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께서는 1881년에 태안읍 남문리에서 태어났는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또한 남달리 자비심이 많아 동네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성년이 되어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가 하면, 한 편으로는 상비 약품(常備藥品)으로 가세가 어려운 병약자 돕기를 다반사(茶飯事)로 하였다. 또한 어느 봄날 말을 타고 당진(唐津) 지역을 지나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한 여인이 어린애를 업고 나무껍질을 열심히 벗기고 있었다. 김공은 말을 멈추고 여인에게 다가가 그 용도를 물으니 대용식(代用食)으로 끼니를 잇기 위함이라 했다. 이 말을 들은 김공은 불쌍히 여겨 용돈 일부를 즉석에서 꺼내어 주니, 여인은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며 이 은혜는 영원히 익지 않겠으니 주소·성명이라도 알려달라고 간청했으나, 공은 그대로 길을 떠나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김공은 많은 소작인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망하거나 혹은 이사하더라도 소작권(小作權)을 빼앗지 않았으며, 또한 흉년이 들어 논 한마지기에서 수확량이 5말 미만이면, 소작료를 받지 않고 전량 돌려주었다. 고리고 초근 목피(草根木皮)로 생활을 이어가는 춘궁기(春窮期)에는 곡물 값을 내려서 팔고 따라서 말(斗)도 후하게 되어주었다.
이외에도 많은 자선 사업을 실시하여 원근 각지에서 주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지금도 태안읍 남문리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우뚝 서 있다.
박공(朴公)은 조선조(朝鮮朝)의 헌종(憲宗) 14년(1848)에 안면읍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인자하더니, 성인(成人)이 된 뒤부터는 자선(慈善)·공익(公益) 등을 위해 금품 희사(出損)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또한 그는 마음이 정직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므로 비리(非理)와는 절대 영합하지 않았다. 공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됨,「재산은 모여지면 홑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주위의 어려운 빈민들을 구제(救濟)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숭앙(崇仰)을 받았다.
벼슬은 안흥진 첨절제사(安興鎭와僉節制使) 충청남도 봉세관(封稅官)을 역임하였는데, 한 많은 일본 강점기(日本 强占期)인 1916년에 타계(他界)하니 향년 68세였다. 공이 사거(死去)하니 주민들은 그의 생전의 훌륭한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안흥항 입구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일본 강점기(日本 强占期)었던 1914년에 원북면 방갈리 가시내서 태어났다. 공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동호(東湖)인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자비심(慈悲心)이 남달리 뛰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남아입지 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이란 말이 있듯이 장차 남아의 웅지(雄志)를 품고 이를 실천하고자 계획을 세운 끝에 우선 출향(出鄕)하기로 결심하고 어린소년기의 13세 때에 정든 고향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鏡道)로 떠났다. 때는 일본 강점기(日本 强占期)었으므로 모든 것이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안이한 사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야 한다는 굳건한 초지 일념(初志一念)으로 싸워나가야 했다. 특히 국권 회복(國權回復)의 지름길은 민족의 단결과 슬기를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 슬기를 모으기 위해선 우선 교육력(敎育力)이 뒤따라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은 자신부터 배우기로 결심하고 함남중학교(咸南 中學校)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어렵게 위 학교를 마치고, 1932년에 조선운수주식회사 함흥지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다 뜻한바 있어 이 회사를 그만두고 1937년에 함경남도에서 해륙운수사(海陸運輸社)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 고향에서 청년들을 불러들여 일터를 제공해 주는 한 편, 장차 힘을 합하여 조국 광복(祖國光復)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하였다. 또한 공은 본래 천성이 지효(至孝)한지라 항상 부모님을 옆에서 평안히 모시지 못함이 한이 되어오던 중 마침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함흥(咸興)으로 모시어 그동안 못다 한 효도를 극진히 행함으로서 주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조국 광복과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월남(越南)하게 되었는데, 이땐 이미 부모님께선 타계(他界)하고 계시지 않았다. 이역 만리(異域萬里)에 부모님의 무덤만 남겨두고 귀향(歸鄕)하는 이 애통한 마음은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또한 막대한 불효(不孝)가 아니고 무엇이랴. 귀향 후 인천(仁川)에서 자유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최선을 다하여 오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대한노총 중앙본부(大韓勞總 中央本部)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뒤 1964년에는 인천에서 대양석유주식회사(大洋石油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사업가로서의 기틀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회사를 경영하여 오던 중 점점 사세(社勢)가 발전하여 마침내 1967년에 이르러, 회사명을 동양석유주식회사(東洋石油株式會社)로 개칭하였다.
공은 이렇게 사업가로서 두각(頭角)을 나타내는 한 편, 생활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또한 야간 학습(夜間學習)을 하는데, 장소가 없어 매우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인천고시학원(仁川考試學院)의 사정을 전해 듣고, 즉시 자기집 마루와 2층 거실을 무료로 선뜻 내어주어 1년간 사용케한 일을 비롯하여 고향의 여러 학교 시설비 보조와 각종 교구(校具) 등을 구입하여 기증하는 일을 예사로 하였다. 또한 낙후(落後)한 고향의 발전을 위해 항상 노심 초사하여 오던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력(敎育力)의 신장(伸張)임을 깨닫고 그것도 현실적으로 지역 사회의 기간이 될 수 있는 여성 교육의 시대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난 1973년에 태안읍 남문리에 토지 4만여평을 구입하여 학교법인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드디어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를 개교하니 때는 1974년 4월 27일이었다. 1974년 3학급으로 개교한 태안여상은 이제 30학급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하여, 이미 8천500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이 시간에도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앞서가는 산업 기능인으로서 봉사하고 있다. 또한 태안여상은 현재 1,500여명의 학생과 70여명의 교직원이 하나가 되어 활기차게 목표를 향해 약진하고 있으므로, 국내의 실업계 학교 중에서도 유망한 교육 기관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은 태안읍 남문리에서 태어났다. 근검 절약(勤儉節約)의 현대적인 경제 원리(經濟原理)를 일찍 터득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잘 선용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런데 공은 기미년(己未年 : 1919)의 가뭄이 몹시 심하여, 많은 빈민들이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몹시 안타깝게 여겨 벼 200석을 서산군청에 희사하여 빈민 구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밖에도 크고 작은 공익 사업에 많이 출연(出捐)하였다.
공은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서 태어났는데, 태안 출신의 이기석(李基奭)이 고창군수(高敞郡守)로 재직하다 사직하고 귀향(歸鄕)할 때 따라와 태안에서 정착(定着)하게 되었다. 그는 태안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한 편, 상업에도 손을 대어 마침내 지방굴지(屈指)의 지주가 되었으며, 또한 삭선리에 과수원·읍내에 정부미(政府米)를 도정하는 정미소(精米所)를 경영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공은 재산은 모이면 그것을 보람있게 써야한다는 것을 깨닫고, 서산여자중학교 설립 기금과 그 유지비조로 거금(巨金)을 회사하고 또 그의 말년에는 아들 3형제가 생활할 정도의 재산만을 남겨놓고 모두 태안중학교를 비롯하여 태안국민학교·태안읍사무소·태안의용소방대 등에 희사하였다.
공은 태안이 낳은 위인 이희열(李希烈)의 4남이다. 그는 천성이 돈후(敦厚)하고 정직하며 또한 몸가짐이 근엄하고 명예를 탐내지 않으며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겸양 지덕(謙讓之德)과 공익심(公益心)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위로 형인 기석(基奭)·기훈(基訓), 기상(基祥)의 4형제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영위 하였다.
1906년 세계 정세의 추리를 느낀바 있어 일본에 건너가(渡日) 3개 여월 일본각지(日本各地)의 선진적인 농촌 실태를 상세히 살펴보고 귀국했다. 이렇게 일본을 보고 돌아온 그는 우선 농사법의 개량과 조림(造林)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8년에 태안읍 상옥리에서 화림농장(華林農場)을 조성하여 잠업(蠶業)·과수양묘(果樹,養苗) ·조림(造林) 그리고 일반 농사 등의 여러 사업을 직접 종업원과 함께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자가(自家)의 영농법을 중심으로 소작인(小作人)들의 농사 개량 그리고 인근 주민들까지도 새로운 영농법을 지도하였으므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이 화림농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업적은 조림 사업이었다. 벌거숭이 붉은 산을 울창한 숲으로 만든 것이 무려 560여 정보였고, 이에 식재한 묘목이 130여만 그루였으며, 또한 파종한 솔씨가 무려 204석이 소요되었다 하니, 조림 사업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농민들에게 조림의 중요성과 농사 개량의 긴요성을 역설하는 한 편, 직접 재배한 상묘(桑苗)·흑송(黑松)·스기(杉木)·히노끼(檜木)·낙엽송(落葉松) 등을 비롯하여 유실수(有實樹)인 사과·배 등의 묘목까지 합하여 무려 52,200여 그루를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또한 그는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벼·보리·감자·무우·배추 등의 개량된 종자와 함께 개량 종돈(改良種豚)까지도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개량된 종자의 철저한 보급을 위해 무이자 대부와 더불어 상호 교환의 방법을 활용하기도 했으며, 또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농자가 없는 사람에게는 무이자로 농자를 대여했는데, 그 액수가 무려 4,800여원에 달했다 한다. 이밖에도 자선(慈善)과 공익 사업(公益事業)에 직접 희사한 금품이 막대하였고 아울러 1916년부터 10년간에 걸쳐 4형제 명의로 출연(出捐)한 금액이 무려 1만여원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공께서는 이 고장에 학교가 없어 후진들이 교육을 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마침내 광무(光武) 9년(1905) 9월에 화양의숙(華陽義塾)을 세웠다.
이렇게 화양의숙이란 신교육 기관을 설립한 그는 서울에서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여 매년 1,000여원의 경비를 부담하면서 지방 자제들의 신교육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후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1911년에 화양의숙의 경영권을 태안군에 이양함으로서 이것이 태안공립보통학교(泰安公立普通學校)로 개칭된 것이다.
개칭된 이 학교가 오늘의 태안국민학교인 것이다.
그리고 공께서는 소작인의 집단 구역에는 농계(農契)를 조직케 하여 매년 지주와 소작인의 벼 5되(升)씩을 거출해서 이를 저축토록 하여 저축 관념을 생활화시켰는데, 그 성과가 매우 양호하여 계 수 25개에 계원이 무려 1,590명에 달하였고, 저축고는 정조(正租) 1천 65석이 되었다. 또한 1925년에는 공의 장남인 병진(秉鎭)으로 하여금 화림농사실습소(華林農事實習所)를 세우게 하여 매년 3,000여원의 경비를 부담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자립 자영(自立自營)의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벼 30석을 재정으로 화림자조회(華林自助會)를 만들어 취학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야학으로 문맹 퇴치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같은 공의 자선 사업의 업적은 일찍 이 지방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본도 도지사로부터 여러 차례 포상이 있었고 또 1929년에는 일본천황(日本天皇)인 쇼와(昭和)의 관국연(觀菊宴)에 초대되어 도일(渡日)하기도 했다.
공은 태안읍 동문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인데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지효(至孝)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특히 부모님이 병중(病中)일 때는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약품을 구하여 오는가 하면, 병세가 악화될 땐 서슴치 않고 단지(斷指)하여 주혈(注血)하는 등 극진한 효성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의 회갑(回甲)에는, 기념으로 공익(公益)사업에 출연(出捐)하였으며, 그리고 타계(他界)한 뒤에는 더욱 근검 절약하여 가세가 점점 번창하여 갔다. 그뒤 1923년에는 별세한 아버지를 추모하는 사업으로, 생전에 왕래하느라고 불편을 느꼈던 여의천(如意川)에 여의교(如意橋)를 가설하였고, 또 동년 5월에는 공사비 2천170원을 들여 인평리에 흥인교(興仁橋)를 가설하는 등 자선 사업에 앞장서는 사회사업가였다.
공은 일찍 조선조(朝鮮朝)의 순조(純祖) 30년(1830)에 태안읍 남문리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정직하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민들의 이목(耳目)을 끌었다.
공은 30세 때 3마지기의 논을 받아 분가하였는데, 1년 경작 후에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적수 공권(赤手空拳)으로 부지런히 가업에 종사하는 한 편, 부업에 힘써 마침내 논 5마지기를 사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공의 가세확장의 기반이 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영농과 함께 제염업(製鹽業)에 착수하여 불과 몇 년 뒤엔 연산(年産) 2,500석의 소금을 생산하였다. 공은 이렇게 생산된 소금과 추곡(秋穀)을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 반출(搬出)하였는데, 이 반출 과정에서 불량한 선원(船員)을 만나 막대한 손실을 입게되었다. 이로 인해 공은 도산(倒産) 직전에 이르게 되었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더욱 근검 절약하여 마침내 도내(道內)에서 으뜸가는 재산가(財産家)가 되었다. 이는 모두 비범한 공의 지혜와 또한 부인의 내조의 공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며 모은 재산을 보람있게 활용하기 위해 공은 우선 논 100마지기를 종문(宗門)의 공동 재산으로 희사하고 유사(有司)를 정하여 이를 관리토록 했다. 그리고 4남인 기승(基昇)으로 하여금 소작인 저축농계(貯蓄農契)를 설립토록 하여, 농사법의 공동 개량과 도열병(稻熱病) 재해시의 공동 구조 자금을 만들게 하여, 보다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영농을 하도록 했다.
또한 1713년에는 벼 90석을 출연(出捐)하여 춘궁민(春窮民)을 도왔으며, 다시 3년 뒤인 1916년에는 벼 400석을 태안 지역의 7개면 206개 부락에 희사하여 각 면별(各面別)로 산업 저축계를 조직케 하였는데, 이는 산업 장려와 근면 저축의 미풍을 권장하는 동시에, 흉년과 기타 천재 지변이 발생했을 때의 구조 기금을 조성하여 두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준친척(準親戚) 11가구에 벼 20석을 희사하여 공동의 기본 재산을 조성토록 하였고, 또 서산 지역에 벼 80석을 희사하고, 다시 해미 지역에는, 3남인 기상(基祥)의 명의로 벼 30석을 출연하여 공동 저축계를 만들도록 하였다. 공께서는 일찍 장남인 기석(基奭:군수 역임)·2남 기훈(基訓:의관(議官) 역임)·3남 기상(基祥:군수 역임)·4남 기승(基昇:참봉(參奉))등 4남을 두었는데, 4형제 모두 효심(孝心)과 우애심을 가진 지혜로운 형제들이었으며, 또한 제가 처세(齊家處世)와 자선 등으로 일향 사표(一鄕師表)가 되었다. 공은 이 4형제들을 가사(家事)와 사업 경영의 적재 적소에 알맞게 배치시켜 일을 맡겼다. 즉 장남은 회계·차남은 가헌(家憲)·3남은 외교(外交)·4남은 농무(農務)였는데, 모두 질서 정연하고 숙연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리고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시킬 때는 반드시 4형제가 서로 합의한 뒤에 그 계획서를 만들어 아버지의 결재를 받은 다음 이를 집행하였다. 또한 공은 일찍 가헌(家憲)을 만들어 이를 실천해 왔는데, 그것은 을사협의안(乙巳協議案)·신해신념잠(辛亥新年箴)·갑인유신서(甲寅維新書) 등의 3편과 윤상(倫常)·가규(家規)·교육(敎育)·재정(財政)·경리(經理)·식산(殖産)·흥업(興業)·위생(衛生)·구휼(救恤)·저축(貯蓄)의 9개 항목, 그리고 실행 세칙 수 백조로 되어 있었다.
공이 이처럼 많은 자선과 공익 사업을 하다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인 1918년에 향년 88세로 별세하니 조석으로 조객(弔客)이 무려 5,000여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공의 타계를 몹시 슬퍼하였다. 태안읍 평천리에 그의 뜻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가 서있다.
공은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 13년(1876)에 소원면 시목리(所遠面 枾木里)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자(字)는 사권(仕權)이요,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돈후(敦厚)하더니 성장하면서 자선 사업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공은 약간의 부모 유산을 바탕으로 근검 절약하여 당대에 천석(千石)군의 대지주(大地主)가 되었다. 그러나 경작인으로부터 가혹한 소작료를 징수치 않았으며, 또 춘궁기(春窮期)나 추석 명절에는 인근 주민들은 물론 타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쌀을 나누어 주는 한 편, 세금의 대납(代納)까지도 예사로 하는 등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것은, 서산여자중학교(瑞山女子中學校) 창립 당시에 원북면 동해리에 있는 자기 소유 토지 일만여평(一萬餘坪)을 선뜻 회사한 일이다. 이 같은 막대한 회사가 학교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아울러 군내 지주들에게는 일대 경종(一大警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손자를 시켜 고향에 농민학교(農民學校)를 세워 운영케 할 정도의 애향심이 투철했으며, 아울러 자녀들에게는 항상 낭비와 사치를 하지 말라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실시했다. 공은 근검 절약과 적선으로 방대한 토지가 8. 15 이전까진 잘 유지되어 왔었으나, 그 후 토지 개혁에 따라 소작인들에게 넘어갔다.
공의 별세 뒤에 그의 생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소원면민 일동과, 원북면 양산리 장대리 주민 일동이 세운 2개의 송덕비가 소원면 시목리에 서 있다.
공의 자는 공준(公俊)이고 호는 소남(小南)이며 본관은 절강(浙江)이다. 그는 유격장군 갈송(遊擊將軍 碣頌)의 후손인데, 천성이 온량(溫良)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특히 소남은 남달리 교육에 대한 관심이 컸으므로 김병년이 안면도에서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창건할 때 선뜻 거액을 희사하였고, 또 학교 운영비를 10여년간 대어주는 등 학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지대한 공익 사업가(公益事業家)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