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태안읍사무소의 정문 입구 왼쪽에 많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니 그 중에는 군수송관화(郡守 宋觀和)의 선정비(善政碑)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송군수는 문벌이 높은 재상가(宰相家)의 아들로서 일찍 15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태안 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송군수는 부임 직전에 출발 인사를 하기 위해 외삼촌인 최판서(崔判書)댁을 찾았던 것이다.
이때 최판서는 어린 조카가 군수로 부임하는 것을 매우 대견스런 일이나, 너무 어린 나이이므로 노파심에서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몇 가지 심득 사항을 익히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이에 송관화는 자기가 데리고 간 하인을 불러 엽전(葉錢)5푼을 주며 장터에 가서 짚신 한 켤레, 비 한자루, 배(梨) 하나를 사오라고 하니 최판서는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속히 더 나라고 하였다.
그가 떠난 뒤에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짚신과 비와 배를 사오게 한 이유와 또한 이를 보고 속히 떠날고 한 뜻이 무엇이냐고 최판서에 물으니 최판서는 말하기를 그놈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목민관 노릇을 제법 잘 할 것인데, 내가 괜히 실수를 하였다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또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최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짚신은 자신의 앞길이나 잘 밟아나갈 것이지 남의 앞길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고 비는 자신의 앞이나 깨끗이 쓸라는 뜻이며, 또한 배는 남의상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간섭하지 말라는 비유인 것이니, 결국 나는 조카한테 창피를 당한 것이라 말하였다.
그 후 태안 군수에 취임한 송관화는 공무에는 열중하지 않고 매일 사냥이나 아니면 제기 차기로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이를 보는 관속(官屬)들은 철모르는 어린 군수를 깔보고 모든 일들을 저희들 마음대로 처리하고 따라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실태를 지켜보고 있던 송군수는 어느날 갑자기 안면도 백사장으로 고기잡이 구경을 가자고 하며 관속들을 데리고 사락정(思樂亭=지금의 차부 근처) 앞에 이르러 이방(吏房)을 불러 놓고 「저 밭에 가서 수수대 하나를 꺾어 오라」하니 이방은 속으로 아기 군수가 또 무슨 장난을 하려고 그러는가 하고 , 밭에 가서 수수대를 하나 꺽어다 주니 송군수는 이방에게 이 수수대가 꺾어지지 않도록 소매 속에 넣어보라고 하였다.
이에 이방은 매우 오만한 태도로 긴 수수대를 꺾지 않고 어떻게 소매 속에 넣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니,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숙한 태도로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던 것이다.
듣거라 육방관속(六方 官屬)들아!!
이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성장한 수수대도 꺾지 않고는 소매 속에 넣을 수 없거늘, 하물며 15년의 긴 세월 동안 서울의 재상가에서 성장한 태안의 성주(城主)인데, 너희들 소매 속에 넣고 또한 백성 다루기를 함부로 하는가, 명령을 내리니 3일 이내에 질그릇으로 만든 갓 10개와 , 굽의 높이가 한 자가 넘는 나막신 10켤레를 만들어 오라고 호령한 것이다.
지금까지 철모르는 아기 군수로 여겨오던 이속(吏屬)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비범한 인물임을 깨닫고 놀래는 한편, 지금까지 자신들의 그 무례하였던 행동을 반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며칠 뒤에 질갓과 굽 높은 나막신이 준비되어 들어오니, 동헌(東軒)뜰에 늘어놓고 육방 관속들을 집합시킨 뒤에, 송군수는 듣거라 너희들이 지금까지 관청 출입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너희들이 키가 작고 갓이 가벼워서 꾸부릴 줄을 모르니 이제부터 이 나막신과 이 갓을 쓰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이니 명령대로 실행하라고 하였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비범한 인물임을 깨달은 이 속들은 놀라서 지난날의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동헌 뜰에 엎드려 밤새도록 사죄하였다.
옛날(朝鮮朝)의 이 속들은 언제나 군수 앞에서는 상반신을 구부리는 것인데, 어린 군수라 깔보고 이를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송군수는 재임 기간 군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뒤에 군민들이 그 업적을 기리어 태안읍 동문리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었는데 최근에 이를 현재의 태안읍 사무소 앞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극히 최근까지도 태안에서는 윗사람에게 머리 숙일 줄 모르면 저 사람은 질 갓 씌워야 되겠다는 말이 유행되었던 것이다.
이 백화산은 태안읍 동문리(泰安邑 同門痢 )에 우뚝 솟은 해발 284미터의 진산(鎭山)이다.
산 전체가 흰 돌(白石)로 덮여있어 그 모양이 괴이하여, 봄이면 마치 부용화(芙蓉花) 같기도 하고, 또한 가을이면 돌 꽃이 활짝 핀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즉 백화(百花)가 난만한 느낌을 주는데, 이 백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조(朝鮮朝)500년간 태안에서 과거(科擧)에 급제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백화산이 만약 흑화산(黑華山)으로 변모할 때는 이 태안에서 문만무천(文萬武千)이 난다고 전하여 내려왔는데, 다행히도 일제말엽(日帝 末葉)에 들어와 소나무가 울창해져 산을 덮었으므로 태안 사람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구에 해방과 더불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도벌과 남벌로 인하여 흑화산이 다시 백화산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태안에서는 출세한 사람이 없다고 전하여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자연보호와 더불어 치산 녹화 운동이 전개되어 다시 흑화산으로 변모해 가니 앞으로 기대할 만 하다.
이 황정 마을은 태안읍 평천리 3구에 있는 자연 부락 명칭인데, 마음이 말로 줄어들어 속칭 황정말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마을에서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많은 성씨(姓氏)중에서도 특히 황씨와 정씨들이 돋보였다.
이들은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이 같은 생활 수준이 비슷해서인지 이들은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또한 이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좋은 일을 많이 하므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심 좋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이들 사이를 무척 부러워하며 존경해왔다.
그러나 친형제보다도 가까이 지내던 이들 사이에 갑자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물어져 가는 이들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이좋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돌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듯이 정말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제각기 뒤에서 수군거리며, 마을 사람들은 이전과 같이 그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황부자 정부자 라고만 부를 뿐이었다.
그렇게 사이가 좋던 그들이 갑자기 나빠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들 두 부자는 각기 자녀들이 많이 두었는데, 특히 황부자의 아들과 정부자의 딸이 서로 눈이 맞아 깊은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들은 하루만 않아도 병이 날 정도로 강도 높은 열애(熱愛)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장차 결혼을 약속하고 양가 부모님의 승낙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결혼만은 안 된다면 양가가 모드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결혼 문제가 화근(禍根)이 되어 이들은 서로 반목(反目)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반목이 깊어 갈수록 이들 남녀는 오히려 부모의 의사와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더욱 사랑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부모의 승낙을 받지 못하자, 이들 주 남녀는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병이 악화되어 정씨의 딸이 먼저 죽고 그 뒤를 이어 황씨의 아들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로 내력을 알고 이해를 하며 사이좋게 지내다 보면 흔히 사돈(査頓)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 두 부자는 그렇지 못했다.
이들 두 부자는 사랑하는 아들 딸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면서 다시 만나 전과 같이 사이좋게 살아갈 것을 굳게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간 이 주 부자는 깊이 깨닫고 결심한 나머지 개심하여 더욱 사이좋게 지내면서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는 가 하면 논밭이 없는 사람들에게 는 논밭을 떼어주는 등 부락민을 위해 최대의 봉사를 하였다.
부락 주민들을 위해 이렇게 사심 없이 봉사를 하는 이들 두 부자에 대하여 주민들은 그져 고마웁고 머리를 숙여 진심으로 존경할 뿐이었다.
이들 황씨와 정씨의 두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부락 주민들을 위해 최선의 봉사를 하면서 장수하다 이 세상을 하직하니,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생전이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황정마을이라 부르게 한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황정 마을의 마을이 줄어들어서「말」로 되어 통칭항정말로 불리워지는 이다.
이 파명당의 자리는 현재 태안군 도내리( 泰安邑 島內里)1구 53번지의 집터를 말하는 것이다.
파명당(破明堂)이란 글자 그대로 명장을 파했다는 뜻이다. 즉 명당의 효력이 없어졌다는 말인데, 본래 명당이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서 말하는 썩 좋은 자리로써 이곳에 묘를 쓰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자리이다.
이와 같이 도내리 1구에는 비록 지관(地官)이 아닌 일반인(一般人)이 보더라도 묘자리로서 썩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는 명당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노쇠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탐낼 수 있는 자리였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탐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같이 좋은 명당 자리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 효력을 상실하였으니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때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먼 옛날 이곳 도내리 마을 에 아들만 형제를 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 형제 중형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격이 까다로와 붙임성이 없고 고집이 세서 항상 말썽꾸러기였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말썽을 부리던 형은 성장한 뒤에도 성격은 여전히 난폭해서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또한 형은 집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부지런히 일하기는커녕「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릴 정도」로 한창 바쁜 농번기에도 집을 빈둥거리는가 하면 시비를 길어 남을 때려주기 일수였다.
그런가 하면 남의 집 물건 훔쳐오기 예사이며, 또 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키면 오히려 주인을 구타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나뿐 짓만 골라서 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즉 불량배로서의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이같이 본래 말썽꾸러기로 자란 아들이니 성장해서도 부모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불효 막심한 자식이었다.
이로 인하여 부모님의 교훈을 받아들 일리 없었다. 불효 막심한 자식이었다.
이로 인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한시라도 편안할 날이 없었고, 심지어 울화병으로 자리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러나 동생은 형과는 달리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깍듯이 예의 범절을 지키는가 하면 동료간에 우애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그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남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때는 자기 일같이 생각하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는 봉사 정신이 투철한 모범 청년이었다.
이렇게 동생은 형과는 아주 딴판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형의 잘못이 동생으로 하여금 보상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 속을 썩혀주는 망나니가 있는가하면, 정성으로 부모를 받드는 효자가 있어 희비 쌍곡선(喜悲 雙曲線)이 부딪치는 환경 속에서 네 식구가 살아오고 있었다.
이같이 네 식구가 살아오던 어느날 노환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평소에 말썽꾸러기였던 큰아들도 숙연한 자세로 무엇인가 반성하는 듯한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지만, 특히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기로 널리 알려진 작은아들이 막상 아버지가 작고(作故)하고 나니 효도가 부족하여 돌아가시게 한 것 같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가셨으니 사후(死後)라도 극락(極樂)세계에서 고이 쉴 수 있도록 하여 드리기로 작정하고 이름 난 지관(地官)을 불러 명당(明堂)자리를 탐색(探索)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동생은 지관과 함께 하루 종일 명당 자리를 찾아 헤매이다 마침내 저녘 무렵에 가서 좋은 묘 자리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명당 자리를 찾아낸 지관은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가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한가지 문제점이 있으니, 이 점은 나하고 약속을 지켜야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명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하면서 지관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즉 이 자리를 약 두 자 반쯤 파들어 가면 반드시 커다란 반석(盤石)이 깔려 있을 터인데, 묘광(墓壙)이 얕다고 하여 이 돌을 파내면 안 됩니다. 이 돌을 파내면 이 자리는 명당의 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 약속을 꼭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형님이 이것을 복되면 그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이 돌을 꺼내려할 터이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상주(常主)로서 안 된 일이지만 형은 겁살(劫煞)이 끼어 있어, 하관(下棺)할 때 이를 보면 큰 해를 입게 될 터이니 참석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고 것이었다.
지관과 동생은 이렇게 굳은 약속을 하고 동생이 형에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니, 형도 이를 수긍(首肯)하는 듯하였다.
다음 날 장일(葬日)에 발인하여 하관하려는데, 갑자기 형이 달려들어 하는 말이, 마지막으로 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상주인 내가 어찌 못 본단 말이냐 하여 하관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때형은 깜짝 놀라며,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광중(壙中)이 얕을 뿐만 아니라, 밑바닥에 암석이 깔려 있는데, 이 위에 아버지의 시신을 모실 수 없다.
이게 무슨 명당 자리란 말이냐? 묘광(墓壙)의 깊이가 두어 자 밖에 안되고, 게다가 밑바닥에 큰돌이 박혀 있는데, 이 자리가 어떻게 명당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형은 버럭 화를 내며 직접 괭이를 들고 광중을 파서 인부와 함께 들어내었다.
아!! 이게 웬일인가? 돌을 들어내는 순간 돌 밑에서 두 마리의 학이 나와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 마리는 덕송리(德松里)에 있는 현제봉으로,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진장리(榛)墻里)에 있는 장군산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돌 밑에 있던 학이 날아감으로 인하여 명당 자리의 효력이 상실되어 이른바 파명당(破明堂)이란 명칭이 나오게 된 것이다.
지관의 말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고 무시한 채, 다만 가시적(可視的)인 불합리성을 내세어 자기 고집대로 일을 단행하여 결국은 생전에도 불효를 하더니, 사후에도 큰 불효를 하고 말았다.
명당 자리에 뫼를 쓰면 자식과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인데, 결구 자기에게 돌아 오는 복을 형은 스스로 털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있은 뒤에 지관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학이 날아가 앉았다는 장군산과 현제봉에 올라가, 명당 자리를 찾느라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다.
이 사절미산은 태안읍 송암리(泰安邑 宋岩里)1구 위치한 조그마한 야산이다.
공부(公簿)상에는 송암리에 위치한 되어있으나, 실은 송암리 1구와 반곡리(盤谷理)1구 사이에 위치한 비교적 돌이 많은 산이다.
오랜 옛날 이 사절미산 기슭에 매우 정애(情愛)가 두터운 삼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형제간에 조금마한 일을 가지고라도 서로 다투어 본 적이 한번도 없더니, 성장하면서도 사이는 더욱 좋아서 콩 한 개라도 있으면 나누어 먹을 정도로 서로 믿고 아끼는 마음이 불길 같아 솟아오르고 있었다. 요즘 항간(巷間)에 한창 유행하고 있는 「형님 먼저 아우먼저」식의 양보심이 강한 형제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부모님께 대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이같이 부모님께 효도가 극진하여,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기 때문에, 그 소문이 온 동네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면 으례히 이 삼형제에 대한 화제(話題)로 꽃을 피우곤 하였다. 심지어 형제간에 싸우는 가정에서는, 그 부모들이 "얘야, 너희들은 형제간의 싸움이 매일같이 그리 심하냐, 아무개 형제들 같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느냐 그들의 본을 받아, 제발 사람 구실을 해봐라."하는 등의 말이 마을의 이곳 저곳에서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워서, 늘 굶주리고 헐벗는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불평을 하거나 부모님을 원망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다만, 이들의 생활이 좀 불편할 뿐이지 생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가정은 언제나 웃음꽃이 피는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이들 형제들은 비록 잘 사는 사람만큼 돈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 대신 남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우애와 화목과 사랑을 흠뻑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이좋게 형제들은 틈만 있으면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팔곤 하였다. 이 같은 나무를 해다 파는 것이 이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생활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무를 하기 위해 산에 오르다 보면 산의 중턱쯤에 뱀과 참새가 띄엄띄엄 몇 마리씩 죽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산비탈에 뱀과 참새가 몇 마리씩 죽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형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여느 때와 같이 나무를 해 가지고 하산(下山)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나무하러 며칠동안 산에 오르다 보니 하루는 심상치 않음을 느낄수 있었다.
형! 저 뱀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아. 오늘은 좀 이상하지 않아. 뱀과 참새가 여느 때보다 많이 죽어 있을 뿐만 아니라 죽어 있는 형태가 이상해, 이건 자연사(自然死)가 아니라 붐명히 무언가에 의해 타살된 것이 틀림없어, 뱀의 꼬리가 잘리어진 것도 있고, 또 몸뚜이가 무언가 예리한 것을 군데군데 뜯긴 것 같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음을 새삼 발견할 수가 있었다.
형제들은 이는 분명히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아, 즉어 있는 상태가 더없이 미묘하단 말이야 즉 절미(絶微)하지 않아, 이렇게 형제들은 뱀과 참새가 죽어 있는 옆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제각기 의견이 분분(紛紛)하였다.
이때형이 말을 꺼냈다.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길게 얘기할 것 없이 내일은 좀 일찍 산에 올라와서 은밀히 지켜 보는게 어때, 형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 형제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부지런히 나무를 한 짐씩 하여 가지고 하산했다.
다음날 새벽에 형제들은 약속한 대로 뒷산에 올라가 나무숲 속에 은밀히 숨어서 뱀이 죽어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윙 소리와 함께 참새떼가 날아오고 뱀이 모여들더니 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뱀이 참새의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참새는 이에 먹히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는데,그 광경이 매우 처참하여 마치 격전장(激戰場)이 백병전(白兵戰)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싸움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달이 계속 되고 있는데, 날이 갈수록 전국에서 동원되어 오는 지 참새떼와 뱀은 더욱 많이 모여들고 또한 싸움의 양상(樣相)은 매우 격렬(激烈)해지고 비참해서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격전이 수개월 계속되어 오는 동안 이 산을 지키고 있던 산신(山神)이 시끄러워서 마침내 큰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뱀과 참새는 산신이 노여워하고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격전만을 계속하던 어느 날,갑짜기 청천(靑天)하늘이 먹구름을 뒤덮이고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가 천지를 진동케 하더니 불벼락으로 드디어 뱀과 참새가 몰사(沒死)하고 말았다.
이같은 사건이 있는 뒤에 동네 사람들은 뱀이 이렇게 꼬리가 잘리어 죽었으니 산은 뱀사(蛇)를 붙이어 사절미산(蛇截尾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산후리는 태안읍(泰安邑)의 13개 법정(法定)리(里)의 하나로서 어은리(漁隱里)와 삭선리(朔善里) 그리고 상옥리(上玉里)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즉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白華山)의 뒤에 자리잡은 비교적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같이 평화로운 산후리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말엽부터 그러니까 고려조 말기(高麗朝 末期)부터라고 한다.
이 무렵 죽 13세기부터 16세기 말엽의 임진왜란(壬辰倭亂)직전까지 우리 나라의 연안에 왜구(倭寇)의 침략이 심하였다.
일본(日本)의 역사학자(歷史學者)인 가사하라의 「일본역사(日本歷史)의 군상(群像)」에 의하면 13세기 초엽부터 15세기에 걸쳐서 우리 나라를 침략한 횟수가 무려 392회에 달한다고 하였으니 실은 그 이상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같이 400회에 가까운 침략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당한 수모는 필서로 표현할수 없는 것이다. 이때 우리 서태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1352년부터 1385년 사이에 무려 10여 회에 걸친 왜구의 침략을 받았는데 특히 태안 지역에 침입한 횟수가 4회에 이르고 있다.
이 중에서도 1373년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하나의 군이 폐군되어 타군(他郡)에 예속될 정도라면, 그들의 침략성이 심하여 태안군(泰安郡)의 행정이 마비되어서 군이 폐군되어 서산군(瑞山郡)에 예속(隸屬)되었다.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하나의 군이 폐군되어 타군(他郡 )에 예속될 정도라면, 그들의 침략서을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태안의 주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내륙 지역(內陸地域)으로 피난을 하고 있었는데, 한 부부가 꿈을 꾸니 키가 훤칠한 산신령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다른 지방으로 피난을 가지 말고 백화산(白華山)뒤로 가면 그 곳이 발 피난처가 될 것이오.
그 곳은 백화산이 가로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지 않아 피난처로서 천연적인 보호지역이니 그 곳으로 가시오, 그런데 백화산은 험한 산이니 넘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산신령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깨어 보니 꿈이었다. 정말 이상한 꿈도 다 있지, 다른 사람들이 피난하기에 눈코 뜰 사이 없는데, 이들 부부는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이들 부부는 산신령이 현몽한 대로 백화산 뒤로 피하기로 결심을 하고 밤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백화산에 나무가 없지만 옛날엔 산림이 무성하고 따라서 호랑이와 산적(山賊)들이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도 산에 오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산신령이 분명히 산 뒤로 피난하라는 계시(啓示)를 했으니, 우리에게 무슨 변고(變故)가 있겠는가라고 부부는 이렇게 다짐을 하고 우거진 숲 속을 헤치며, 그래도 조심스럽게 산의 중턱쯤 오르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산적에 의해 부인이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남편은 부인의 수모를 저지(沮止)하기 위해 산적들과 대항하다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현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난 호랑이에 의해 등에 업혀서 쏜살같이 어디론지 달려 가로 있었다.
한참 동안 달려가다 멈추었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주의를 살펴보니 뒷편에 수백 년이 되었을 것 같은 거목(巨木)이 하늘을 찌를 듯이 버티고 서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느티나무인데 그 밑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넓이가 두어 평정도 남짓한데 마피 방안 같이 아늑해 보였다.
호랑이와 부인은 이 느티나무 구멍 속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 후 부인은 아기를 낳으니, 그가 성장함에 따라 이 곳을 중심으로 생활의 터전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또한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이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졌던 것이다.
마을의 이름도 자연의 지형을 따라 그대로 산 뒤라고 하였다.
그 후 이 산 뒤 마을이라는 우리말이 그대로 한자어(漢字語)로 바뀌어져 산후리(山後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산후리라고 하는 마을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산후리도 앞에서 기술한 산후리와 같은 지역을 말하는데, 그 유래의 내용이 다르므로 참고로 하기 위해 여기에 다시 적는다.
산후리(山後里)는 우리말로 산 뒤라고 부르는데 물론 지금도 보통 산 뒤라고 하지만, 아니 산 뒤여서 그런지 마을이 온통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盆地)이다.
하지만 산이라야 조금마한 야산에 지나지 않으므로, 개간하면 모두 밭으로 활용될 수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이같이 산이 많아서인지 인가들이 한군데 모여 사는 집촌(集村)마을이 아니라 비교적 떨어져 이곳 저곳서 사록 있는 괴촌(塊村)마을이었다.
이렇게 옛날 이 마을의 산기슭에는 여러 집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웃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즉 이 마을은 평화롭고 인심 좋은 마을이었다.
이같이 인심이 좋기 때문에 대문을 잠그지 않아도 도둑맞는 일이 없는 화평한 마을이었다. 이처럼 이 마을은 법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주민 상호간에 신뢰성이 두터운 것은, 무엇보다 온 마을이 모두 형제같이 서로 우애하고 사랑하며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정신이 투철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살기 좋은 마을에 금실(琴悉)좋은 부부가 있었다.
이들 중년(中年)의 부부는 사이좋기로 온 동네에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이들은 나무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었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에다 또한 산기슭에 살고 있으니 주변이 모두 나무들인데,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들 부부는 유달리 자기 집 주변에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심는 나무는 여러 가지 유실수(有實樹)를 비롯하여 각종수목(各種樹木)그리고 꽃나무들이었다. 훌륭한 수목원(樹木園)이 된 것이다.
특히 봄이면 매화(春梅)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 향기와 아름다움이 마치 지상(地上)의 낙원(樂園)을 방불할 정도이고, 여름철이면 나무숲이 우거져서 집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수목원이 되며, 또한 가을철이면 붉게 타는 단풍(丹楓)과 더불어 각종 과실이 나무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더욱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자연(大自然)의 숲 속에서 살고 있는 이 부부는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간의 흐름도 잊곤 있었다.
그런데「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과 같이 평화롭고 행복한 이 산후리 마을에 마음씨 좋지 않은 욕심 많은 심술쟁이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이 심술장이는 금실좋게 살고 있는 부부를 괜히 늘 미워하고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심술쟁이는 부부가 외출한 틈을 이용하여 이 부부가 살고 있는 집과 수목원에 방화(防火)했다.
그리하여 집이 삽시간에 다 타버리고 수목도 거의 탔는데, 이상하게도 몇 그루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나무가 있었다.
이를 살펴보니「산후리」라는 나무였다.
이 같은 사건이 있는 뒤에 동네 사람들은 무서운 불길 속에서 타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 남은 이 산후리 나무는, 분명히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암시(暗示)하고 있으니, 우리 마을 이름을 산후리로 부르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산후리라는 이름이 오늘에까지 전래되어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산후리란「산 뒤 마을」이라는 우리말을 한자어(漢字語)로 고치어 산후리 (山後理)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산후리라는 명칭이 나무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바로 이 점이 앞의 산후리의 내용과 다른 점이다.
이 산후리라는 나무를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나무가 지금도 산후리 동네에서 자라고 있다기에 현지에 달려가 여러 촌로(村老)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어렸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있으나, 산후리라는 나무는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태안읍 장산리( 泰安邑 長山里)1구에 있는 샘을 일컫는 것이다.
이 샘을 까치 샘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전 그러니까 조선조 초기(朝鮮朝初期)에 전구구이 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고 있을 때였다.
밭의 보리는 여물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비틀어지고, 논에는 모내기를 하지 못해 모판의 모가 그대로 노랗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또한 대지(大地)는 성냥을 그어대면 당장이라도 활활 타들어 갈 것 같이 바싹 말라붙었다.
그런데 장산 1구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뭄이 유독 심한 것 같았다.
논밭에 곡물(穀物)재배를 못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우선 1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먹는 물(食水) 이다.
특히 장산 1구는 식수난으로 인하여 주민들의 고통이 여간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지하수를 개발하여 식수 정도는 무난히 해결할 수 있지만, 지난날에는 모두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 뿐 다른 방법을 모색(摸索)할 수 없었다.
즉 지하수를 개발한다든가 또는 가뭄에 대비하여 미리 수리 시설을 갖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발전상으로 보아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오로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이었다. 명소(名所)에 가서 정성껏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눈에 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어 100%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기우제를 지내기로 뜻을 모아 실천으로 옮겼다.
주민 대표들을 선발하여 산에 올라가서 정성껏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 산기슭에서 일행이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산길슭 논가로 날아와서 무엇인가 열심히 쪼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말라붙은 논바닥에 무엇이 일단 말인가? 벌레 한마리 있을 수 없는 저곳에 무엇을 저렇게 열심히 쪼아먹는 것일까? 일행은 모두 의아한 눈길로가 하는 짓을 주시(注視)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까치는 이윽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일행은 휴식을 마치고 마을로 내려오다 까치가 있던 곳을 지나게 되었다.
일행은 동시에 소리쳤다. 야! 저게 뭐지. 논이 젖어 있잖아. 물이 있는 거야. 틀림없어. 모두 달려가 보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논바닥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는데 유독 이곳만 사방 한자 정도의 넓이에 흙이 젖어 있었다.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일행은 즉시 물기 있는 바닥을 파 들어갔다. 이윽고 샘물이 솟아났다. 일행은 너무나 기뻐서 환호성(歡呼聲)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사막에서「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旅行者)의 기쁨과 비례(比例)할 바가 아니다. 식수난으로 인하여 정든 고향을 버리고 타향으로 이사할 정도의 고통을 받던 주민에게 이같은 생명수(生命水)를 얻게 된 것을 오로지 하늘이 내려 주신 복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도 업는 일이었다.
이렇게 까치로 하여금 생명수를 얻게 된 장산리의 주민들은 까치의 고마운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 샘의 이름을「까치샘」이라고 명명(命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 샘은 논 가운데에 초라하게 남아 있지만 식수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샘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물이 얼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지금도 이 샘의 유래를 아는 사람은 이곳을 지날때면 발길을 멈추고 지난날을 회상하곤 한다.
태안읍을 안고 있는 백화산은 우리 고장의 명산 중의 하나이다.
반만년의 여가 속에 숱한 애환을 묵묵히 바라보며 갖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때로는 많은 순난을 당하면서 버티고 선 백화산은 나무보다는 오히려 바위가 많아 일명 바위산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이 백화산 서쪽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백화산과는 달리 숲이 우거진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냇물을 사이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주로 방(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하여 마을 이름이 「방가못」, 또는 「방가맛」이라고 불렀다는데 방가라는 말은 방씨를 가르킨 것이고 「못」이나「맛」이니 하는 것을 냇물이나 인공호수 등을 뜻하기도 한다.
애당초 방씨들이 이 마을에 정착할 때에는 냇물도 없었고 「못」도 없었으나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냇물이 생기게 되었으며 지금은 아주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냇물이 생기게 된 사건이 바로 지금 옮기려는 전설 속에 있으니 지형의 변화와 지리의 형성까지 옛사람들은 전설과 연관지으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방가네 마을에 방씨 성을 가진 젊은 부부가 살았다. 그런데 이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삼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자 부부는 초조하기 시작했다.
옛 사람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거을 칠거지악의 하나로 부인을 냉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여인들이 학대를 받았던 것은 우리 역사 속에 사회의 모순된 구조였다.
방씨 부부는 아이가 없는 것을 걱정하다가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백화산에 가서 산신령에게 기도나 드립시다."
그러자 남편도 기다렸다는 듯이 부인의 말에 동의하고 그들은 목욕을 하고 옷을 단정히 한 후, 백화산으로 갔다. 두 사람은 상전이 큰 바위 밑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소서."
그들은 사흘 동안 음식을 전폐하고 잠을 자지 않고 기도를 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인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입덧이 시작된 것이다. 부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산신령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준 거야. 아들이든 딸이든 잘 낳아 기릅시다."
"아들이면 좋겠어요."
방씨 부부는 열 달 동안 매사를 조심하며 출산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열 달이 되던 날, 부인은 옥동자를 분만했다.
아기는 튼튼하고 이목구비가 훤하게 생겨 남자다웠고 보는 사람마다 큰 인물이 되겠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 이 동네 노인이 밤에 뒷간에 갔다가 방으로 들어가다 보니 방씨네 집 위로 훤한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줄기가 백화산에서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노인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후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방가의 아들이 총명하게 생겼다는 말에 그 빛이 비추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자라면서 아이는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걷는가 하면 말도 일찍하고 또 힘도 세어서 부모도 놀랄 정도였다.
"아이가 너무 똑똑해!"
"힘은 얼마나 센가, 모르면 몰라두 팔씨름을 하면 어른도 못 당할걸."
동네 사람들은 이 기인 같은 아이를 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면 어느날, 부인은 우물로 빨래를 하러 나갔다. 아이가 곤히 잠든 틈을 빨래를 하기 위해 나갔다. 아이가 곤히 잠든 틈을 타서 빨래를 하기 위해 빨래감을 가질러 들어갔다.
그런데 방안에서 이상한 소가 들렸다. 방안에는 아기 혼자 잠을 재우고 나았는데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장정이 여러 사람 모인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무슨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부인은 하도 이상하여 방문 여는 것을 그만두고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더니 방안에서 잠자던 아기는 간 곳 없이 젊은 무사 한 사람이 떡 버티고 서서 손에 막대기를 여러개 들고 주문을 외우는데 주문을 외울 때마다 막대기 군졸로 변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 무슨 조화여"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도깨비에 흘린 것인가!"
부인은 이 기이한 일에 정신이 아물아물하고 겁이 났지만 정신을 차리고 방안의 동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젊은 무사의 손에 있던 막대기가 모두 군졸로 변하자 무사는 갑자기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 차렷! 지금부터 훈련에 들어가겠다. 먼저 칼싸움을 배운다. 내가 시범을 보일터이니 너희들은 따라 하도록 해라!"
그러자 군졸들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더니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드는 것이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 무사가 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쨍강" "쨍강"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을 흔들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칼싸움을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활을 들고 활 쏘는 훈련을 했다.
"자. 여기 과녁이 있느니라 이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되 살이 하나도 빗나감이 없도록 해야한다."
무사가 벽에 과녁을 걸어놓자 군졸들이 화살을 날렸다.
"씨잉씽!" "씨잉씽!"
화살이 나는 소리도 칼이 부딪치던 소리 못지 않게 날카로웠다.
그렇게 훈련하기를 몇 시간, 무사는 흡족한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는 훈련을 중지시켰다.
"자,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하자."
무사는 이렇게 말하고 아까와 같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문이 끝날때마다 군졸들이 하나씩 하나씩 막대기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맨 나중 주문을 무사 스스로가 갓난아길 변하더니 부인이 잠을 재우던 포대기 속으로 들어가 막대기는 감추고 금방 잠이 들더니 새록새록 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기가 무사가 됐단 말인가, 이 무슨 괴변이란 말인가!"
부인은 부들부들 떨려오고 식은땀이 등에서 흐르고 다리가 힘이 없어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은 아니야"
"귀신이야! 우리 아기가 귀신이야"
부인은 엉금엉금 기어빨래터로 나갔으나 빨래할 생각은 잊고 방안의 광경이 눈앞에 어른거려 무섭기까지 했다.
그 날 밤 아내는 남편을 데리고 윗산으로 갔다. 집안에서 말하면 아기가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를 따라 산으로 가면서 아내가 중대한 이야기라는 소리에 몹시 궁금했다.
"무슨 말인데 산에까지 와서 해야하나?"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니."
부인은 낮에 일어났던 일을 소상히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 소리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을 했다.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못하여 헛것을 본게 아니냐고 아내를 걱정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아기나 잘 보살펴요. 힘든 일은 하지 말고."
"제 말을 못 믿으시는군요. 그렇다면 내일 당신도 한번 방을 엿보세요"
"좋아,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지"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가니 아기는 깊은 잠에 빠져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천진스러워 어머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에게 도깨비니, 귀신이니 하는 다인은 벌을 받을 것이오."
남편은 부인을 나무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부인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악몽이 부인을 괴롭혔고 낮에 겪은 일들이 꿈만 같았다.
다음 날, 방씨 부부는 여늬때처럼 일어나 남편은 들일을 나갔고 아내는 빨래터로 나갔다. 두 사람은 시간을 약속하고 그 시간에 집으로 가서 방안의 동정을 살피고자 약속을 했던 것이다.
약속한 시간, 두 사람은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방문 앞에 이른 부부는 발길을 멈추고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이윽고, 방안에서 주문 외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부는 긴장을 하고 방문으로 가서 문틈으로 방을 엿보았다.
아! 거기 방안에서 어제 부인이 본 그대로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쟁강" "쟁강"
" 씨이잉" "씨이잉"
칼이 부딪치고 화살이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무사의 구령과 호령이 터지고 군사들의 기합소리가 흡사 전쟁터 같았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방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아! 남편은 그만 눈을 돌리더니 하나를 해 탄식하고 있었다.
"이래도 내 말을 못 믿으시겠어요?"
"아니야,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야 집안이 망할 징조야, 이 일을 어떻게 한담."
부부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 방안에는 훈련이 끝났는지 잠잠했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기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록새록 잠이 들어 있었다.
방씨 부부는 이 기막힌 사실을, 아니 끔찍한 사실을 남에게 발설하지도 못하고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연구해 봐도 이 가공할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였다. 그들은 며칠을 두고 고심했지만 속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여보, 아무래도 저 아이는 사람이 아닌 것 같소 요괴가 아니면 귀신인 것 같소. 어쩌면 좋겠소"
"설마, 우리 아이가 요괴일까요. 우리가 백화산에서 얻은 아이인데 그 반대가 아닐까요, 이를테면 재주가 비상하여 도술을 부리는 위인이 아닐까요, 아니 힘센 장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소. 그 아이가 하는 짓이 군졸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도 요괴가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몰아내고 이 나라 왕이 되려고 반역을 음모하는 것인지도 모르오."
"그 반대로 생각해봐 여, 저 아이가 훌륭한 장수가 되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구하f게 될지 누가 알아요."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만, 만일 역모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이 멸망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오."
부모가 이렇게 고심에 빠져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는 날마다 부모가 일터로 나가면 병정놀음에 여념이 없었다.
그 즈음 태안지방은 오랑케의 침입으로 주민들의 생황은 말이 아니었다. 관군이 오랑캐를 진압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싸우고 족족 패하여 쫓기고 있었다. 이렇게 되지 오랑케는 더 득세를 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연년 흉년이 들어 인심이 사나워져서 동네 사람들끼리도 서로 경계하고 서로 못 믿어 하며 싸움이 잦아 그야말로 난세가 거듭했다.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가.!"
"그보다도 우리 태안지방이 오랑캐의 소굴이라도 되는 것은 아닌가!"
"이 난세를 평정할 인물이 없단 말인가!"
사람들은 시국이 하도 싱숭하여 모든 일에 의욕이 없었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더욱기 조금만 말을 잠못하거나 오랑캐를 두둔하다가는 오랑캐를 두둔하다가는 오랑캐와 내통한다 하여 경을 치루기가 일쑤이니 사람들의 불안은 더해만 갔다.
이런 와중에 방씨의 아들이 해괴 망측한 짓은 방씨 부부로 하여금 더 불안하게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소.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까보오."
"결단을 내리신다면?"
"아이를 죽입시다!"
"뭐라구요?"
"살려두었다가는 저 아이가 오랑캐가 작당을 하는 날이면 큰일이요, 예사 마이가 아니니 무슨 짓을 못하겠소? 우리 아무 생각 말고 저 아이를 멀리 보냅시다."
"하지만 죽이는 건 안돼요!"
부인은 울며불며 날 리가 났지만 남편은 아들을 죽이기로 하고 아내를 달랬다.
다음날, 부부는 여늬때처럼 아이를 잠재우고 들로 일을 하러 나가는 척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방씨는 방에 있는 큼직한 다듬이 돌을 들어 아기의 목을 누르고 나왔다.
방씨는 아들을 다듬이 도로 목을 누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밭으로 가 밭일을 하는 척했다. 차마 눈뜨고 아들이 죽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씨는 옆에서 울고불고 하는 아내를 달래며 마음속으로는 죄를 지었다 싶어 지비을 바라보니 이게 또 무슨 변고인가 갑자기 방씨의 집 지붕이 뚫어지고 그 뚫어진 곳으로 하얀 백마 한 마리가 날개를 저으며 날아가는 그 백마는 백화산을 향하여 날고 있었다.
백마는 천천히 날으면서 몹시 슬픈 듯이 여러 번 울면서 날아갔다.
"휘잉" "휘잉"
이렇게 울며 날아간 백마가 백화산 중턱에 이르자 갑자가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치며 사이 갈라지더니 백마는 그 갈라진 백화산으로 숨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방씨가 넋을 잃고 있는데 또 한번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갈라진 산 중턱에서 난데없이 물줄기가 솟구치며 큰 냇물을 이루어 흐르는 것이었다.그제서야 방씨는 후회했다. 백화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아들을 죽인 자기가 한없이 미웠다. 너무 경솔하게 서두른 자기의 행동에 방씨는 한없이 눈물을 흐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후, 사람들은 방씨를 꾸짖었다. 더욱이 아기가 태어날 때 빛을 본 노인을 방씨를 사람이 아니고 짐승만도 못하다고 나무랬다. 아이를 보면 그의 앞날을 점칠 수 있는데도 엉뚱하게 속단하고 자식을 죽인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나무랬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살려두었더라면 오랑캐를 무찌르고 이 나라에 큰 위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 후, 방씨는 부끄러워 이 마을을 떠났다고 하는데 지금 태안 중·고등하교 뒤쪽으로 흐르는 조그마한 냇물이 바로 그 때 생긴 냇물이고 또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근처의 샘은 그때 생긴 냇물이고 또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근처의 샘은 그 때 생긴 못이라고 한다.
그 당시는 냇물도 못도 컸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냇물도 못도 작아져서 지금은 윤곽만 남은 것이라 하는데 그 곳을 지나노라면 사람이 깊이 생각지 않고 속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가를 생각게 한다.
「방가못「방가맛」은 이래서 우리 속에 영원히 전설로 남아 먼 훗날까지 이어지리라 봅니다.
오랜 옛날 태안읍 내에 한 젊은이가 살았는데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원래가 가난한 집안이라서 무려 받은 재산이라고는 옴팡집 하나였는데 어떻게된 셈인지 아무리 뼈가 빠져라 일을 해도 가난은 물러가지 않았다.
조금 재산이 모아지는가 하면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가, 아니면 다른 일이 생겨서 지출할 일들만 생기니, 한 푼 벌면 두 푼 쓸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렇게되자 젊은이는 실의에 빠졌고 점점 게으르게 됐으며 매사에 의욕이 없어서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젊은이가 문 밖에서 우두커니 앉아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데 웬 중이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중은 나이가 많고 옷차림이 너무 초라하여 거지같았는데 손에는 긴 지팡이를 짚고 수염이 석자는 될성싶게 기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쉽게 접근하기에는 어딘가 몸차림이 단정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이었다.
이런 중이 젊은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부처님께 시주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 시주하시고 복 받으시오."
이 소리에 젊은이는 발끈 성을 냈다. 그도 그렇듯이 시주할 만한 집에 가서 시주를 하라고 해야지 다 쓰러져 가는 옴막집에 와서 시주하라고 하니 염치없는 중이괘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젊은이는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시주할 것이 아무 것도 없소."
"보리쌀 한줌이라도 좋습니다."
"보리쌀 한 줌이 어디 있소, 난 아침 끼니도 거르고 있소."
"그래요, 그것 참 안됐군요. 그런데 젊은이는 왜 그렇게 가난하게 사시오. 열심히 일하면 가난은 면할 수가 있지 않소."
젊은이는 지금 자기의 처지를 중에게 들려주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재산은 불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가난하기만 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자기는 아무 일도 하기 싫고 동냥이나 해야겠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나도 스님처럼 중이나 되어 여기저기 얻어먹으러 다니기나 해야겠소."
"중은 아무나 되나요, 그러나 저러나 내가 보니 당신이 가난한 이유는 다인 선친의 묘가 잘못 들어선 것 같소. 그러니 부친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어떻소. 내가 묘자리를 잡아주면 젊은이는 부자가 되고 또 벼슬도 얻을 것이요."
"그렇습니까, 그럼 스님께서 좋은 자리 좀 잡아주십시오."
젊은이는 아까와는 달리 중에게 매달리다시피 간청했다. 부자가 되고 벼슬도 얻는다는 말에 젊은이는 갑자기 긴 장마에 햇빛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귀가 번 적 뜨였다.
"그야 어렵지 않지만, 조건이 있소."
"조건이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오. 내가 당신의 선친 묘 자리를 잡아 준대로 묘를 쓰면 부자가 되고 벼슬을 하게 될 것이오. 그 때 내게 3백냥 아니라 그 보다 더한 것이라도 드려야지요."
"그럼 계약을 합시다."
그러면서 중은 소매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고 붓을 꺼내더니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용이야 나중에 젊은이가 잘 되면 스님에게 3백냥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중은 젊은이의 집 뒷산에 자리를 잡아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수년 후,
이 젊은이는 점점 가산이 넉넉해지고 가산이 넉넉해지니 글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리고는 과거에도 급제하여 원님이 되었다. 늙은 중의 예언은 적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마음이 점점 교만하기 시작했다. 돈 백냥이 생기면 천냥만치 교만이 생기고 원님이 되더니 정승이나 된 만큼 교만하여지고 남을 우습게 여기는가 하면 가난하고 지체 낮은 사람을 학대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한 편, 묘 자리를 잡아준 스님은 젊은이가 벼슬을 얻고 부자가 됐다는 소리를 듣고 돈 3백냥을 받으러 길을 나섰다.
여러 날을 걸어 젊은이가 원님으로 있는 관청 앞에 오니 관청문 앞에는 문지기가 버티고 서서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어디서 온 중인데 지체 높으신 양반을 만나겠다는 거요, 썩 물러가시오."
그러나 쉽게 물러설 중이 아니었다. 해가 지도록 문지기와 실랑이를 했다. 스님의 끈질긴 간청에 무지기도 하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디서 온 중이라고 말할까요?"
"예, 오래 전 원님의 부친 묘 자리를 잡아준 중이라 이르시오."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무지기가 안으로 들어간지 잠시후 문지기가 화가 난 얼굴을 하고 나왔다.
"여보시오, 괜히 나만 야단맞게 할게 뭐예요. 원님은 다신 같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는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요, 빨리 가보시오."
스님은 이 뜻하지 않는 문전박대에 불괘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분을 참으며 다시 문지기이게 말했다.
"그럼 이것을 가지고 가면 나를 알아 볼 것이오, 이것을 원님께 드리시오."
중은 소매주머니 속에서 몇 년 전 젊은이와 계약했던 문서를 주면서 다시 청했다.
"이게 뭐요?"
"원님만 아는 것입니다. 부탁합시다."
문지기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다시 나왔다. 그런데 그 표정이 처음 들어갔다 나올때보다 더 화난 얼굴이었다.
"여보시오, 누구 볼기맞는 꼴을 보려구 그러시오, 그 문서를 보자마자 원님께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더니 그 문서를 찢어버리시고 당장 당신을 쫓아 보내라고 야단이십니다."
이쯤 되자 스님은 원님의 못된 마음을 짐작하고 소매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몇 글자를 적어 문지기에게 다시 주며 말했다.
"여보시오, 나 때문에 야단맞아 미안하오만 한 번만 더 수고 좀 해 주시오. 이 종이 쪽지를 원님께 갖다 주시면 이번에는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오."
"싫소이다. 이제 다시는 당신의 심부름을 않겠소."
문지기는 한마디로 거절하고는 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스님은 주머니에서 엽전 열냥을 문지기 손에 집어주면 다시 청했다.
"이거 얼마되지 않지만 받아쓰고 한 번만 더 원님을 만나주시오."
돈을 보자 문지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돈 앞에는 사람들이 맥을 못추는 모양이다. 문지기는 입이 크게 벌어지더니
"염려마시오. 내가 야단 맞드래도 원님께 이 쪽지를 드리겠소."
이렇게 말한 문지기는 그 쪽지를 원님께 드렸다. 쪽지를 본 원님은 조금 전과는 달리 얼굴색이 환해지면서 말씨도 부드럽게 문지기에게 물었다.
"그 스님이 어디 계시냐?"
"아직 문 밖에 있을 겁니다."
"그럼 빨리 보셔오너라"
원님의 이 뜻하지 않은 돌변에 문지기가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원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스님을 모셔오라는데 물 꾸물거리고 있느냐?"
도대체 그 쪽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원님, 오늘 내가 원님을 찾아온 것은 옛날 약속한 돈 3백냥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원님이 더 잘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려고 왔습니다. 선친의 묘를 지금의 위치에서 열 걸음 더 올려 쓰면 원님은 장차 이 나라의 정승이 될 것입니다. 」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이었다. 이런 복된 소리에 원님은 중을 그냥 보낼 리가 없다. 문지기에게 빨리 스님을 모셔오라고 호령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들어오시랍니다."
스님은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먹음고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원님이 버선발로 쫓아 나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누구신가 했더니 스님께서 오셨군요. 내 그 동안 깜박 잊고 무례하게 스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자 어서 오르시지요."
스님은 못이기는 척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까 쪽지의 내용대로 3일 후면 천묘하기에 가장 좋은 날이니 선친의 묘를 옮기라고 말했다.
"여부가 있습니까. 스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 동안 스님은 저의 집에 묵으면서 편히 쉬십시오."
사흘 후, 원님은 부친의 묘를 이장하기 위하여 스님을 앞세우고 산으로 올라갔다. 날씨가 화창한 봄날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스님이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열 걸음을 세고는 발을 멈췄다.
"여기올시다."
스님이 잡아 준대로 이장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먼저 묘를 파헤치는 순간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이상한 새 한 마리가 푸르르 날아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아니 묘 속에 무슨 새야!"
"땅속에 새가 살았다니 이게 무슨 조화여!"
일꾼들이 넋을 잃고 서 있는데 스님의 너털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3백냥이 날아간다. 3백냥이 날아가"
그제서야 원님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원님은 저만치 휘죽휘죽 내려가는 스님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자기의 실수를 후회했지만 파랑새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로 원님은 어떤 잘못으로 원님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가사도 기울어져 옛날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바로 배은망덕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