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읍 어은리에서 태어나 일찍 1934년에 일본(日本)에 유학하여 동경법정대학(東京 法政大學) 졸업한 뒤 만주에서 고등문관(高等文官)시험에 합격하였다. 8.15광복 후 서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였는데, 국가공무원법 등을 제정 통과시키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후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향리에서 농사에 종사하다 사거하였다. 본관은 경주인데 그의 생졸년대는 미상이다.
동학혁명 때(1894) 태안성의 위급함을 상부 기관에 알리고 김위연(金偉然)과 함께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출신지는 태안으로 되어있으나 그의 출생년대와 후손여부는 미상이다. (서산군지 ·충청 향토문화사 1975)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 때 동학군이 태안성을 함락코자 포위하고 있을 때 재빨리 동학군에 가담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멀리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위연은 혼자 총을 들고 다니며 요인들에게 변을 알리는 한 편 자신은 의를 위하여 동학군에게 가세할 수 없다고 외치며 동학군에게 많은 타격을 가하며 분전하다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김위연은 태안 출신으로 알려졌을 뿐 그의 출생연대는 미상이다. 또한 그의 후손의 생존여부도 알 수 없다.
동학혁명 때(1894.10.1) 동학군이 태안성에 침입하고 있음을 보다못해 총을 들어 동학군을 겨누던 순간 뒤에서 달려든 동학군에 의해 타살되었다. 그의 출신지는 태안이었으나 출생년대와 후손의 생존여부는 미상이다. (서산군지 ·충청향토문화사 1977)
태안읍내에 거주하던 지창희(池昌熙)의 처였으나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사위(女壻)에게 의지하여 살아오다 동학혁명이 발발하여 동학군이 반기를 들고 태안성을 공략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과부로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강상(綱常)이 허물어진 이 세상에 살아남을 필요가 없다고 하며 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마침내 1894.10.6에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위4명은 동학혁명 때 태안성 수성의 일화로 유명)
동학혁명 때 유희순은 사과(司果)벼슬에 있었는데, 동학군들이 신백희(申百熙) 태안방어사와 김경제(金慶濟) 별유사를 비롯하여 서리(胥吏)들까지 살해하여 매우 참담한 지경에 놓이게 되자 충의심이 있는 자는 모두 개탄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 유희순은 분연히 일어나 거사를 획책했다. 그의 귀는 왜소했으나 담력은 매우 장대한 남자였다. 그는 우선 90노모를 업고 어린애는 품에 안은 채 깊은 산중에 들어가 허물어져 가는 초가에 피신시키고 집에 돌아와 태안성을 향해 달렸다. 그는 태안성에 올라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을 도모할 것을 궁리중에 있었다.
이때 갑자기 성밑에 3인의 거대한 장한(狀漢)이 나타났다. 한사람은 간담이 철석같은 김익모요, 또 한사람은 의리 지고한 강흥린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심준심(沈浚深)의 손자 심상초였다. 이 네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뜻을 같이하여 태안성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하고 도원결의의 맹세를 했다. 이같이 굳건한 맹세끝에 그들은 마침내 좌병을 모집하는 봉화를 들기로 하고 이를 실천하니 남쪽에서 가병규(賈秉珪)·조붕도(趙鵬道)가 일어나고 또 북쪽에서는 조구현(趙九顯)·김홍제(金洪濟) 서쪽에서는 조재곤(趙載坤)·한상리(韓相履) 등이 이에 호응하여 사기충천하였다. 이 기세를 이용하여 동학군을 체포해서 주모자들은 극형에 처하고, 단순 가담자는 훈계 석방하므로서 태안지역은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된 것이다.
태안읍내에 거주하던 김현숙(金賢淑)의 집에서 노비(奴婢)로 있었다. 성년이 되어 출가할 나이가 되자 주인은 남편을 물색하여 시집보내려고 하였으나, 금단은 끝까지 이를 거절하고 정성으로 주인을 섬겼다. 그 후 불행하게도 어린 남매를 남겨놓고 주인 부부가 세상을 하직하자 금단이는 부모 없는 어린 남매를 자기 자식 같이 양육하여 성혼시키고 마침내 70세의 처녀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온양방씨였으나 그의 생졸년대는 미상이다. (서산군지·충청향토문화사 1975)
윤세원은 무송(茂松) 윤씨로 철종조(哲宗朝) 12년(1861) 9월에 소원면 시목리에서 태어났는데, 자를 양집(兩集) 호를 시암(枾岩)이라 했다.
그는 고향에서 성장하면서 특히 의협심이 강하고 친구와의 신의가 매우 돈독할 뿐 만 아니라 책임감이 강하여 동네 어른들은 물론 동료간에도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시암은 성년이 되어 이원면 포지리에 와서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때 여러가지 생각한바 있어 천도교에 입교하고 이어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태안지방의 동학군 좌대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또한 김춘제는 경주김씨로 이원면 관동에서 살았는데, 동학혁명 때 태안성에서 방어사 신백희를 도와 동학군과 싸우다 전사한 별유사(別諭使) 김경제의 4촌 동생이다. 김춘제는 동학군에 포박 압송되어 태안읍성에서 처형 직전에 좌대장 윤세원이 말하기를 김춘제는 처형할 법적 근거가 없으며 또한 자고로 한 칼에 형제를 처형할 수 없는 일이니 돌려보내라 하여, 김춘제는 사형 직전에 살아나게 되었으니 윤세원에 대한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인품이 늠름하고 선천적으로 통솔력과 의협심이 강한 시암 윤세원은 태안성과 서산읍성 공략에 참전하고 그 여세로 해미읍성을 경유 홍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패잔병이 되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암은 앞으로의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부득이 고향으로 잠시 피신할 것을 결심하고 흥주를 떠나 해미에 이르니 해미병영이 동학군의 두목 윤세원을 놓칠리 없었다. 이렇게 해미에서 체포되어 투옥된 시암은 며칠동안 투옥생활을 하다 어느날 옥리에게 잠시만 옥문밖에 내놓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이유는 해미영장을 만나 보려는 계획이었으나 옥리(獄吏)가 이를 순순히 받아줄리 없었다.
그러나 시암은 이에 단념하지 않고 옥리에게 다시 간청했다. 동학의 두목인 내가 무단히 감옥에서 도망하여 그대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다만 그대의 주선으로 영장을 만나 지난날의 우의와 회포를 풀고 또한 영장에게 본인은 역적모의가 아니고 부패한 탐관오리를 숙청할 목적으로 동학군에 가담한 것을 말하려고 하니 그대는 조금도 의심치 말고 나를 잠시만 나가게 해달라고 간곡히 이야기 하니 옥리도 이에 감탄했는지 영장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렇게 영장을 만난 시암은 자초지종을 말하니 옛날의 우의와 용맹한 그의 담력과 지략에 감동하여 영장이 도주할 것을 암시하므로서 시암은 해미 감옥을 탈출하여 무사히 이원면의 고향으로 돌아와 집으로 가지 않고 막역한 친구 김춘제의 집을 찾았다. 당시의 김춘제의 입장에서 보면 윤세원은 분명히 적이었다. 그의 4촌형인 김경제가 동학군의 손에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제는 지난 태안성의 일을 생각하면 생명의 은인이요 또 과거의 우의를 생각하며 가족 모르게 자신이 거처하는 방 다락 속에 숨겨주었다. 끼니때는 식기 뚜껑에 자기 밥을 나누어 몰래 다락속에 넣어주곤 하였다. 이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연일 계속되니 피차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김춘제의 당질이요 김경제의 아들이 관군에 가담하여 동학군 진압에 노력하다 평정된 뒤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직도 잔당 소탕의 임무를 띄고 있었기 때문에 윤세원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날 당숙의 방을 드나들다 다락속에 윤세원이 숨어있음을 발견하고 당숙에게 사유를 따지며 이는 국법을 어겼으니 당장 인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당숙의 입장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다락속에서 끌려나온 윤세원은 포박되어 사형집행 장소인 통개(관동) 모래밭으로 나왔다. 사형장에는 윤세원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붙들린 동학군들이 한 오라줄에 묶이어 있었는데, 이때 김춘제는 윤세원과 함께 포박된 채 서있었으므로 윤세원을 사살하기 위해선 우선 당숙을 먼저 쏘아야하니 이 광경을 지켜본 당질도 마침내 두 분의 우의에 감동되어 총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일본강점기에 윤세원은 면민의 추대를 받아 이원면 초대 면장이 되어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특히 기미년 흉년에는 가난에 허덕이는 면민을 돕기 위하여 포지리에 있는 사유재산 임야 9정보를 팔아서 양곡을 구입하여 우선 산모와 노약자에게 나누어주었다. 윤세원은 항상 자손들에게「사나이란 생사를 함께 할만한 친구를 가져야 한다」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태안읍 남문리 환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일찍 일본의 큐슈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충청남도 초대 도지사를 지냈다.
태안읍 남문리 192번지에서 출생하여 일찍 일본에 유학해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건국과 더불어 초대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재직했는데 6. 25동란 당시 납북되어 행방불명이 되었다.
태안읍 인평리 사람이었는데, 동학혁명(1894.10) 때 동학군에 체포되어 귀순할 것을 권고 받았으나, 그는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당당한 대장부는 당당하게 죽는 것이다. 어찌 도적의 무리에게 가세하겠느냐 하며 크게 호통쳤다. 이때 동학군이 말하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시대의 요청에 의하여 궐기한 우리들을 어찌 도적이라 하느냐고 물으니, 명숙은 크게 웃으며 하는 말이 나라에 불순하고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꾀하는 것이 어찌 역적이 아니며 도적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말을 들은 동학군들은 대노하여 혹형을 가하니 몸둥이의 살이 남지 않았다. 이때 도주할 것을 권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며 죽음을 두려워함은 의자가 아니라고 더욱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를 지켜본 동학군들은 더욱 대노하여 그의 머리를 치고 두 다리를 잘랐다. 그러나 명숙은 두 손으로 깨어진 머리를 감싸면서 내 입술이 아직 남았으니 도적을 꾸짖기에 충분하다고 외치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후손 여부와 출생 연대는 미상이다.
근흥면 안기리의 어느 집 노비로 살았다. 주인이 노환으로 20여년 와병중에 나무를 해다 불을 때고 밥을 빌어다 정성으로 주인을 섬겼으나 마침내 주인이 세상을 하직 했다. 미구에 구금이도 사망하니 동네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가리켜 충비총(忠婢塚)이라 했다. 그는 연일정씨인데 90세로 장수했다. (1828-1918)」서산군지·충청향토문화사 1975)
조선조의 헌종 4년(1838) 무술(戊戌)에 태안에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청송(靑松)이오 자는 웅도(應圖)였다. 고종 3년(1866) 병인(丙寅)에 과거에 급제(及科)하여 유학(儒學)벼슬을 지내다 뒤에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와 통혼대부(通訓大夫)를 거쳐 고종 25년(1888) 무자(戊子)에 별세하니 향년 50세였다.
고종 13년(1876) 병자(丙子)에 통훈대부 석하(錫河)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뒤에 자를 맹원(孟元)이라 하였다. 순종 4년(1910)에 태안군수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불행히도 취임 수삭만에 병사하니 향년 34세였다. 그의 증손인 관홍(寬弘)이 현재 원북면 황촌리에 거주하고 있다.
공은 근세조선의 숙종 35년(1709)에 출생하여 영조(英祖) 51(1775)에 타계하니 향년 66세였다.
영조 6년(1730)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고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總府都事)의 벼슬길에 오름을 비롯하여 그 뒤에 경력(經歷) 등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