
이 의항(蟻項)이란 글자 그대로 순 우리말의 「개미목」이었는데 그 동안 수 십년 내려 오면서 개미가 개로 줄고 목이 묵으로 와전된 금은 편의상 통칭 개묵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본래 이 개묵은 섬이었는데 제방(堤防)을 축조하고 육지와 연결되어 반도(半島)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형이 마치 개미목 생겼다 하여 개미목이라고 부르던 것이 매묵으로 했으며 그리고 이 개미목을 한자어(漢字語)로 표기해서 그대로 의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개묵의 뒷편으로는 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는 개묵의 진산(鎭山)으로서 이 산너머에는 서북(西北)쪽으로 약 4.5백 미터쯤 되는 아늑한 해안이 있다. 이 곳을 속칭 태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태배의 해안에는 고은 은모래가 짙현한 곳에 곱게 깔려있고 또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아래쪽엔 바다 돌 이 드러나서 이 곳에는 개와 고둥·굴 그리고 각종 해조를 채취하는 부녀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화창한 봄날이면 산기슭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꽃, 그리고 질펀한 해안가에 곱게 깔려있는 은모래 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비록 시인이 아니더라도 저절로 한 구절의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경승지(景勝地)이다.
더구나 해안가 산밑에는 커다란 자연석이 우람하게 서 있는데 크기는 가로 약2미터, 세로2.30미터로서 전면이 비교적 편편한데 이 곳에 한시(漢詩)가 쓰여져 있다.
이것을 보고 그 내용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이 한시는 옛날 중국의 시선(詩仙)이백(李白=자는 太白)이 이곳에 와서 아름다운 절경에 도취되어 암벽에 써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곳 지명(地名)을 태백(太白)이라고 하였는데 수 백년 내려오면서 태백의 백에서 ㄱ(기역)이 탈락되어 편의상 태배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칠언시(七言詩)가 두 편 오언시(五言詩)가 한편 모두 3편의 한시(漢詩)로 되어 있는데, 이중에 칠언 시에는 시작자(詩作者)의 성명과 연월일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나 오언 시에는 그것이 완전히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다.
시의 내용중에는 이미 소멸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시의 흐름과 전후 관계 등을 참작하여 결자(缺字)를 필자 나름대로 보완하여 해독(解讀)하면 그런대로 시를 이해할 수 있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둘 거은 이 시는 이태백(李太白)이 지은 것이 아니다.
암벽에 쓰여진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춘석 보완)
이와 같이 세 사람의 시가 쓰여져 있는데 ①은 이기종(李起宗)이 지었고, ②는 신산우(申山雨)그리고 ③은 미상(未詳)이다. 그런데 ①의 첫구 등왕고각임강저(藤王高閣臨江渚)는 당(唐)나라 초기(初期)의 왕발(王勃)의 시다.
이 시는 등왕각(藤王閣)을 중수(重修)하고 서기 675년 (上元2年)9월 9일의 낙성연(落成宴)때 이에 참석하여 왕발(650∼676)이 지은 시이다. 이 등왕각은 지금의 중국 강서성·남창현(中共江西省南昌縣)에 있는데, 홍주도독 이원영(洪州都督 李元瓔)이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강저(江渚)는 남창(南昌)옆을 흘러서 심양호(審陽湖)로 들어가는 장강(障江)의 물가를 일컫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중(時中)에 중국 지명과 누각(樓閣)등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일찍 중국의 시인이 이 곳에 와서 시를 지었다고 하는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히 와전된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분명히 이기종으로 되어 있다. 다만 작자가 첫째 구절을 왕발의 시를 빌린 것뿐이다. 그리고 생존 기간에는 신사년(辛巳年)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왕발이 여기에 와서 시를 지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백(李白)이 이곳에 와서 시를 지었다고 이를 실증할 수 있는 무언가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겠는데 그럴만한 물증이 없다.
그런데 이백(李白)의 생존 기간 중에는 신사년(辛巳年)이 들어 있다.
이백의 35세 때가 서기 741년으로 이 때가 바로 신사년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백이 한나라·제나라·노나라(漢·濟·魯)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활동하고 있을 시기이다. 이 무렵에 이태백(李太白)이 이곳 의항리에 와서 시를 짓고 놀다갈 리가 만무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태백이 우리 나라에 다녀갔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이태백이 왕발보다 후세인(後世人)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작(詩作)에 왕발의 시를 도용(盜用)할 위인(爲人)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시의 시풍(時風)으로 미루어 보아 이태백의 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백(李白=706∼762)은 당(唐)나라 중엽의 시인이다. 즉 두보(杜甫)와 아울러 중국 최대의 시인으로서 시선(詩仙)이라고 하였는데, 자(字)는 태백(太白)이요 호는 청련(淸漣)또는 취선옹(醉仙翁)이라고도 하였다. 이백은 본래 천성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한 천재적 시인으로 역시 한·위(漢·魏)의 호방함을 본떠서 가유 분방한 감정을 발전시킨 시인이다.
이같이 이백의 시풍을 짐작해 볼 때 개묵의 태배 암벽에 쓰여져 있는 시는 이백의 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이 시의 작자는 분명히 이기종으로 명기(明記)되어 있으니. 이는 이백과 이명(異名)의 동인(同人)이 아니므로 이 시는 이백이 쓴 시가 아닌 것이다. 설령 이 시가 이백이 썼다 손치더라도 신사년(辛巳年)이라면 이백이 35세 때인 서기 741년인데 그러면 보면 지금으로부터 1246년 전의 일이다. 1200여년 전에 노천(露天)의 암벽에 쓴 글씨가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돌에 깊이 음각한 글 시도 노천에 두면 100여년이 못되어 풍우(風雨)에 깎이여 판독(判讀)할 수가 없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보아왔는데, 하물며 노천의 암벽에 붓으로 쓴 글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리고 태백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자화자찬은 했지만 실은 봄의 경치(春景)가 이만할 곳이라면 우리 나라 전국 각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세계에 군림(君臨)하던 대당(大唐)의 최고의 시인 이백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는 명승지도 아닌 이곳에, 그것도 교통이 불편한 8세기에 이 곳에 왔겠는가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사한 결과 이 시는 조선조(朝鮮朝)의 영 정조(英 征朝)때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것이 좋을 것 같다. 이영 정조 때는 실학(實學)의 극성기로서 이때는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널리 인재를 등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정조(正祖)는 학문 연구소(學文 硏究所)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1776)하여 많은 실학자(實學者)를 등용하는가 하면 특별히 서얼(庶孼)출신의 학자들로 채용되어 학문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는 경향각지(京鄕 各地)에서 학문의 열기가 놓아 가고 있을 때였으므로 시골에서도 선비(跣菲)들이 학업에 열중하다 좀 쉬기 위해 바닷가 경승지를 찾아 이고 놀다가 유흥(遊興)가 절경에 취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암벽에 시를 남긴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시작일(時作日)이 신사(辛巳)4월5일이다. 이 신사년은 서기 1761년(영조37)이니 지금으로부터 246년 전이다 또한 두 번째 시는 경자(庚子)3월 기망(旣望)에 신산우(申山雨 )가 춘경(春景)이 좋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이 곳에 시를 남긴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 시는 시작일(詩作日)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5언시의 내용으로 보아 신산우와 같은 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3편의 시를 분석해 볼 때 3사람의 작자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지막의 5언시를 보면 봄철의 정경을 그대로 잘 묘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스승은 어느 철에 다녀갔는지 문생들이 경승지를 찾아오니
3월의 진달래꽃 활짝 웃고 봄바람은 운산을 메우더라」
소원면에서 제일 큰산이 무슨 산이냐 한다면「철마산」이라고 모두 대답하리라. 지금은 산림이 그리 울창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들어차 명산의 면모를 고시했던 모양이다.
이 철마산 등성이에 지금도 사찰이 터가 남아있는데 주춧돌로 사용됐던 돌이 거짓말 조금 보태어 집채만한 것이 있으니 그 당시 사람들의 재주를 짐작케 한다. 재주도 재주이지만 그 때 사람들은 시체말로 초능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철마산 근처에는「조주남」이라는 힘이 황우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주남이가 천하에 장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 주남이는 무식한데다가 미련하고 힘도 없는 그런 위인이었다. 한마디로 반편 비슷한 저능아였다. 그런 사람이니 자연히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었다. 아무리 저능아라 해도 그런 환경에 있었으니 주남이는 늘 외롭고 고독했다.
그런 주남이가 어느 날, 철마산으로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 때는 따뜻한 봄날이라 산에는 기화요초들이 맵시를 자랑했다.
주남이는 지게를 벗어놓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 해바라지를 하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도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네 이름이 주남이지?"
"그렇습니다만......."
주남이는 주저주저하고 있는데 도사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내가 네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어떠냐?"
주남이는 뜻하지 않은 도사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무슨 선물을 주시겠다는 겁니까?"
주남이의 물음에 도사는 껄껄 웃고는 대답했다.
"나는 이 철마산의 산신령이란다. 그리고 네게 주고 싶은 선물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재주(지혜)이고 하나는 힘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줄 터이니 말해보아라."
이 소리에 주남이는 문득, 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친구들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다할 때마다 친구들을 힘으로라도 제압하고 싶은 때문이었다.
"힘을 주십시오!"
그러자 산신령은 주남의 뺨을 세 번이나 세차게 때리고는 홀연히 살아지는게 아닌가
"아야!"
주남이는 산신령이 때리는 뺨이 몹시 아파 그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허참, 별 꿈도 다 꾸었네!"
주남은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갑자기 힘이 솟아나며 나무를 하는 낫자루가 쑥 빠지는 것이다. 그뿐인가 소나무 한 그루를 뽑아보니 쉽게 뽑아보니 쉽게 뽑히는 것이다. 힘이 천하장사 부럽지 않을만큼 뻗쳐 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신령이 내게 힘을 준 것이로구나!"
주남은 이 신기로운 사건에 스스로 놀라면서 순식간에 집채만한 나뭇짐을 지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남이는 힘이 센 대신 무지와 미련은 더해만 갔다.
주남이네 대한 미련한 이야기를 소개해야 이 전설의 매듭을 할 수 있다.
어느 여름, 그 날은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주남은 소원에서 태안까지 소금을 오르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고 숨은 턱에 닿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보다못해 말했다.
"여보게 주남이 좀 쉬어가게."
그제서야 주남이는 지게를 받쳐놓고 땀을 닦았다. 그리고 얼마를 쉬고는 다시 소금 가마니를 지고 한티재를 넘어 태안쪽으로 갔다. 그런데 얼마쯤 가니까 또 힘이 들고 더워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쉬어가야지."이렇게 생각한 주남은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한티재를 가더니 조금 전 쉬었던 그 자리에서 지게를 받쳐놓고 쉬는 것이 아닌가. 동네 사람이 이 모양을 보고는
"이 사람 주남이 돼 되돌아 왔나."하고 물으니 주남이는 천연덕스럽게,
"쉬어 갈려구요?"하는 것이 아닌가 주남이 생각은 쉬는 곳이 이곳 뿐 인줄 안 모양이다. 미련의 소치였다.
그러나 그 미련한 힘은 공익을 위하여 크게 쓰여지기도 했다.
철마산에는 절터가 있다. 그 사찰을 건축할 때, 주남은 다른 사람보다 백배나 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주남이가 운반했다는 주춧돌은 그야말로 집채
각설하고,
주남이 장정이 되어 그 힘도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런 때, 태안 장터에는 불량배 중(스님)이 장사꾼들을 몹시 괴롭혔다. 장날마다 나타나서 돈을 빼앗는데 누구하나 그 중을 상대로 싸움을 할 수 없었다. 중의 힘은 주남이 못지 않으며 그 성품까지 포악하여 돈을 눈뜨고 빼앗기면서도 항의 한번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내가 그놈의 땡중을 혼내어 버릇을 고쳐 놀테다!"
주남은 어느 태안 장날, 거나하게 술을 먹고는 땡중과 마주 섰다.
"선량한 주민들을 괴롭히는 땡중아, 혼 좀 나봐라."
그러나 중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울려 싸움이 시작됐으나 승부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싸움은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두사람 모두 지쳐 있었고 보는 사람들의 등에서까지 땀이 흘렀다. 사람들은 주남이가 이겨주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이윽고 주남이가 마지막 힘을 쓰는 듯 황소울음 같은 소리를 지르는가 했더니 가짜중을 번쩍 들어 저만치 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인가! 주남이 주저앉은 자리에는 쇠발뚝이 있었는데 주남이는 그 쇠말뚝에 항문을 찔리고 만 것이다. 항문에서 붉은 것이 흘렀다. 결국 가짜중과 주남이의 싸움은 두 사람 모두 죽음으로 판가름이 났다.
지금도 철마산에는 옛날 주남이가 옮겼다는 주춧돌이 남아 있고 무지한 힘과 다는 지혜가 인간에게 더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전설과 우화 속에서 호랑이와의 인간과의 관계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느 때는 사람을 해치는 포악한 동물로, 어느 때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주는 영물로도 등장한다.
옛날에는 호랑이는 많이 살고 있었던 모양인지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우리 고장에서만 해도 호랑이 이야기는 많이 있다.
소원면 만리포에서 백리포로 넘어가는 한 지점을「범벙골」(일명 붐덩굴)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곳에 호랑이가 살던 굴이 있다하여 생긴 이름인데 이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과 호랑이의 적대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오랜 옛날 백리포에는 과부 한 사람이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아들의 나이가 여섯 살이라 하지만 그 나이는 정확하지 않다.
어느 날, 이 여인은 아들 혼자 집에 두고 밭일을 나갔다. 그런데 그날 따라 부엉이가 유난히 울었다.
"웬 부엉이가 이렇게 운담?"
고부는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어 하던 일손을 멈추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여인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섰으나 아들의 대답은 없고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이가 변을 당한 것이 아닌가"
과부가 마루에 올라가려 하니 마루바닥이 피가 엉켜 있었고 아들의 신발 한짝이 담 아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가 과부의 머리 속에는 호랑이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호랑이 짓이다."
과부는 호랑이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그날 밤, 과부가 혼자 방에 있는데 호랑이가 다시 나타났다. 낮에 사람을 물어간 호랑이는 다시 사람이 있나 하고 온 것이다.
호랑이는 문 창호지를 발톱으로 찢고 발을 안으로 쓱 디밀었다. 이때 과부는 들어있던 송곳으로 호랑이 발바닥을 쿡 찔렀다.
"어흥!"
불의에 습격을 받은 호랑이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과부는 절뚝거리며 달아나는 호랑이 뒤를 쫓았다. 호랑이 굴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한참을 달려 자기 굴로 들어갔다.
"옳지. 이곳이로구나, 이놈의 호랑이 두고 보자."
과부는 날이 밝자 부엌칼을 들고 호랑이 굴이 있는 곳에 가서 나무 뒤에 숨어 호랑이의 동태를 살폈다. 한참을 기다리니 호랑이가 굴에서 나왔다. 사냥을 나간 것이다.
"이때다"
과부는 부엌칼을 들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원리를 알았던 모양이다. 과부는 들어가니 굴 안에는 생후 얼마되지 않은 호랑이 새끼 세 마리가 있었다.
"이 철천지원수!"
과부는 부엌칼을 휘둘러 세 마리 호랑이를 죽이고는 호랑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먹이를 입에 물고 호랑이가 나타났다. 과부는 벽 한쪽에 달라붙어 호랑이의 동태를 살피는데 호랑이는 새끼들이 변을 당한 것을 알자 눈에 불똥이 튀며 어흥소리를 지르더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쩌면 새끼를 죽인 것이 사람이라 생각하고 복수를 하러 나갈려는지 모른다.
과부는 밖으로 나가려는 호랑이의 꼬리를 잽싸게 움켜쥐었다. 뜻하지 않은 적이 나타나자 호랑이는 더 성이 나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사력을 다해 잡고 있는 과부의 힘도 대단했다.
몇 걸을 질질 끌려가선 과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엌칼로 호랑이 항문을 힘껏 찔렀다. 얼마나 힘이 센지 긴칼이 다 들어갔다.
"어흥!"
호랑이는 크게 비명을 지르고 밖으로 나가 길길이 뛰더니 죽고 말았다. 아들의 원수를 갚은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어머니였다.
그후로 이 호랑이가 살던 곳을「범벙굴」이라 했다는 얘기다.
힘이 센 사람을 우리는 장수(장사)라 한다. 힘이 세기 때문에 예사사람들과 다른 데가 많을 것이지만 걸음을 걷는데도 빠르고 발자국도 움푹 폐인다고 해서 그 힘이 얼마나 센가를 이야기 거리로 만들고 있다.
소원면 의향3구에는「덜재산」이라는 산 아래는 구들들이란 곳이 있다.
옛날 조선조시대라고도 하고 신라시대라고도 하는 그 때에 덜재산 아래 구들들 어느집에 사가 생겼다. 그 집에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건강했는데 이름을 「돌이」라 지었다.
돌이는 자라면서 성실하고 또한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했는데 돌이는 장성해서 길쌈을 잘하는 이웃동에 규수와 결혼을 했다.
돌이는 차자이기 때문에 결혼 후 부모를 떠나 이웃 방주골이라는 동네로 분가하여 나갔다.하지만 돌이는 매일 부모님께 안부 인사를 드렸는데 부모님을 찾아 갈 때면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제일 크고 굵은 것을 골라 가지고 부모님께 드리곤 했었다. 이처럼 효성이 지극한 돌이였다.
어느 날, 그날도 돌이는 살을 매어 잡은 생선을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구들들로 가고 있었다. 돌이가 덜재산 고개를 넘는데 몸이 피곤하여 잠시 쉬고 있었는데 너무 피곤한 탓인지 깜박 잠이 들었었다.
얼마쯤 자고 일어났을까 돌이가 잠에서 깨어보니 자기가 자고 있던 덜재산 고개가 아니라 부모님이 계신 구들들이었다. 돌이는 이 담긴 부게(지고 다니는 대바구니)가 없어진 줄 알고 깜짝 놀라 옆을 보니 고기가 담긴 부케가 함께 옮겨진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분명히 들재산 고개에서 쉬고 있었는데 누가 나를 이곳으로 옮겨 놓았을까."
동이는 하도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다음날로 돌이는 부모님께 드릴 생선을 지고 다시 구들들로 향하던 중, 덜재산 고개에 이르니 다시 피곤이 몰려들어 잠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 후, 동이가 눈을 떠보니 어제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동이는 자기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음날은 자지 않고 자기가 자는 동안 누가 자기를 구들들까지 데려다 놓는가를 살피기로 했다.
다음날, 돌이는 어제와 같이 덜재산에서 쉬면서 잠이 든 척하고 있었다. 이윽고, 인기척이 나면서 웬 남자가 나타나는데 몸집이 아주 작은 난쟁이었다. 난쟁이는 동이가 잠든 줄을 앍 번쩍 들어올리는데 돌이는 눈을 크게 뜨자 그 자리에 돌이를 그대로 놓고 달아나는 것이다.
몰래 옮겨 놓으려다가 들키고 만 것이다.
난쟁이는 발은 한번 쿵하고 딛고 훌쩍 뛰어 오른발은 방주골에 딛고 왼쪽발은 노약골에 딛고 달아났는데 그 때 난쟁이는 딛고 뛴 자리에서 발자국이 움푹 패었다. 이만하면 그 난쟁이 장수가 얼마나 힘이 세고 빠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때 생긴 발자국을 사람들은「장수발자국」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난쟁이 장수가 달아나자 돌이는 그 장수를 따라 돌아오지 않았다. 하는데 돌이 부인은 돌이가 사라진 노약골을 매일 바라보다가 죽었다는데 돌이 아내가 배를 짜던 마을을「방직골」이라 불렀으나 세월이 흐르며 원어가 변하여 지금은「방주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돌이가 태어난 곳은「구돌돌」이라 하였는데 지금은「구들들」로 불려지고 있다.
한편, 돌이 아내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무덤에는 지금도 사람이 올라가 발을 구르면 쿵쿵소리가 나는데 소리가 난다해서「산무덤」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무덤을 발굴해 봄직도 하다.
소원면 철마산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부엉이재」라는 고개가 있고 그곳에「부엉이바위」라 불리는 바위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오랜 옛날, 한양(서울)에는 박(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박부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병약하여 늘 앓고 있었다. 집안이 넉넉하고 부러운 것이 없는 박부자에게도 아들이 병으로 고생하는 것 때문에 얼굴이 수심이 떠날 날이 없었다.
영하다는 의원도 다 부르고 영약이라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아들의 병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옷차림이 남루하고 초라하게 생긴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 사람은 자칭 의원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댁의 아드님에게 좋은 약이 있어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
박부자는 이 초라한 자칭 의원이 썩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지풀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 좋은 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곰쓸개를 먹이면 낫는 병입니다."
"곰쓸개요, 곰쓸개라면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나요,?
"틀림없습니다. 지금부터 곰 사냥을 하여 쓸개를 얻어야 합니다."
박부자는 많은 돈을 주고 명사수라 알려진 황씨 성을 가진 포수를 샀다.
이렇게 하여 박부자는 황포수와 의원을 데리고 곰 사냥에 나섰다. 곰이 있을만한 험준한 산은 다 더듬어 충청도까지 와서 산을 뒤졌지만 곰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덕산 어느 산에서 곰 발자국을 발견했다.
"곰이 있긴 있구나."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됩니다."
세 사람은 곰 발자국을 따라 오다보니 소원의 철마산까지 오게 되었다.
"어디?"
과연 곰이 바위 밑에서 자고 있었다. 황포수는 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됐다!"
곰쓸개를 얻은 그들은 피곤한 몸을 쉴겸 산에서 밥을 지어먹기로 하고 곰쓸개는 종이에 싸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그들은 한참을 쉬고 이제 가야겠다 생각하고 곰쓸개를 나뭇가지에서 내리려고 보니 그 사이 곰쓸개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 부엉이가 수상하오"
세 사람이 나무 위를 쳐다보니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부엉이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화살에 맞은 상처 같았다.
"맞아, 저놈의 부엉이가 곰쓸개를 먹었어."
화가 난 황포수가 총을 부엉이에게 겨누자 의원이 말했다.
"그냥 두시오, 부엉이 다리에서 흐르는 피나 받읍시다.."
의원은 접시를 가져다가 부엉이 다리에서 똑 똑 떨어지는 피를 받았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곰쓸개 성분이 이 피에 들어있소,"
서울로 올라온 그들은 그 피를 박부자 아들에게 먹였더니 병이 거뜬히 낳았다.
박부자는 거지의원에게 사례하고 황포수에게도 품삯을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다.
그후, 박부자 집에는 밤마다 부엉이가 날아와 울었다. 왜 그리 밤마다 찾아와 우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자기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 고마움 때문이라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 부엉이는 다시 철마산 부엉이재에 와서 바위 밑에서 100년을 살았다 하는데 이 부엉이가 울면 이 지방에 경사스런 일이 생기고 부엉이가 어디로 날아갔다 오면 그 기간동안 이 동네에는 궂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부엉이재」니「부엉이 바위」니 하는 말은 이때부터 생긴 이름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