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 21년(1884)에 태안군 남면에서 출생하였는데 본관은 소주(蘇州)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호학총민(好學聰敏)하더니 마침내 유학(儒學)을 비롯하여 서예와 시문에 이르기까지 능한 석학이 되었다. 그는 당시의 우리 사회상을 직시한 끝에 무엇보다도 우리는 신교육의 촉진이 개화의 기초가 됨을 절감하고 태안에 보통학교와 서산읍내의 중학교 설립에 앞장섰으며 아울러 그는 5년간 학무위문으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후 남면 면장으로 13년간 근속하면서 향풍의 쇄신과 지역 발전에 힘써 그 공적이 지대하였으므로, 면민들이 선정송덕비를 세워 그 뜻을 영원히 기리고 있다. (1884∼ 1954)
본관은 무송(茂松)으로 태안 출신이었다. 그는 일찍 문학과 절의(節義)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또한 인조조(仁祖朝) 때는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에 천거되어 벼슬살이를 지낸 일도 있으나, 그의 생졸 (生卒)연대와 후손의 생존여부는 미상이다. (서산군지:충청향토문화사 1975)
본관이 경주로서 철종(哲宗) 2년(1851)에 출생하였는데 뒤에 호를 노백(老柏)이라 하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성품이 근엄 정직하고 박학 독행(博學篤行)하여 명성이 세상에 널리 떨치었다.
노백의 영정은 그의 스승이었던 간재(艮齋)선생과 함께 현재 안기리의 안양사에 안치되어 있어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지금도 근흥면 안기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의 헌종(憲宗) 11년(1845)에 출생했는데, 고려 충선왕(高麗 忠宣王)때의 공신(功臣)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으로 호를 난사(蘭史)라 했다. 어려서부터 한문(漢文)을 수학했는데 머리가 명석하여 감히 다른 학동(學童)들이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시작(詩作)에 능한 대 문장가(大 文章家)로서 위풍도 늠름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강점기(日本 强占期)었던 1924년에 79세로 일생을 마칠 때는 무려 500여명의 조객(弔客)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저서(著書)로는 난사기(蘭史記)가 있으며, 그의 사후(死後)에 후손이 펴낸 난사유고(蘭史遺稿)는 널리 알려진 책이다. 이밖에도 여러권의 시집(詩集)이 있다.
공의 휘는 존화이고 자는 성천(聖天) 호는 연소(蓮巢)로서 회곡(檜谷)공의 7세손인데, 여러대를 태안 땅 풍천촌(楓川村)에서 살았다. 아버지께서는 문장덕행이 원근에 알려졌으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서 학이 품안으로 안기는 태몽으로 1804년 순조 갑자 8월2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큰 체격, 밝은 수염, 아름다운 귀, 맑은 음성 등은 마치 옥석(玉石)과 같았다. 성격이 강유를 겸하고 10세에 글을 잘 지어 향리에서 신동이라고까지 이르게 되었다. 81세 때에 생원시(生員試)에 발탁되어 그 마을의 중추의 인물이 되었다. 부모님께 효가 지극했으며 성명 이기학(性命 理氣學)을 익혀 능하고 성현서(聖賢書)를 읽을 때는 무릎 꿇고 단정히 앉아 때로는 3. 4일 잠을 자지 않았다. 후생을 가르침에 게을리 아니하고 때때로 글 잘하는 선비집에도 출입하곤 하였다. 가세가 몹시 가난했으나 태연하고, 집안이 구차하나 의가 아니면 이를 사양하고 농사를 짓되 몸소 살포질도 하고 물고도 보며 이에 만족하고 이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 산소옆에 서있는 소나무 잎을 송충이가 다 갉아먹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이를 팔라고 권했으나 공은 산소 둘레에 선 나무는 귀중한 나무인데 송충이가 먹었다하여 내 어찌 감히 도끼를 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를 듣는자 모두 의로운 분이라 경탄하였다. 평생에 저술한 남은 원고가 댁에 보관되어 있었다. 서기 1889년 8월 22일에 별세하니 향년 86세였다 산소는 대기리 6번지 축좌에 모셨으며, 부인은 초취가 전주이씨이고 후취는 광주이씨였다. 세상 사람들은 공의 특행이적(特行異蹟)을 기이하게 여겼다. 벼슬도 하지 않고 산간에 있으면서 이름 있는 자를 심상히 여기고 이에 관여치 않고 콩이나 조밥을 천하게 보고 푸른 하늘 맑은 물에 노는 것을 누구나 바라는 바이나 공께서는 이를 좋다하지 않았으므로 듣는자 모두 개탄하였다.
내 늙고 병들어 일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한가히 누워 생각컨대 전일에 사귀어 노는이 몇이 없다. 자연히 마음이 상하도다. 이때 어느날 집안의 조카되는 자 보현(輔顯)이 찾아와 이 글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니 어찌 만세불후의 훌륭한 자를 돌아다 보지 않으리오. 더구나 수십년 사귀어 서로 잘 알고 또한 자세히 내역을 아는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삼가 그 뜻은 대개 이와 같으니라.
1941년 근흥면 안기리에서 출생하여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였다. 1973년 동국대학교를 마치고 그 뒤 1978년에 동국대학교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이듬해「현대문학」의 평론「식민지의 상황도」로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문단 활동에 들어갔는데, 그 후 대학 교수로서 또는 문학평론가로서의 눈부신 활동을 펴다 아깝게도 1990년 8월에 타계하였다.
그 후 1992년 9월에 그의 고향인 용신리 양지바른 언덕에 문학비를 세워 거룩한 뜻을 기리고 있다.
硏究業績 槪要
그의 硏究業績은 韓國現代小說에 대한 作品論, 作家論 그리고 批評文學에 대한 考究가 중심이 된다. 그는 특히 식민지 시대에 活躍한 作家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왔으며, 그 구체적 考究는 이광수(李光洙), 염상섭(廉相涉), 전영택(田榮澤), 채만식(蔡萬植) 등에 관한 作家論이다. 그는 특히 채만식(蔡萬植) 문학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편의 論文을 썼으며 博士學位論文을 통하여 蔡萬植 文學을 총체적으로 조명하여 그 특질을 규명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文學史的 位置設定을 시도해 놓았다.
「蔡萬植의 歷史小說」,「短篇作家로서의 春園」등의 논문은 作品論이 중심이고「轉形期의 批評樣相」은 식민지시대 말기 비평계의 최대 이슈인 世代論을 중심으로 당시의 비평론을 점검해본 논문이다. 단행본으로 출간한「一般文學槪說」은 文學槪論을 강의하기 위하여 준비한 강의 교재이며「韓國現代文學論」은 기왕에 발표한 學藝論文과 함께 주로 文學專門誌에 실었던 評論文, 文學時論등을 일부 정리하여 함께 수록한 評論集이다.
1920년 근흥면 두야리의 추동마을에서 출생하여 1986년 타계하기까지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더욱 옹골찬 활동 시기는 50대부터였다. 특히 타계하기 2년 전인 1984년에는「소년」지의 동화「가짜호랑이」로 신인 추천을 받아 아동 문학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며 사계의 샛별로 등장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할 문턱에서 애석하게도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타계한지 8년만에 그의 유고시집「바람뫼뿐이어라」가 출간되어 가뭄에 단비를 맞은 기분으로 애송되고 있는데, 이 시집을 통해 작자의 시상(詩想)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바람뫼뿐이어라」의 내용을 소개한다.
생존시 발표 작품들·유고시 편·시집「장명수 산조」의 시들·장시 효열문 기등 모두 4장으로 짜여져 있는데, 제1장인「생존시 발표 작품들」의 내용을 보면 밤바람이 가는 곳은 머언 뒷날·화석·소각·서울의 거리·물소리·한국의 가을하늘·물·둔갑·2월·암야·백화산 마애불상·천수만의 어화·만리포 해수욕장 등으로 되어있고 제2장인「유고시편」의 내용은 바람뫼뿐이어라·이기인 봄날에·술·대춘부·봄의말·언덕길·오수·들국화의 마음으로·우리네 김장철 등이다.
평양인(平壤人)으로 자는 학천(學天)이요, 호는 은월(隱月)이고 고려말 첨의중 찬정숙공(僉議中贊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의 23세손이다. 유학자(儒學者)로 학문과 덕행이 관절(冠絶)하고, 시문에 빼어났으며 문집으로 은월집(隱月集)을 전한다. 애시주(愛詩酒)하고 특히 시조에 능하여 그 가락은 멀리 산천에 메아리쳐 듣는이로 하여금 저절로 청흥을 일으키게 하였다.
출사(出仕)치 않고 향리에 은거하여 궁경자급(躬耕自給)하며 괴정서숙(槐亭書塾)을 열어 후학의 육성에 힘썼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은월거사(隱月居士)라 하였다. (공의 장남인 조항일(전태고 교장)이 현재 인천 동춘동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