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란 글자 그대로 청동(靑銅)으로 만든 여러 가지 기구를 일컬음인데. 이 기구들을 사용한 시대를 청동기 시대라고 한다.
즉 청동기를 만들어 실생활에 이용한 시대를 말함인데, 이는 철기시대(鐵器時代)의 앞, 석기시대(石器時代)의 다음으로서 고고학상으로 구분하는 시대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철기 시대로 들어간 민족도 없는 것은 아니나, 과거 일본 학자(日本學者)들은 우리나라에서 괄목 (刮目)할만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한국에는 청동기 문화가 없었다고 주장해 왔었다
하지만 1945년 조국 광복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많은 청동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서,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특징은 북방계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과정을 거쳐 발전하여 온 것으로서, 우리나라 청동기는 아연(亞鉛) 이 합금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청동기유물로서 우선 동검(銅劍)·동경(銅鏡)·동모(銅眸)·동탁(銅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동검의 생김새에 따라 발생 시기를 대략 3기로 구분하여 고찰해 보는 것이 청동기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3기로 나누어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제2기에 들어와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청동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는데, 특히 동모·동과(銅戈) 등의 무기류와 종교적인 주술(呪術)용구가 많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서는 우선 고인돌(支石墓)을 들 수 있는데, 이 고인돌에는 남방식(南方式)과 북방식(北方式)이 있다.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이북 지역에 분포된 것을 북방식, 그리고 이남에 분포된 것을 편의상 남방식이라고 한다.
태안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지석묘)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태안읍 장산리에서 7기(朴春錫 발견), 그리고 고남면 고남리에서 1기 등, 모두 8기가 발견되었다.
장산리에서 발견한 것은 편의상 그 지역의 지명을 붙이어「장산고인돌」(일명7성 고인돌) 그리고 고남리 것은 역시 그대로「고남고인돌」이라 명명하였는데, 아직 학술 조사는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학술 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강점기(日本强占期)에 일인(日本人)들이 직접 이 장산고인돌을 발굴하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인근 주민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발굴 현장에서는 아무런 부장품(副葬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고남 고인돌에서도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같이 태안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서 고인돌(지석묘)은 발견되었으나, 이곳에서 청동기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우리와 인접한 서산시에서도 고인돌은 일찍 20여기가 발견되었으나 역시 이곳에서도 청동기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969년 서산시 대산면에서 동모(銅모)가 한 점 발견되었고, 또 지난 1987년에는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이 한 점 출토되었는데, 이 동검의 크기는 길이 28㎝ 폭 3㎝로 되어 있으며, 동모의 길이는 20㎝에 달한다.
이 같은 동모·세형동검 등은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고, 야산과 밭에서 발견된 것인데, 앞으로 이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태안 지역(泰安地域)에서는 아직도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의 유적이 이미 발견되었으므로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청동 숟가락(銅匙)이 몇 점 있는데, 이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아니고, 고려시대( 高麗 時代) 중엽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