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읍 정당리(安眠邑 政堂里)의 동쪽 앞 바다를 용해라 부른다. 이 곳을 용해라 부르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일찍 정당리 마을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낚시질을 무척 좋아했었다. 이 청년은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주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는데, 그가 낚시질을 좋아한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던 청년의 어머니가 어느 겨울 날 갑자기 아들에게 생선이 먹고 알았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낚시질을 나갔던 것이다. 하루 종일 바다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으나, 고기가 잡히지 않아 그대로 돌아 갈려고 낚시대를 거두는데 무엇인가 딸려옴을 느꼈다. 이때 청년은 조심스럽게 낚시 줄을 당겨보니 큰 거북이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청년은 거북이가 환자에게 좋다는 말을 들은리라 고기 대신 거북이를 가지고 집에 돌아온 청년은 기뻐서 즉시 이 사실을 어머니께 고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나는 물고기를 원했지 거북이를 원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이를 거절하니 효성이 지극한 청년은 할 수 없이 거북을 부엌의 물두멍에 넣고 다시 낚시질을 나갔다. 그 날을 다행히도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청년은 기뻐서 요리를 하려고 부엌문을 열으니 누가 언제 차려 놓았는지 진수 성찬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청년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시장할 어머니를 생각하고 우선 차려놓은 밥상을 올렸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은 다음날도 여전히 계속되어 갔다. 이에 대한 청년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청년은 생각 끝에 다음날 낚시질을 간다고 어머니께 알리고는 숨어서 부엌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두멍속의 거북이가 예쁜 여인으로 변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본 청년은 무의식중에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그 여인을 붙들었다. 이에 그녀는 깜짝 놀래며 청년에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저는 당신과 영원히 살려고 하였는데 이제 저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용이 되어 승천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청년은 이 미녀(美女)에 매달려 못 가게 애원하였지만, 결국 그녀는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였으므로, 이 바다를 용해라고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이 청년은 매일같이 바다에 나가 다시 거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시름없이 계속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안면읍의 소재지(승언리)에서 서쪽으로 잠시 걸어가다 보면 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여기서 바닷가에 이르기 전에 왼쪽으로 가는 길에 훤히 뚫려 있는데, 이것이 젓개로 가는 길이니 약1㎞쯤 가게되면 된 아늑한 포구에 이르게된다. 이곳이 바로「젓개」인 것이다. 이 젓개는 언제나 수 십 척의 선박이 정박하여 있는데, 이는 이곳의 명물인 전복과 해삼 등을 채취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며, 따라서 해녀들의 작업 광경도 매우 이채롭게 보인다. 그런데 왜 이 포구를 젓개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 이류를 살펴보면 다음가 같다.
이 젓개의 북쪽에는 조그마한 산이 솟아 있다. 이 산의 중턱에 아담한 절이 한 채 있었으니 이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공부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그 뒤부터는 이 곳을 지나는 선박들이 암초에 걸려 사고를 일으키는 일이 빈번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악천후에 이 앞을 지나는 선박들이 무학대사의 절에 켜진 불빛을 등대로 착각하고 그 불빛을 따라 가까이 들어오다 암초에 걸려 파선(破船)되기 예사였다 한다.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무학대사는 그 절을 버리고 간월도(看月島)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 후로부터는 이 앞을 지나는 선박이 암초에 걸리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이 생긴 뒤에 이 포구의 명칭을 절이 있었다하여 「절개」라 부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이 젓으로 와음화(訛音化)되어 절개가 「젓개」로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횡수막이」이 홍수매기로 「성황당」이 서낭당으로 「고시례」가 고수레 등으로 와음화 된 사실(史實)은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 절개가 「젓개」로 변한 것에 대해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조선조(朝先朝)의 말엽에 있었던 일이다. 전라도(全羅道)의 세곡(稅穀)을 서울로 운반하는데 해로를 통하여 선박이 이를 전담하였다. 이 무렵에는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이 미흡하였기 때문에 전라도 연안에서 서울까지는 많은 날짜가 걸려야 했으며, 또한 많은 포구를 경유하면서 정박(碇泊)을 해야 했다. 이 같은 여러 포구를 경유할 때는 이 세곡선의 감독관은 의식적으로 수송 날짜를 늦추어가며 쌀을 빼내어 부당히 사복(私腹)을 채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세곡선이 안면도에 이르렀을 때는 세곡이 몇 섬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면도에 도착한 세곡선은 지금의 「쌀 썩는 여」라고 불리우는 암초에 고의적으로 부딪쳐 파선(破船)시켜놓고 정부에 사람을 파견하고 보고를 하였다는 것이다.
다량의 세곡을 부정 착복하고 그대로 수송하였을 때 그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같은 고의적인 사고를 저질렀던 것이다. 사고 보고를 접수한 정부측에서는 관계자를 현지에 파견하여 실태 조사를 마친 다음 인명의 피해가 없음이 다행이라 하여 사고에 대한 문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있은 두부터는 이곳 주민들이 이 지역을 「쌀 썩는 여」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다.
안면읍 정당리의 당산에 당집이 있었는데 오늘날 그 당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다만 지금도 그 자리에는 기왓장과 사기그릇 조각이 흩어져 있어서 옛날을 보는 듯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40여 년 전의 일이다. 안면읍은 본래 섬이었기 때문에 산짐승이라고는 아무 것도 살지 않은 고장이었다. 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졌지만 토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호랑이 한 마리 어디선가 나타나서 섬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낮에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지만 밤이면 길을 가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나그네를 업고 달아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자주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마을에까지 나타나서 밤에 변소에 가는 사라들을 물어가기도 하고 부엌에서 늦게 설거지를 하는 아낙네들을 기절시키고 달아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날이 갈수록 호랑이의 행패는 더욱 심하여져서 마을 사람들은 더욱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호랑이를 멀리 몰아낼 수 있을까 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걱정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걱정을 하는 사람은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노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면 늘 이 노인을 찾아가서 의논을 하였다. 그때 만다 노인은 적당한 말을 하여 찾아온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같이 기뻐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이 노인은 마을에서 어른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일만은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고 또한 답답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역시 호랑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담뱃대를 빨다가 한숨을 짓고, 한숨을 쉬다가 담배 연기를 뱉어내고는 곰곰이 생각에 젖어 보았으나 아무런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노인은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 담뱃대를 재떨이에 떨고 있는데, 문득 문 앞에 머리가 하얀 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노인은 묻지 않아도 그들이 산신령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의 말을 들으시오. 앞산 위에 집을 짓고 사기로 만든 말을 세 마리 모시어 두면 우리들 호랑이를 섬 밖으로 몰아내겠으니 그렇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나직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때 노인은 너무나 고마워서 절을 하려고 몸을 구부렸다 펴보니 세 노인은 간 곳 이 없었다. 노인은 알이 새자마자 세 노인이 시키는 대로 즉시 앞산에 올라가 집을 짓고 세 마리의 사기말을 만들어 지은 집에 잘 모시어 두고 내려왔다. 그 이튿날 밤이었다. 노인이 잠이 들었는데 세 노인이 또 나타났다. 노인은 엉겁결에 절부터 하려는데 세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말을 들으시오. 우리가 호랑이를 쫓으려고 말을 몰다가 잘못하여 말 한 마리의 다리가 부러졌으니 내일 황새부리란 곳으로 가보시오 이와 같이 가운데 서 잇는 노인이 그를 굽어보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벌떡 일어나 절을 하고 보니 세 노인은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사기말이 두 마리밖에 없는데 그 말들의 발굽에는 진흙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노인은 그 길로 단숨에 황새부리라고 하는 곳으로 가 보았다. 그 곳에는 정말 사기말 한 마리가 쓰러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다리가 하나 부러져 있었다. 노인은 그 것을 가지고 집을 돌아와서 다리를 잘 고치어 놓았다. 조금은 흠집이 있었지만 그리도 전과 같이 튼튼한 사기말이 되었다. 그는 이 사기말을 다시 당집에 갖다 놓았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안면도에는 다시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고 섬은 잠든 듯이 조용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짐승이라고는 토끼 한 마리도 보기 힘든 곳이 되었다. 오늘날 당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기말도 구경할 수 없었지만 당산은 옛 모습 그래도 의연하다. 어느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일제(日帝)때 일본 관리들이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당집을 헐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당집 터에는 기왓장과 사기그릇의 조각들이 묻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할미바위는 안면읍 승언리에 있는 방포의 남쪽에 우뚝 솟아 바다를 향하고 있는데, 마치 그 모습이 할머니 같이 보인다하여 할미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할미바위뿐만 아니라 맞은 편에 할아매바위에 대해선 그 유래가 전래되지 않고 다만 할미바위에 관한 전설만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다음 같이 기술하여 둔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0여 년 전인 신라(新羅)의 흥덕왕 대였다. 당시 바다를 주름잡고 있던 장보고는 청해진( 淸海鎭=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거점을 정하고 해상 활동을 펴나가는 동시에 서해안의 견승포(안면도)에도 해상 전진기를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면도에 저진기지를 설치한 장보고는, 이 기지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승언(承彦)이라는 사람을 두어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승언은 이와 같이 아름답고 환경 좋은 견승포에 부임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즉 갈매기떼 날아드는 푸르른 바다와 하늘을 찌를 듯한 울창한 산림 그리고 바닷가에 깔려있는 흰모래 등 그 어느 것 하나 하나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승언은 시간이 허용되는 때면 언제나 아름다운 바닷가를 아내인 미도와 함께 곧잘 산책하였다. 이렇게 부부가 산책할 때는 더욱 부부의 정이 깊어갔고, 따라서 마냥 즐겁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승언은 아내를 무척 사라하였다. 철저한 애처가였던 것이다. 또한 승언은 이따금 쉬는 시간을 활용하여 부하들이 바다에서 맛있는 고기라도 잡아오면 꼭 아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승언은 일직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생선을 요리하여 맛있게 먹곤 하였다. 이렇게 사랑을 아끼지 않는 남편을 미도는 무척 기쁘고 흐뭇해하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승언은 무슨 일이든지 아내를 제일 먼저 생각했고 또한 아내를 위해서면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성격을 지니었다. 이같이 승언은 미도를 사랑하고 미도는 남편을 매우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승언은 이와 같이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 일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은 모범적이 충신이었다. 이렇게 나라 일에 몰두해서인지 그가 관할하는 견승포에는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다스려지고 있었다. 승언은 아내를 극진히 사라하고 있는 만큼 부하들도 역시 사랑으로 다스리면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견승포를 다스리던 어느 날 머릴 청해진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그 내용은 "승언은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떨어진다는 것이 끝없이 안타까웠지만 상사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승언은 즉시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평소에 훈련이 잘된 군사들을 매우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견승포에 주둔했던 군선을 이끌고 북쪽으로 떠났다. 이때 미도는 바닷가에 나와 멀리 출정하는 남편과 군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편은 늠름한 모습으로 갑판 위에 올라 아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를 지켜보고 서 있던 아내는 이날 따라 남편이 몹시 미덥게 여겨졌다. 군선은 포구를 뒤에 두고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내 미도는 높은 바위에 올라가 가물가물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군선을 지켜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집에 돌아온 미도는 일찍 느껴보지 못한 쓸쓸함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 미도는 기껏해야 앞뜰을 서성거리다가 방에 들어와선 공상에 잠기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남편의 건강은 어떠한지 내일은 돌아오겠지 이런 생각 등으로 머리 속은 꽉 차 있었다. 이렇게 매일같이 밤낮으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미도의 심정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을 내일 내일하면서 기다린 것이 벌써 수일이 지났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초조하게 매일같이 기다리는 미도의 마음은 불안하기 시작했다. 웬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집안에서만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던 미도는 쏜살같이 바닷가로 뛰어 나갔다. 지난날 남편이 출정할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견승포의 높은 바위에 올라가 사랑하는 부군(父君)이 돌아오는 군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한두 척의 어선만이 지나가고 무심한 갈매기만이 날아들 뿐 끝내 군선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속태우며 초조하게 남편을 기다린지 벌써 2년여가 지나고 말았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남편은 틀림없이 돌아올 것으로 믿고 한결같이 바위 위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날씨와는 아랑곳없이 한 평생을 남편이 돌아오는 군선을 기다리다 마침내 이 바위에서 죽었다. 그 뒤 이 바위는 미도가 남편을 기다리며 멀리 바라보고 서 있는 그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망부석(望夫石)이 된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할미바위라 부르는 것이다. 지금도 이 할미바위는 변함없이 서있어 이 유래를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발길을 멈추고 지난날을 회상하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승언리"라는 명칭도 지난날 승언이라는 사람이 이 곳에서 살았다하여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팔학(八鶴)골은 안면읍 승언리 2구에 있는 속칭 자연부락의 호칭인데, 8개의 야산이 마치 병풍처럼 아늑하게 둘러 있어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한때는 산림이 우거져서 많은 새들이 모여들어 깃들이고 있었는데, 특히 학의 무리가 서식하므로서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학들이 무리를 지어 서식하면서 종족을 번식시키려고 알을 낳아 놓으면 그 알이 채 부화(孵化) 되기도 전에 정체 불명의 산짐승에 위해 깡그리 먹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렇게 수난을 당하고 있는 학들의 처지를 유심히 지켜보며 애처롭게 여겨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마을에 출가하여 상부(喪夫)한 채 홀로 살고 있는 청상과부였다. 그녀의 마음속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가엾은 학의 모습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느날 꿈속에서 헌칠한 키의 백발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정체불명의 괴물로 인하여 학들이 번식하지 못하고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그대가 내일 아침에 주위에 펼쳐있는 8개의 산봉우리에 느릅나무를 각각 한 그루씩 심어주시어." 하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정말 이상한 꿈도 다 있지 하며 곰곰이 생각에 젖어있는데 밖에서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살그머니 열고 밖을 내다보니 이게 웬일일까 커다란 학 한 마리가 머리를 땅에 떨어뜨린 채 문 앞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이 같은 모습을 본 그녀는 학이 너무 애처로워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쏜살간이 맨발로 뛰어나가 학을 덥석 끌어안고 방에 들어오려는 순간 난데없이 천둥소리와 더불어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산에 있는 학들을 생각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이렇게 밤을 지세운 그녀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밖에 나와 산을 바라보니 이게 웬일인가 학들이 쓰러져있지 않은가, 한 걸음으로 달려가 이를 확인해 보니 모두 죽어있는 것이다. 여덟마리의 학이 죽어있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학이 그것도 여덟마리나 죽었으니 그녀의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녀는 우선 죽은 여덟마리의 학을 각각 여덟 개의 산봉우리에 정성껏 묻어주었다. 그리고 현몽한대로 각 봉우리에 느릅나무 한 그루씩 여덟 개를 심었다. 이 느릅나무는 모두 살아서 빨리 자라기 시작하는데, 특히 가시가 무성하게 돋아나며 더욱 울창해져서 숲을 이룰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정체 미상의 괴물로 수난을 당하던 학들이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있는 뒤부터 이곳 마을의 이름을 팔학(八鶴)골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지명(地名)의 호칭에는 반드시 그 연유가 있는 것이다. 이 팔학골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에서 말한 여덟마리의 학과 연관해서 붙여진 것 같다. 그러나 생태학적으로 보아 학(두루미)은 이 지역에서 서식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이는 황새(또는 왜가리)로 오인한 것 같다. 여간한 학이던 황새던 전설은 전설로서 이해하면 오해는 해소될 것이다. 이 팔학골도 이미 산림이 황폐해졌고 또한 학(황새?)의 무리도 서식하지 않으니 이에 따라 지명도 팔학(八鶴)에서 팔악(八岳)동으로 개칭되어 불리워지고 있다.
이 삼봉(三峰)은 안면읍 창기리의 바닷가에 있는 바위를 말함인데, 이 바위가 마치 3개의 산봉우리처럼 생겼다하여 편의상 3봉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봉은 지명(地名)으로 굳어진 채 지금은 해수욕장으로 널리 알려져 여름철이면 국내 각처에서 많은 욕객(浴客)들로 붐비고 있다. 다음은 3봉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옛날 딸만 3자매를 둔 어부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이 부부는 바닷가에 돌살(고기를 잡기위해 바닷가에 돌을 쌓아서 고기를 들게 하는 돌 울. 그런데 돌(石)이 독 (또는 둑)의 와음으로 굳어져 흔히 "독살" "둑살" 등으로 부르고 있다. 지금은 이 독살도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을 쌓고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런데 이 어부는 지독한 구두쇠인 동시에 고집이 세고 또한 악착스러워서 고기를 많이 잡아도 이웃은 물론 친척들도 멸치 새기 한 마리 나누어주는 일이 없으며, 또한 돈을 버는데만 급급할 뿐 제대로 쓰지 않고 땅속에 묻어두고 비밀리에 관리하는 수전노(守錢奴)였다. 이러한 생활이 날로 계속되어 감에 따라 생활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가정불화까지도 일어나 곤 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는 어느 날 부인이 꿈을 꾸니 정체 미상의 험상궂은 괴물이 나타나서 남편이 묻어둔 돈을 꺼내려고 당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이에 깜짝 놀랜 부인은 꿈에서 깨어나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였더니, 그는 놀랜 얼굴 표정을 지으며 허둥지둥 문을 박차고 나가 쏜살같이 돈 묻어둔 곳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돈을 숨겨둔 현장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맑고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삽시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이면서 번개와 더불어 천지를 진동하는 천둥이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두려움 속에서도 어부내외는 돈을 묻어둔 현장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돈을 지키느라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이르러 부부가 돌살에 나가 보니 간밤의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인한 파도에 돌살이 보기 흉하게 거의 다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들 부부에게 있어서 생활의 터전인 돌살이 이렇게 허물어지고 보니 앞으로의 생계가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어 허물어진 돌살을 개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닷물이 밀려오면 개축한 부분이 다 허물어지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허물어진 돌살을 쌓는 것이다. 쌓아 놓으면 허물어지고, 허물어지면 다시 쌓고 이렇게 여러날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사람의 힘도 한계가 있으므로 지칠대로 지쳐서 이 이상 더 버티어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돌살의 개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파도도 치지 않는 조용한 바다인데도 개축한 부분에 바닷물이 닿으면 우수수 허물어지는 것이다.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 였다. 어느날 부인은 생각다못해 남편에게 고사라도 정성껏 지내보자고 간곡히 말하여 보았으나, 고사 준비에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인은 이를 못내 아쉬워했으나, 완강히 거부하는 남편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 같은 일이 있는 뒤부터는 부부의 꿈자리가 몹시 사나워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며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딸 세자매가 갑자기 자리에 누워 앓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아내는 남편이 외출한 틈을 이용하여 목욕재계한 다음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마침 외출했던 남편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고사를 지내려는 현장을 목격한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아내의 머리그덩이를 움켜잡고 마구 구타하는 것이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부인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밖으로 나온 부인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뛰어나온 남편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몽둥이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천지를 진동케하는 요란스런 뇌성벽려고가 더불어 바닷물이 치솟아 오르며 아내를 덮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바로 이때 남편은 돈 묻어둔 곳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돈을 꺼내고 있는 것 같이 보여, 이에 소리를 지르며 갖고 있던 뭉둥이를 휘두르니 이게 웬일인가 삽시간에 앞산이 무너져내려 돈을 감추어 놓은 곳이 흙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어부의 아내도 흙더미 속에 묻히고 말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 어부는 죽은 아내보다도 돈이 묻힌 것이 더욱 안타까와서, 그날부터 야산으로 변해버린 흙더미를 파헤치고 돌을 쪼아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독한 수전노인 이 어부는 메일같이 혼자 이 흙더미를 파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딸들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도어 결국은 손수 밥도 짓고 가사도 돌봐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어부가 꿈을 꾸니 소복을 한 세 여인이 땅속에 묻어둔 자기의 돈을 꺼내 가지고 바닷속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에 깜짝 놀랜 어부는 꿈에서 개어나자 생각할 여유도 없이 황급히 바닷가로 달려갔다. 누가 남의 돈을 훔쳐간다는 말이냐 붙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바닷가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아니면 이미 바다 속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의아심을 가지고 뒤를 살펴보니 산꼭대기에서 꿈속에 나타났던 소복한 세 여인이 손을 흔들며 부르는 것이었다. 부는 단숨에 산 위로 올라가 보니 그 여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의 딸들이었다. 은근히 화가 난 어부는 딸들이 왜 이 산꼭대기에 와 있는지 궁금히 여기지도 않고, 그대로 버려둔 채 혼자 하산하고 말았다. 마침 먼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렇게 한산한 어부는 밤새도록 이곳 저곳을 쏘아 다니다 기진 맥진한 채 주저앉아 서서히 주위를 살펴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편편한 야산이 가파른 세 개의 바위로 우쭉 솟아 있고, 즉 세 개의 바의 봉우리 삼봉(三峰)으로 변했고 또한 돈을 묻어 두었던 장소는 커다란 바위로 덮혀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변이람! 그러나 어부는 끝까지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어 괭이로 바위를 찍어보니 펑 소리와 더불어 큰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에서 보기 흉한 용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나오더니 옆에 서있던 어부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와 같이 삼봉(三峰)이란 아버지를 원망하며 병들어 죽은 세 자매의 무덤이고, 또한 삼봉의 앞에 있던 무덤 모양의 바위산은 아내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위에 뚫린 구멍은 수전노 어부를 데리고 승천한 용이 나온 일명 용난 구멍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후 삼봉해수욕장에서 수영하다 익사하는 사고가 매년 일어난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안면읍에서 서남쪽을 향하여 20여리쯤 가다보면 국사봉이라는 산이 있다. 이산은 원래 수목이 울창하였으며 노루와 사슴이 살았고 산새가 서식하고 기타 약초가 가득한 아름다운 산이었다.
옛날 이 산 중턱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산지기가 있었는데 이 산지기는 당산 중턱에 돌로 제단을 만들어 놓고 매일같이 아침이면 동쪽 산밑 황포(黃浦)에 가서 맑은 물로 목욕하고 그 옹달샘의 청수 한동이를 길어다가 단에 놓고는 기도를 드렸다.
"국태민안하고 사회 연풍하여 못 인간이 잘살게 하소서."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는 기근이 들고 질병이 돌 때마다 이곳에 와서 기도를 드리면 영험하게도 질병과 가뭄이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돌계단도 허물어지고 볼품이 이 없게 되자 사람들은 다시 산신당을 짓고 산신령과 사기말을 모시고는 당주로 하여금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제를 성대히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주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숲 속에서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서 당주 옆에 와서는 무서워하지도 않고 앉아 있어서 당주가 먹을 것을 주었다. 그 후 이 사삼은 날마다 나타 당주와 친구가 되다싶히 친해졌으며 말을 서로 통하지 않아도 눈빛과 몸짓으로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당주는 사슴이 하루라도 안 오면 궁금해했다.
"어제는 네가 안 와서 궁금했단다. 어디 갔었니?"
"뭘하구 숲 곳에서 지냈느냐?"
당주는 사슴을 만나면 친구와 이야기하듯 중얼거리곤 했다.
이렇게 당주와 사슴이 친구가 되어 지낸지도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당주는 기도시간이 되어 밤에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사슴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사슴이 와 있었다. 사슴은 문을 역기가 바쁘게 방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눈빛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당주는 이 사슴이 어떤 위험에 빠져 있다고 직감하고 방문 틈으로 밖을 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눈에 불을 켜고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주는 무섭고 떨려 몸을 도사리다가 마침 화롯불이 괄게 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하롯불을 들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이놈 물러가라"
이 뜻하지 않은 불의의 습격을 받은 호랑이는 "어흥"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 달아났다.
당주와 사슴은 안심을 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아주 언짢은 얼굴로 당주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호랑이를 쫓아가다가 사기점골 뒷산 바위에 말의 다리가 부러졌으니 그대는 지금 당장 가서 다리를 찾아오너라"
하는 것이었다. 당주가 잠에서 깨어나 급히 사기점골 뒷산 바위 밑에 가보니 거기 사기말 다리가 하나 있었다. 당주는 그 다리를 원상태로 해놓고 집에 와보니 사슴이 없었다.
"사슴아 어디 있니?"
"이제 호랑이도 갔으니 무서워 말고 나오너라"
그래도 사슴이 안 나타났다. 이상이 여긴 당주가 불을 켜고 보니 방안에는 뿔이 빠져 있었는데 사슴의 몸둥이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구나, 그렇다면 이 사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당주는 수수께기 같은 사실에 의구심을 품은 채 살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해, 이 마을에는 심한 흉년이 들었다.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논과
밭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초목이 시들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칡뿌리와 물고기로 연명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질병까지 들었다.
마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봐"
"산신령이 노하셨나?"
"그 동안 우리가 산신제 지내는 것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야."
마을 사람들이 시름에 쌓여 있던 어느 날, 당주는 다시 꿈을 꾸었다. 그리고는 꿈에 늙은 중을 만났다.
늙은 중은 당주를 나무래듯 말했다.
"그 동안 당신들은 산신제 지내는 것을 너무 소홀히 했소. 보다못해 내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려 왔소."
"어떻게 하면 이 고해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늙은 중은 당산(堂山)을 가리키며 저 당산에 극진히 지서를 드리면 가뭄과 질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만일 당산에 제를 올리고 이 지방 가뭄이 끝나고 질병이 물러가면 그때부터 저 산을「국사봉」이라 부르시오. 꼭 그래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 늙은 중은 다시 사라졌다. 당주는 마을 사람들을 다 모이게 하여 다시 당산에 천신을 모시고 청수를 떠다 제를 지냈다. 그랬더니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연 3일간을 내려 가뭄이 끝나고 농작물이 소생했으며 유행병도 사라졌다.
얼마 후 꿈에 나타난 그 노승이 다시 나타나 국사봉을 가르키며 「앞으로 복된 마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는데 그래서 인지 이 지방은 비옥한 땅과 바다의 자원이 늘 풍부했다.
이때부터 이 산을「국사봉」이라 했다 한다.
안면읍 황도리에는 해마다 정초가 되면 당제를 지낸다. 이 당제는 풍어와 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인데 우리 나라 해안지방에서는 흔히 행해지는 민속이다.
안면읍 황도리의 당제는 뱀의 신을 모셨다는 사당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다른 지방에 없는 뱀의 신을 모시고 제사한다는 것이 색다르다.
당주는 음력 12월 15일부터 당제 준비를 위한 대동회에서 선정된 사람으로 이 사람은 당제가 시작되는 다음 해 1월 2일까지는 부정한 것을 보아서도 안되고 또 부정한 짓을 해서도 안된다. 만일 부정한 것을 해서도 안된다. 만일 부정한 것을 본다든가 하면 당주로서의 자격이 상실되며 이 사람이 당제를 지내면 호가 된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제를 무사히 지내고 나서도 일년 내내 대문에 금줄을 뛰우고 부정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한 사람이 당에 들어오면 신이 노하여 화를 입고 동네에 재난이 들고 매사에 화가 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금기가 많이 있지만 생략하고 황도리의 당제가 생기기까지의 전설을 옮긴다.
오랜 옛날, 이 황도리에는 나주정씨와 해주오씨가 거주하면서 이 섬에 사람의 집이 생기게 됐다.
두 씨족은 이곳에 정착하기로 학 생계의 수단으로 고기잡이를 하게 됐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배가 없었고 낚시나 그물도 없었다. 이 같은 어구를 만들기 위하여 두 씨족은 무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조그마한 배와 낚시도구를 구하여 첫 출어에 나섰다. 부푼 기대와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첫 번 추어부터 이들에게는 시련이 따랐다. 만선의 꿈도 산산히 깨어진 것이다. 그것은 낚시를 하기도 전에 애써 만든 배만 잃어버리고 슬픈 일만 당하고 만 것이다.
처음 배가 나갈 때는 날씨도 좋았고 바다도 잔잔했는데 낚싯대를 물에 던지려는 순간부터 풍랑이 심하여 배까지 잃게 된 것이다.
"다시 배를 만들세."
"조금 더 크게 만듭시다."
하지만 배가 더 크고 튼튼했지만 여전히 조업을 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 배만 떳다하며 집채같은 파도가 덤벼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황도의 주민들은 생계 마져 이어가기가 곤란하게 되었고 그곳을 떠나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바다로 나갔다. 선원들은 오늘은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막 낚싯대를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배 앞을 빠르게 지나가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큰 이무기였다. 이무기는 큰 꼬리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뱀이다!"
"뱀의 농간이다!"
어부들의 머리 속에는 지금까지 조업을 방해한 것이 바다뱀이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이 날도 그 들은 빈배를 이끌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 밤 이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이 꿈속에서 역시 노인을 만났다. 흰 수염을 길게 한 꿈속의 노인은 마을의 노인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바다에 사는 뱀들의 왕이라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왔소."
"뱀의 왕이라니오, 용왕이란 소리는 들었소만 처음 듣는 말이구려, 그런데 할말이란게 무엇이오.?"
"당신들 사람이 아무리 고기잡이를 하려 해도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모두 헛수고요, 내 그것을 알리러 왔소."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풍랑이 일었는데 모두 당신들의 장난이었소?"
"그렇소."
"그렇담 우리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렇소. 그런데 당을 짓고 이것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가만히 있겠소."
"그렇소."
"그렇담 우리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간단하오. 이 섬 꼭대기에 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가만히 있겠소."
"당제를 지내라는 말이군요?"
"그렇소. 그런데 당을 짓고 이것을 걸어놓고 그 앞에서 제를 올리시오."
자칭, 뱀의 임금이라는 노인은 소매주머니에서 백지를 꺼내 마을 노인에게 주었다. 마을 노인이 백지를 펴보니 거기에는 큰 뱀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을 노인은 그 뱀의 그림을 품속에 간직했다.
"그럼 난 이만 가겠소."
뱀의 왕이 사라지고 난 뒤 마을 노인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행여나 하여 품속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꿈에 뱀의 왕이 준 그림을 찾아냈다. 꿈에서 본 그대로의 그림이 자기의 품속에 있었다.
"이상한 일인지고!"
"뱀의 왕이 다 있어!"
노인은 신기롭고 괴이한 일에 아직도 꿈속에 헤매고 있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 노인은 동네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모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하고 꿈에 받은 뱀의 그림을 보이면서 당을 짓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예사 꿈이 아니니 뱀 왕의 말대로 당을 지어야 하겠소."
동네 사람들은 누구하나 이의가 없었다. 이의를 제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고기잡이에 있어 우선 해야할 일이라는데는 자진하여 당을 짓는 일에 헌신할 처지였다.
여러 날이 걸려 당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뱀의 그림을 걸어놓고 첫 번 당제를 올렸다. 그날은 온 동네가 축제의 분위기에 휩쌓였다.
그 후로는 어부들은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 바다에는 고기가 풍성했고 조업을 하는데 방해되는 자연적인 조건은 거의 없었다. 풍랑도 사라지고 안개와 비도 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뱀의 와이 보살펴 준 덕이라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세상은 자꾸 변하고 있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고깃배도 크고 낚시도구도 옛날에 비할 바가 안될 만큼 발전했다.
학문도 크고 과학문명이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미신타파를 외치고 그릇된 풍속을 고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었다 그와 같은 세태는 홍도마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뭍에 나가 천자문을 배우고 학문을 읽히는 동안 그들에게는 문명이 무엇인가를 터득하게 되었다. 머리가 깬 이들에게는 문명이 무엇인가를 터득하게 되었다. 머리가 깬 이들에게는 도대체 뱀의 그림이니 당제니 뱀의 왕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의적이었다.
어느 날, 젊은이들 몇이서 사랑방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제 이야기로 화제가 바꾸어졌다. 이들은 옛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듯이 당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 같은 허무맹랑한 말이 어디 있소.?"
"누가 아니래, 뱀의 왕이 어디가 있다는 거여."
"우리 그 뱀의 그림을 불살라버릴까?"
"좋아"
젊은이들은 밤에 이용하여 당을 찾아갔다. 당 안은 컴컴하여 으시시하기까지 했다. 부싯돌을 켜 불을 밝혀 뱀의 그림을 찾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꼭 큰 죄를 짓는 마음이었다. 조금은 겁도 났다. 금방이라도 뱀의 왕이 나타나 어떻게 할 것 같은 생각에 머리끝이 솟았다.
"망서리지 말고 태우자"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청년들도 용기가 났다. 그리고는 다시 부싯돌을 켜 불을 붙였다. 뱀이 그려 있는 종이는 쉽게 타들어 갔다. 문 창호지에 그린 것이기 때문에 창호지는 불에 약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종이는 다 탔는데 뱀의 형상만은 타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태워보자"
그들은 부싯돌로 다시 불을 붙여보았으나 뱀의 형상만은 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예사 그림이 아니고 옛날 꿈에 정말로 뱀의 왕이 나타났던 것일까?"
청년들은 이 수수께기 같은 사실에 마음에 의문을 가득 채운 채, 사당을 내려 왔다. 이 사실은 나중에야 안 마을사람들은 그 그림에 영험이 있어 타지 않았다. 고 주장하는가하면 그 그림의 자료가, 그러니까 물감이 타지 않는 것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양론으로 시시비비가 있었지만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이 때부터 황도리의 당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오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제사의식도 변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우리 고장의 지명은 모두가 어떤 사건이나 사연에 의해 지어진 느낌이다. 안면읍 승언리 2구만 해도 옛 지명이 도여(道呂)라 했는데 이는 그곳에 도를 닦던 승려가 살았던 때문이요, 창기리 1구는 회목(檜木)이라 했는데 이는 회나무가 많았던 때문이다.
오랜 옛날, 이 도여에서 회목가지 갈려면 고갯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이 길은 무척 험하고 무서운 고개였다. 지금은 넓은 농록 뚫려 있어 차도 다니고 경운기도 다녀 고개를 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옛날에는 그게 아니었다. 고갯길에 빽빽히 늘어선 회목나무 숲에서는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나올 것 같고 사나운 짐승이 달려들 것 같은 길이었다. 거기다가 고개 중턱에는 도둑이 살고 있었는데 이 도둑은 지나가는 행인을 괴롭혔다. 이 도둑은 복면을 하고 칼을 휘둘러 금품을 빼앗고 반항하면 목숨까지 빼앗는 강도였는데 이 강도가 어찌나 바른지 관아에서도 어쩔 수 없는 포악한 자였다.
특히 이 강도는 스님들이 시주 받아오는 물품까지도 빼앗고 괴롭혀서 도여에 살던 스님들은 하나 둘 이곳을 떠나고 사찰에는 한 사람의 승려만이 남았으나 이 승려 마져 이곳을 떠나고 사찰에는 한 승려만이 남았으나 이 승려 마져 이곳을 떠나 것을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
이즈음, 어느 사별하고 어린 딸과 함께 살았는데 마을 서 번민이와 속세를 떠나 중이 되려고 도여로 가고 있었다. 도여에는 사찰이 있고 중들이 있어서 거기 가면 승려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이 삶이 회목을 거쳐 도여로 가는 고갯길에 이르렀다. 고갯길은 듣던 말대로 험준했다. 가마귀가 울고 산짐승의 울부짖음이 섬짓했다. 금방이라도 도개비가 나타날 것 같은 음침한 길이었다.
그 대, 회나무 숲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까마귀가 슬피 우는가 하면 구렁이 울음가지 애절하게 들려왔다. 이 사람은 무서운 중에도 호기심에 끌려 구렁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숲으로 갔다. 그리곤 무서운 장면을 목격했다. 거기에는 도승이 목이 졸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이 도승은 도여에 남아 있던 마지막 승려로 도여를 떠나던 참이었다.
그 사람은 도승의 가슴에 손을 넣어보니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었으나 살아날 가망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다시 나타났다. 죽어 가는 도승의 손에 그 때까지 지팡이가 쥐여져 있었는데 갑자기 이 지팡이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큰 구렁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 그리고 이 도승은 누구에게 이런 변을 당했을까?"
중이 되겠다고 길 가던 사람은 이 뜻하지 않은 일에 정신이 몽롱하고 다리가 떨려왔다. 이런 중에 구렁이는 그 사람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 따라오라는 거로구나"
그 사람은 무서움을 가까스로 참으며 구렁이를 따라가 보니 그 구렁이는 산 속에 숨어 있는 털보 한사람을 발견하고 달려들어 목을 칭칭 감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가만히 보니 털보 옆에 보따리가 있었는데 비단과 동전들이 들어 있었다.
"이 털보가 강도였구나, 그리고 도승의 지팡이가 구렁이로 변하여 복수를 하고 있는 게야!"
그 사람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구렁이는 털보를 죽이더니 다시 지팡이로 변하는 것이었다.
" 천벌을 받은 거야!"
그 사람은 비단과 동전과 지팡이를 도승이 죽은 곳으로 와서 그 물건들과 함께 도승을 장사했다. 도승을 장사지내고 그 사람은 도여에 가서 승려가 되어 도를 닦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도승이 죽은 계곡을「중죽은골(중죽골)」이라 했으며 구렁이가 강도를 잡은 고개라 하여「구렁재」라 불렀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구렁재에는 도둑이 없어져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한다.
안면읍 창기리 3구, 이곳은 우리 고장 곡창지대 중의 하나이다. 땅이 비옥하고 건하지 않아서 농작물이 잘 된다. 이 곳을「용천골」이니「쌍생골」이니 하고 부르는 사연이 있다.
오랜 옛날 이곳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이들 부부의 정이 식어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해마다 흉년이 겹치니 생활고 또한 말이 아니었다.
이럴 즈음 부인이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괴물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머리는 용의 형상이요 몸둥이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너희 집 논 가운데 있는 바위를 캐어내라. 그리하며 가뭄도 끝나고 또 너희 집에 자식도 태어나리라."
이튿날, 남편과 함께 그 바위를 뽑아냈는데, 그 자리에서 물이 용솟음치며 솟아나고 있었다. 그 물줄기가 얼마나 컸던지 그 동네 논에 물이 흥건히 고이고 농작물에 도움을 주어 풍년을 이루었다. 오랜 가뭄 끝에 얻은 물로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렇게 바위를 뽑아 샘을 만든 후 이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는데 열 달 후 딸 쌍둥이를 낳았다. 자식이 없던 이들 부부에게는 아들이 아닌 것이 서운했지만 딸을 한꺼번에 얻은 기쁨이 컸다. 동네 사람들도 이들 부부에게 축하인사를 쉬지 않았는데 호사다마인지 부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 게요?"
"모르겠어요, 뚜렷이 아픈데도 없는데 기운이 없고 몸이 마르네요."
" 이상하지 않소, 뚜렷한 병도 아닌데 당신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 모를 일이구려."
그러나 부인에게는 큰 마음고생이 생겼다. 그것은 밤만 되면 꿈에 나타나는 험상 굿은 요의 모습이 때문이었다.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용은 꿈마다 나타나 이런 말로 부인을 괴롭혔다.
"왜 나를 못살게 하느냐!"
"왜 나를 괴롭히느냐!"
이렇게 부르짖으며 부인에게 달려들다가 가버리곤 했다. 이렇게 꿈속에서 용에게 시달리던 부인은 끝내 죽고 말았다. 남편은 쌍둥이 딸을 젖동냥으로 키웠는데 딸들은 튼튼하고 예쁘게 자라 어느새 처녀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벌어졌다. 그것을 밤만 되면 우물 속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인이 울음이었다. 그 후부터 샘물이 마르고 가뭄이 들었는데 그 곳 들이 메말라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식수까지 부족하여 동네 사람들은 옛날처럼 다시 한재와 싸워야 했다.
이렇게 괴로운 나날 속에 또 이들은 괴롭히는 것은 밤마다 우물에서 들려오는 쌍둥이 어머니의 울음이었다. 이렇게 되자 남편마져 몸져눕게 됐는데 큰딸이 아버지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그날 밤 남편이 꿈을 꾸니 험상 굿은 용이 부인의 허리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큰딸이 없어 밖에 나가보니 용이 소복한 딸을 입에 물고 가는 것이었다. 이에 아버지는 화가 나서 용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아 내 딸을 놓고 가거라"
"내 딸을 놓고 가거라"
남편이 고래고래 소리치니 나르던 용이 우물로 뚝 떨어졌다. 그러나 큰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용이 떨어진 우물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후, 작은딸이 밤에 우물을 보니 언니가 소복하고 밤마다 우는 것이었다. 작은딸은 이 같은 사실을 아버지께 말했다.
이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그 다음날 우물을 메워버렸다. 그러자 밤만 되면 큰딸이 아버지에게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우리 집 옆에 있는 논 가운데 큰 바위가 있지요 그것을 빼내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승천할 수가 있어요,"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여러 날 동안 큰딸이 사정하자 아버지는 논에 있는 바위를 빼냈다. 그러자 바위 밑으로 큰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그 구멍에서는 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제는 딸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별일이 없겠지 하고 안심하고 있는데 큰딸이 다시 나타나 또 다른 사정을 말했다.
"바위가 빠진 자리에 물이 나와야 하는데 물이 나올 때까지 동생이 매일 나가 기도하게 해주세요"
하는 수없이 동생은 매일 밤 우물에 가서 기도를 했는데 여러 날이 되자 우물에서 물이 나왔다. 그 날밤, 아버지가 다시 꿈을 꾸니 큰딸이 웃으며 승천하는 것이었다. 어버지는 밖에 나가 승천하는 딸을 보는데 그 험상궂은 용이 새로 뚫린 우물에 나타나 두 딸을 한꺼번에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용이 나온 샘이라 하여「용천(龍泉)골」이라 불렀고 또 용이 이쪽 샘에서 저쪽 샘으로 옮겼다하여「쌍생골」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름이 오늘가지 전해진다.
안면읍 창기리1구, 이 마을은 옛부터 땅이 비옥하고 사철 물이 끊이지 않아 농사짓기에 좋은 곳이며 산림이 창창하여 기후가 좋은 곳이다.
이 마을 중앙에 위치한 큰 농토는 해마다 수천석의 곡식을 추수하는데 이 들녘을 이름하여「말운들」이라 부른다. 이 말운들 동쪽에 위치한 국사봉 산맥을 따라 조금 내려와 지씨(池氏)의 선조가 안치된 산소가 있는데 이야기는 비롯된다.
이 지씨댁 선조 묘는 와우형명당(臥牛形明堂)으로 이름이 났는데 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모두 이 명당을 극구 감탄한다고 한다.
고려 말엽, 조정에는 지정승(池政丞)이라는 분이 국사를 다스렸는데 평소 덕망이 있고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정사에 소홀함이 없어 왕의 신임을 받던 정승이었다.
어느날 지정승이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웬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대감께 필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저의 집으로 갑시다"
지정승은 스님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저녁밥을 같이 먹으며 물었다.
"하고싶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예, 다름아니오라 정승댁 선산이 있는 안면소(安眠所)(안면도) 땅은 명당이 아닙니다. 그곳에 오래 조상을 모시면 후손에게 큰 화가 닥쳐오는데 역적의 누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지정승은 지금까지 자손에게 영화가 있는 산소를 좋게만 생각해 왔는데 뜻하지 않은 스님의 소리에 의아해 하면서도 물었다.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방법이라면?"
"예, 산소에다 들기름을 펄펄 끓여 부으십시오. 그리하면 액은 면할 수가 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지정승이 생각하니 난감했다. 지금껏 탈없이 지낸 가문인데 느닷없이 중이 나타나 던지고 간 말은 마음에 짓눌렀다.
싫은 소리는 듣지 않으면 약이요 들으면 병이라는 말처럼 지정승은 며칠동안 스님의 말에 마음을 쓰다가 만일에 후손에게 불행이라도 닥칠까봐 중이 시키는 대로했다. 정승은 하인 한 사람을 데리고 끓는 들기름을 가지고 산소로 갔다.
"이 끓는 기름을 묘 위에 부어라."
하인이 정승께서 시키는 대로하자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듯 큰 소리가 삼봉산에서 올리더니 중턱에 굴이 생기면서 백색용마가 나와 들판을 나르며 우는 것이 아닌가. 이 괴이한 일이 벌어지자 정승은 크게 위우쳤다.
용마는 사흘 동안 들 위서 울더니 마침내 기진하여 자기가 나온 동굴 근처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국사봉 천신 할미가 흰죽을 쑤어 용마에게 먹이고 소생을 시켜 보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다. 지금도 용마가 나왔다는 굴의 벽에는 그 때 흰죽이 묻은 자리가 하얗게 남아 있다.
그 후부터 이들은 울었다 하여「말운들」이라 부렀으면, 세월이 변하면서 원어도 변하여 지금은「마루뜰」이라 불러지고 있다.
안면읍 정당리(正堂里)에「닥재」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당이 있어 당산(堂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당을 짓게 된 사연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이라고는 하나 그 연대는 전설 속에 감추어진 옛날이야기다.
어느날, 안면도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가 나타나 소를 잡아먹고 집짐승을 해치는가 하면 사람까지 해코지했다.
산림이(소나무)무성하여 호랑이가 나올 것 같은 안면도 였지만 그 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호랑이가 나타났으니 동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 괴변이야"
"범이 나타났다는 것이 천신이 노했다는 얘기야, 하늘에 제사라도 지내야 되는게 아니야?"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이 마을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는데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 다섯분의 노인이 나타나 마을의 촌장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사라졌다.
"범을 물리치려면 이 마을 뒷산에 당(堂)을 짓게, 그리고 사기(沙器)로 다섯 마리 중 한 마리가 호랑이와 싸우다가 다리를 다쳐 지금「황새부리」에서 꼼짝 못하고 있으니 데려오게."
하고는 사라졌다. 촌장은 아침 일찍 당에 가보니 사기말 네 마리만 있었는데 온몸이 흙투성가 되었어 어디 가서 뒹굴다 온 것 같았다. 촌장은 이 사기말들 이 호랑이와 싸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 황새부리에 가보니 과연 거기 사당에 모셨는데 그 후로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사람들은 당을 세운 그곳을 당재라 하였는데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다만 그 터이에서 기왓장과 주춧돌이 발견되고 있어 그곳에 당이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 당은 일제시대 왜놈들이 미신이라 하여 허물었다는데 옛 문헌에 안면도에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말과 연관된 전설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된 때문인지 이곳은 정당리·장당리(長當里)·장뗑이·당말림·당마을 또는 당재라 불렀고 지금은 「닥재」라 변형된 이름을 부르고 있다.
안면읍에서 서쪽으로 약 1㎞쯤 가면 「젓개」라는 포구에 이르게 된다.
이 젓개에는 어선들이 많이 드나들고 해녀들도 이곳에 많이 있는데 젓개 앞 바다에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고기들이 많이 잡히고 전복과 해삼이 많아 해녀들의 물질하는 모습이 장관이 이룬다.
이 포구를「젓개」라 이름지어진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 비롯된다.
옛날 젓개 해안에는 절이 한 채 있었다. 이 절은 저 유명한 무학대사가 살면서 도를 닦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절 앞을 지나는 배는 좌초하게 된다. 그것은 젓개 해안에는 물살이 세고 거친 바위가 물 속에 잠겨 있어 그곳을 피해서 배가 들어와야 하는데 고기배들은 이같은 사살을 알면서도 그곳을 지나가다 변을 당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아보니 무학대사가 있는 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고 그 불빛이 이상한 마력을 지녔던지 배가 이끌려 가는 것이다. 바로 그 절 앞에는 암초가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배가 좌초하게 된 것이다. 뱃사람들은 무학대사가 있는 절 앞에 이르면 그 불빛이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로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뱃사공의 의도와는 달리 노를 그쪽으로 저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 이상한 일이야"
" 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예사 불빛이 아닌가"
"하지만 유명한 스님이 (대사)계신 절인데 이상한 불빛이라 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무학에게 말했다.
뒤늦게 이를 안 무학은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하겠소. 절을 옮기라는 부처의 뜻인가 보오"
이렇게 말하고는 절을 부석면 간월돌 옮겼다는 것이다. 이 후로는 난파선이 사라지고 배들이 무사히 포구로 돌아오게 됐는데 사람들은 젓개에 절이 있으면 안되는 곳이기에 절을 옮기라는 뜻이라 생각했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에 있었다하여「절개」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이 되어「젓개」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이 되어「젓개」라 됐다고 한다.
지금은 그 절터가 남아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전해지는 말로는 해안에 기왓장이 발견되어 절의 잔해가 아닌가 했다는데 그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지금도 젓개에는 만선의 어선들이 풍어가를 부르며 드나들고 해녀들의 휘파람소리가 갈매기 노래와 섞어여 수면을 맴돌고 있다.
안면읍 창기리 5구 , 이곳은 삼봉바위가 있고 그 건너편으로 남면의 곰섬이 바라보이며 동북쪽으로 하얀 모래밭이 펼쳐져 있어 그림 같은 마을이다.
그런데 창기리 앞 바다에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사나운「녀」가 있는데 그 곳 수심은 명주실타래 하나를 다 풀어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물살이 세고 깊어 이곳을 지나는 범선은 파선하기가 일쑤였는데 언제부터인지 이곳을 지나려면 명주실에 바늘을 꿰매가지고 이고에 던지고 가야 파선을 면할 수 있다 하여 모든 선박들은 그대로 하고야 지나갈 수가 있었다.
어느날, 젊은 신부가 이것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 신부는 이 같은 규칙을 몰랏던지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일더니 신부가 타고 있던 배를 삼키고 말았다.
그런데, 신부가 빠져 죽은 그「녀」에는 없던 바위가 우뚝 섰는데 사람들은 신부의 혼이 깃든 바위라 해서 이 바위를「각시바위」라 이름하였으며 그「녀」를「각시녀」라고 부렀다 한다.
오늘날에는 배가 크고 기계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배가 위험하지 않으며 또 실타래에 바늘을 꿰매는 일도 없지만 옛날에는 그랬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