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봉선화(鳳仙花)는 본래 인도가 원산지인데, 지금은 세계 각 국에 퍼져서 화원이나 정원 등에 관상용으로 심고 있다. 잎은 피침형(披針形)이고 키는 대략 60㎝ 전후이며 여름철이 되면 잎 사이에 독특한 꽃이 피는데 늦가을까지 계속된다. 꽃은 붉은색·자주색·흰색·노란색·분홍색 등 여러 가지로 피는데, 소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꽃을 따서 백반(白礬)과 함께 으깨서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한다.
이 풍습은 지금도 소녀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는 것은 손톱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뜻도 있겠지만, 실은 붉은 색은 잡귀(雜鬼)를 쫓는 벽사(壁邪)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봉선화는 꽃 모양이 봉황새와 비슷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일명 금봉화(金鳳花)라고도 하며, 순수한 우리말로는 봉숭아라고도 부른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노래」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봉선화의 노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작곡된 것으로, 당시의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던 우리 한민족의 운명을 갸냘픈 봉선화에 비유하여 당면한 겨레의 비분함을 봉선화에 비유하여 뱉어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때 일제하(日帝下)에서 금지곡이 되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이 「봉선화의 노래」는 우리 한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 한 민족적 가곡의 효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 같다.
참고를 위해 봉선화 노래의 가사를 적어 둔다.
작사 : 김현준 작곡 : 홍난파
단오는 명절의 하나로서 5월 5일을 말한다. 옛날에는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던 제삿날이었으나, 요즘은 주로 농촌의 명절로서 이 날은 수리치를 넣어 절편을 만들어 먹는데 이를 단오떡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수리치를 뜯어다 단오떡을 해먹는 가정을 거의 없다. 또한 이날 부녀자들은 창포물에 멀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남자들은 씨름으로 하루를 즐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양수(陽數)가 겹치는 월일(月日)을 명절로 정하여 즐겨왔으니,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5월 5일은 양(陽)이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여겨왔던 것이다. 또한 단오를 다른 이름으로 중오절(重五節), 천중절(天中節), 단양(端陽), 수릿날(戍衣日)등으로 부르고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남녀 어린이들이 창포탕(菖蒲湯)을 만들어 세수를 하고 홍색과 녹색의 새 옷을 입는다. 또 창포의 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 때 수(壽)나 혹은 복(福)자를 새기고 끝에 연지를 발라 두루 머리에 꽂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재액을 물리친다. 이것을 단오장(端午粧)이라 한다고 하였다.
옛날의 왕조시대의 공조(工曹)로부터 봉납(捧納) 받은 것을 단오날에 임금께서 손수 신하와 각사(各司)에 나누어주던 부채를 단오부채(端午扇)라 일컫는다.
부채는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 태안 지방에서 만들어 진상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전주(全州)와 남평(南平)에서 만든 것이 가장 좋은 부채였다 한다.
단오부채와 태안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지 모르지만,「단오부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채의 종류와 그 용도에 대하여 알아둘 것이 가장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부채의 종류(명칭)에 승두선(僧頭扇)·어두선(語頭扇)·사두선(蛇頭扇)·합죽선(合竹扇)·반죽선(斑竹扇)·외각선(外角扇)·내각선(內角扇)·삼대선(三臺扇)·이대선(二臺扇)·죽절선(竹節扇)·단목선(丹木扇)·채각선(彩角扇)·소각선(素角扇)·광변선(廣邊扇)·협변선(狹邊扇)·유환선(有環扇)·무환선(無環扇)등 만든 모양이 각기 다르고 청색·황색·적색·백색·흑색·자색·녹색·검푸른색·운암색(雲暗色)·석린색(石燐色)등 모든 빛깔의 부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부채는 빛깔에 따라 소지하는 주인공이 달랐다. 즉 청색의 부채는 신랑이 , 적색의 부채는 신부가. 백색의 부채는 상주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생김새와 모양에 따라 용도가 달랐으니, 어린이들이 햇빛을 가리는데 사용한 윤선(輪扇), 파리나 모기를 쫓는데 사용한 부채, 신부들의 얼굴을 가리는데 사용한 부채, 그리고 대신(大臣)들이 장식물로 사용한 파초잎 모양의 초엽선(蕉葉扇)이 있었다.
요즘은 선인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부채는 만들지 않는 것 같다. 특수한 것이 있다면 무용할 때 쓰는 대형 부채, 무당들이 굿할 때 쓰는 부채, 그리고 태극선(태극모양을 그린 둥근 부채)등이 있는데, 이 태극선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유명해졌다. 또한 요즘은 플라스틱(PLASTIC)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부채도 대량으로 마구 찍어내고 있는 실적이다. 이렇게 양산되는 플라스틱 부채이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한지(韓紙)부채와는 비교도 안된다.
무더울 때 종이부채를 펴 들고 부치면 거기서 나오는 청량한 바람의 그 삽상(颯爽)한 기분이란 정말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플라스틱 부채는 이와는 달리 시원하기는커녕 부칠수록 오히려 짜증과 신경질이 유발될 뿐이다.
역시 부채는 우리의 전통적인 종이부채라야 제격인 것이다. 부채는 예나 지금이나 그 목적은 동일하지만 현대문명의 이기 앞에서는 그 위력을 과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즉 각 가정이나 관공서 등에는 대부분 선풍기나 에어콘(AIR CONDITIONER) 이 설치되어 있어 부채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익모초는 꿀 풀과에 속한 2년 생풀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日本)과 중국 대륙 등에 분포되어 있는데 암눈비앗·야천마(野天麻)·충울(충蔚)이라고도 일컫는다.
익모초는 옛날부터 한방약재(韓方藥材)로서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특히 산모에게 좋다는 것이다. 또한 식욕이 없는 여름철에 익모초의 즙을 내서 먹으면 식용이 생긴다하여 농가에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널리 애용되고 있는 한방 약재인 익모초는 아무 때나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오날 오시(年時=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에 채취해야 약효가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오날이면 익모초와 쑥을 채취하기에 매우 분주했던 것이다.
익모초는 오늘날에도 약초로서 많이 이용되고 있지만 반드시 단오날에 채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단오날에 익모초와 쑥은 물론 오갈피·녹이초·우령시 전문동·삼지구엽초·띠뿌리·금은화 등의 약초를 채취하여 활용하고 있다.
쑥은 엉거시과에 딸린 여러 해 살이 풀로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아시아 각지 에 분포되어 있는데 한자로는 백호(百蒿)·봉애(蓬艾)·애초(艾草)·봉호(蓬蒿) 등으로 기술되고 있다.
쑥은 우리나라 신화(神話)에 나올 정도로 우리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년생 풀인데, 식용과 약재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쑥도 역시 익모초와 같이 약용으로는 단오날의 오시(午時)에 채취하여 말렸다 쓰는 것이 효력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쑥은 다목적으로 널리 쓰여지는데 그 특징이 있다.
특히 재액을 쫓는 비방이라 하여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기도 하고 (요즘은 이런 풍속이 거의 사라진 것 같다.)잘 말린 쑥으로 허리 아플 때 찜질을 하기도 하고 모깃불로도 피운다. 그리고 농가에서는 봄철에 연한 쑥을 뜯어다 쑥떡을 만들어 먹는데, 이는 별미의 하나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유행되고 있다. 따라서 근래에 들어와서는 대중 목욕탕에서 쑥을 넣어 약용으로 이용되는 쑥탕이 등장할 정도이니, 이같이 쑥의 이용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쑥은 식용과 약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쑥은 흰털은 긁어서 인주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5월 초 열흘날은 태종(太宗)의 제삿날이다. 이날이면 매년 비가 내리는데 이 비를「태종우」라 한다. 태종이 돌아가 때 세종(世宗)에게 말씀하시기를「가뭄이 바야흐로 심하니 죽어서도 앎이 있다면 반드시 이날 비가 오게 하겠다」하였다.
그 후 과연 이날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 태종은 조선조 제3대 임금(1400∼1419)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특히 백성 사랑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태종의 재위 기간 중에 한 때에 가뭄이 극심하여 농민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내가 상제께 청하여 비를 내리게 하리라」하고 임종을 하였는데 그 후부터 비가 내려 가뭄을 면하고 풍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뭄을 면하고 풍년이 든 것은 오로지 태종의 은혜로 알았으니, 매년 음력 5월 10일에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농가에서는 매우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를 믿는 사람도 없지만, 수리시설과 지하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어느 정도의 가뭄은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전천후 영농(全天候 榮農)까지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유두란 명절의 하나로서 음력으로 유월 보름(6.15)을 말한다.
김극기집(金克己集)에 따르면「동도(경북 경주)에 전해 내려오는 풍속에 유월 보름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버린다. 그리고 계음(계飮=액맞이로 모여서 마시는 술자리)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조의 풍속도 이것을 따라 토속적인 명절이 되었다. 경주에는 아직도 이런 풍속이 남아 있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유두는 이미 신라(新羅)시대부터 시작되어 근세조선에 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두날에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즉 밀가루로 만드는 유두면(流頭麵)을 비롯하여 수단(水團)·건단(乾團)·상화병(霜花餠)·연병(連餠)등이 그것이다.
특히 유두날에 국수(유두면) 을 먹으면 장수한다하여 모두 즐겨 먹는다.
그러나 요즘은 시의(時宜)의 탓인지 이 같은 시식(時食)을 만들어 먹는 가정도 거의 없거니와, 이 같은 내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24절기의 하나로서 소만과 하지 사이에 있는데 날짜는 양력으로 6월 6∼7일에 온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때는 보리도 베어야 하고 볏모는 자라서 모내기를 해야 하는 그야말로 눈코뜰 사이도 없는 무척 바쁜 때이다.
24절기를 따라가며 영농을 한 것이다. 청명이 왔으니 춘경(春耕)을 시작해야 하고 망종이 왔으니 보리도 베어야 하는 등, 일의 시기와 끝맺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이 24절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오늘의 영농은 과학화되고 기계화된 농촌의 대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또한 농촌지도소가 있어 과학적인 영농지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초복·중복·말복을 합쳐서 일컫는 말인데, 여름의 몹시 더운 기간이다. 초복은 하지로부터 셋째 경일(庚日), 중복은 넷째 경일, 말복은 입추로부터 첫째 경일을 말한다. 이와 같이 3복이 모두 경 일에 해당함으로 일명 3경이라고도 하였다.
3복은 1년 중 무더위 때이므로, 이 무더위를 피하고 보신을 위해 먹는 음식이 있었으니, 그는 삼계탕과 구탕(狗湯)이었다.
이 삼계탕은 요즘도 많이 먹는 것인데, 햇병아리를 잡아서 털을 뽑고 배를 갈라 그 속에 찹쌀과 인삼 그리고 마늘 등을 넣어 푹 고아서 만든 것으로서, 원기회복에 매우 좋다하여 각 가정에서 흔히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구탕은 일명 보신탕으로서 개고기를 말한다. 특히 복중에 먹어야 보신도 되고 벽사(壁邪)도 된다하여 많이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요즘은 복날 뿐 만 아니라 여느 때도 많이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개를 잡아먹는데 대하여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개는 사람과 가장 친근한 가축으로서 특히 영리한 개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며, 군사상의 목적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아무 근거도 없는 비과학적인 보신이라는 미명하에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이제 삼가야 될것 같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개의 귀를 잡아 당겼다하여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있었던 일이 있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좀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그들은 으레 한국사람들은 왜 개를 잡아먹느냐고 질문 공세를 편다. 이럴 때면 그들을 이해시키고 변명하기에 진땀을 뺀다. 이런 경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런 점을 가지고 우리를 경원시 하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개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일찍 중국에서부터 유래된 것 같다.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썼다는 사기(史記) 에 따르면「진덕공(秦德公)2년에 비로소 삼복 제사를 지내는데 성안 4대문에서 개를 잡아서 충재(忠災)를 막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개 잡는 일이 곧 복날의 옛 행사였으며, 그래서 지금의 풍속에도 개장이 삼복 중의 가장 좋은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
칠석이란 명절의 하나로서 음력으로 7월 초이렛날의 저녁을 말하는 것인데, 이날 밤은 은하(銀河)의 동쪽에 있는 견우성과 서쪽에 있는 직녀성이 오작교에서 1년에 한 번씩 만난다고 한다. 이 같은 전설은 일찍 중국의 주(周)나라 때부터 전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동소이하나 여기선 김성배의「한국의 민속」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옥황상제에게는 어여쁜 직녀가 있었고 , 옥황상제의 궁전과 은하수를 사이에 건너편에는 견우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옥황상제는 이 젊은이가 착하고 부지런하여, 농사일에 열중함을 인정하여 자기 딸과 결혼을 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사랑에 빠져 결국 맡은 일들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열심히 베만 짜던 직녀는 베틀을 멀리했고, 밤낮으로 농사짓기에 힘을 다하던 견우는 부지런히 일하던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일을 하지 않으니 천계(天界)의 현상이 혼란에 빠져 버렸고, 농작물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사람들은 천재와 기근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본 옥황상제는 크게 노하여 직녀 공주를 은하수 동쪽에 살게 했고 견우는 은하수 서쪽에 살게 하였다. 그러나 둘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을 애통하고 가엾게 여겨서 1년에 한 번씩 칠석날 밤에만 서로 만나게 해 주었다.
이때에 지상의 까치들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 모여 자기들의 몸을 잇대어 다리를 놓고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별의 환희에 넘치는 상봉도 순식간의 일이고, 새벽 닭소리를 듣고 다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칠석날에는 비가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날 오는 비는 견우와 직녀가 1년만에 만나는 환희의 눈물이라고 하며, 또 이튿날 오는 비는 만나자 이별하는 작별의 구슬픈 눈물이라고도 전한다.
또 일설에는 견우와 직녀의 딱한 사정을 안 지상의 까치와 까마귀들이 칠석날 저녁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으니, 그 이름은 까마귀·까치의 합작이므로 까마귀 오(烏)자와 ,까치 작(鵲)자를 따서 오작교(烏鵲橋)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작교가 가설되니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리를 가설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날은 까치를 볼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다음 날에 까치를 보면 머리털이 빠져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다리 가설에 혹사당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칠석날에 책과 옷을 꺼내어 햇볕에 말려두는 풍속이 있다. 이는 칠석날에 말려두면 좀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물에 시루떡을 해다 놓고 샘 제를 지내는 지역도 있으며, 복을 비는 칠성제를 지내는 곳도 있다.
명절의 하나로서 음력 7월 보름날을 일컫는 말인데, 백중(百中)·중원(中元)·백종절(百鍾節) 그리고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이날은 여름동안 안거를 마치고 대중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말하여 참회를 구하며 절에 가서 재를 올린다. 또한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과실과 온갖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먹으면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즐겁게 논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풍속에 백중날을 망혼일(亡魂日)이라 한다.
대개 여염집 사람들은 이 날 저녁 달밤에 채소·과일·술·밥 등을 차려 놓고 죽은 어버이의 혼을 부른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의「시장에 채소·과일이 지천인 것을 보니 모든 사람들이 도처에서 죽은 혼을 천신 하는구나」라고 했다.
또한 충청도 풍속에 노소를 막론하고 15일에는 거리에 나가 마시고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또 씨름놀이도 한다.
그리고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 따르면「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의 예 풍속에 왕녀가 육부(六部)의 여자들을 데리고 7월 16일부터 큰부(大部)의 뜰에 모여 베를 짜기 시작하여 8월 보름에 그 많고 적은 것을 심사해서 진 사람은 주식(酒食)을 갖추어 이긴 사람에게 사례하면서 서로 가무(歌舞)를 하며 온갖 놀이를 하다가 파하였으므로 7월 보름을 백종절(百鍾節)이라 하고, 8월 보름을 가윗날(嘉排日)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어떤이는 말하기를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우란분(盂瀾盆)의 공양을 모방하는 유속을 따라 중원일(中元日)에는 백종(百種)의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하여 복을 빌었으므로 그 날의 이름, 곧 백종(百種)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이 두 설이 어느 것이 옳은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금은 다만 그 이름만 남았을 뿐 이런 행사는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