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구석기 문화가 없었다고 완강하게 부인한 사람은 일본학자(日本學者)들이었다. 그러나 일본학자 중에서도 나오라(直良信夫)같은 양심 있는 학자는 출토된 석기(石器)·골각기(骨角器)등의 유물을 통하여 한국에도 구석기 문화가 있었다고 1940년에 발표했으나, 학계(學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는 일본강점기(日本强占期)이었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런 고고학 분야에 눈 돌릴 여유와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日本)에서도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한 일본 역사(日本歷史)보다 한국사(韓國史)가 앞설 수 없다는 일본 학자들의 비 학문적인 그릇된 식민사관(植民史觀) 때문에, 우리의 구석기 문화를 강력히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국 광복이래 사계(斯界)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 출현하여 꾸준히 연구를 거듭한 결과, 국내의 여러 곳에서 구석기 문화 유적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우선 그 대표적인 것을 열거하면 석장리 유적(石壯里遺蹟)·점말동굴 유적·전곡리 유적 등인데, 석장리 유적이 지난 1964년 공주군 장기면 석장리(公州郡長岐面石長里)에서, 연세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해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석장리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편의상 석장리 유적이라고 호칭하는데. 이 유적에서는 12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유물로는 주먹도끼·긁개·밀개·찍개 등 다수의 석기류(石器類)와 새의 조각품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유물을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법으로 측정한 결과 약 3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지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1975년 손보기(孫寶基)교수에 의해 충북 제천의 점말동굴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유물 중에서 골각기를 통하여 인류의 예술 활동으로 10만년 전으로 끌어올린 것은 획기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최근에 들어와 국내의 최고(最古)의 구석기 유적지를 발견함으로서, 국내외의 학계에 획기적인 개가를 올렸는데, 이는 지난 1979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 (漣川郡 全谷面 全谷里)에서 서울대학교·경희대학교·건국대학교·영남대학교 팀이 합동으로 발굴한 구석기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서도 주먹도끼·찍개·석핵(石核)등 무려 285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국내외의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국내에서 이 같은 거대한 구석기 문화의 유적지를 발견함으로서,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 정립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고, 나아가 국제적인 구석기 문화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의 분포를 고찰해 보면, 강가나 동굴 그리고 산기슭을 따라 발견되는데. 이 같은 입지 조건 등으로 미루어 보아 태안 지역에서는 구석기인이 살았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시대 | 유적명칭 | 발견연대 | 출토된 유물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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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구석기시대 | 점말동굴유적(충북제천) | 1975년 | 홍적세 수골화석·골각기·석기·사람 얼굴을 그린 코뿔소의 앞다리 뼈 | 20만년전의 구석기 시대 |
중 . 후기 구석기시대 | 석장리유적(충남 공주) | 1964년 | 12개의 문화층확인, 사냥돌·주먹도끼·긁개·밀개·짜르개·찍개·새의 입체조각품 그리고 이곳에서는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 방사선탄소 연대측정결과 약 3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지로 확인 |
전곡리유적(경기도 연천) | 1979년 | 주먹도끼·찍개·양면찍개·석핵(石核)등 모두 285점 출토됨 | 국내 최고(最古)의 구석기 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