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姓)의 내력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면, 우리나라의 성(姓)은 모두 한자(漢字)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한자문화를 받아들인 뒤에 사용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고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高句麗)는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고씨(高氏)라하고, 주몽은 그 신하인 재사(再思)에게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默居)에게 소실씨(小室氏)의 성을 사성(賜姓)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백제(百濟)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扶餘) 계통에서 나왔다하여 그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신라(新羅)는 박·석·김(朴·昔·金) 3성의 전설이 있으며, 또한 제3대 유리왕 때에 육부(6部=6府)에 사성(賜姓)하여 즉 양부(梁部==閼川陽山村)에 이씨(李氏), 사양부(沙梁部=突山高墟村)에 최씨(崔氏), 점양부(漸梁部=茂山大樹)에 손씨(孫氏), 본피부(本彼部=□山珍支村)에 정씨(鄭氏), 한기부(漢祈部=金山加利村)에 배씨(裵氏), 습비부(習比部=明活山高耶村)에 설씨(薛氏)의 성을 주었다고 하였으며, 또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 수로왕(首露王)도 황금의 알에서 나왔다하여 그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상 살펴 본바와 같이 3국은 고대 부족국가부터 성을 사용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실은 모두 대륙문화를 받아들인 뒤에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가 중세인 12세기 초에 김부식(金富植)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도 이를 실증해 주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 시대(眞興王時代 540∼576)에 세워진 경남 창령(慶南昌寧), 서울 북한산(北漢山=지금은 서울 국립박물관에 옮겨 놓았음). 함흥 황초령(咸興 黃草領), 단천 마운령(端川磨雲領)에 남아있는 진흥왕의 4개 순수비(巡狩碑)와, 진지왕(眞智王 3년(57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대구의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1946년 임창순(任昌淳)이 발견함)와 진평왕 시대(眞平王時代 579∼632)에 세워진 경주의 남산 신성비(南山新城碑) 등에 나타나 있는 인명(人名)을 보아도 성을 사용한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은 없고 우리말로 된 이름 뒤에 그 사람의 본(本)이라 할 수 있는 소속 부명(所屬部名) 또는 촌명(村名)을 사용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식(中國式)의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中國文化)를 받아들인 이후로써, 고구려는 사용 연대를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대략 장수왕(長壽王:419∼491) 때부터 중국(中國)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으며, 백제(百濟)는 근초고왕(近肖古王 : 346∼376) 때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다시 무왕(武王 : 600∼641)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 540∼576) 때부터 김성(金姓)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 귀족의 관료층에서부터 사용하였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中國)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三國)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씨(高句麗高氏)·백제 여씨(百濟餘氏)·신라 김씨(新羅金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 외에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이고, 백제는 사(沙) · 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묘(苗)·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고니(古이)·흑치(黑齒) 등이며, 신라(新羅)는 박(朴)·석(昔)·김(金)·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등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으로 우리나라의 성의 유래에 대하여 대략 살펴보았으나, 한 마디로 그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성(姓)의 사용은 백제의 근초고왕 때인 4세기초엽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