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공행건 영세불망비는 본래 서기 1861년(崇禎二百三十四年)에 동비(銅碑)로 안흥성내(安興城內)에 세운 것인데, 그뒤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에 들어와, 그들이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철수(撤收)해 갔었다.
1945년 광복(光復)과 더불어 30여년이 지난 뒤 이같은 사실을 알고 당시의 이관현(李寬鉉) 서산군수께서 지난 1978년에 현재의 위치인 안흥항 입구에 오석비(烏石碑)로 복원(復元)하여 다시 세우고 가공(賈公)의 덕을 기리게 한 것이다.
표면에는「行水軍兵馬僉節制使 賈公行健永世不忘碑」라고 종서(縱書)로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이면(裏面)에는 다음과 같이 비문(碑文)이 쓰여 있다.
이 석비의 규모를 살펴 보면, 농대석에서 가첨석까지의 총길이가 1.97m, 비신(碑身)의 높이 1.32m, 폭 46㎝, 농대석 가로 75㎝, 세로 47㎝, 높이 22㎝, 그리고 가첨석의 높이 43㎝, 가로 75.5㎝, 세로 50㎝로 되어 있다.
이「박동진 영세불망비는 앞의 김좌근 영세불망비(金左根 永世不忘碑)와 함께 근흥면 정죽리(近興面 程竹里)의 안흥항(安興港) 입구에 서 있다.」
이 석비는 가첨석 없이 농대석과 비신만으로 이루어졌는데, 비신 높이 111㎝, 폭 57㎝, 두께 21㎝ 그리고 농대석의 크기는 가로 81㎝, 세로 44㎝, 높이 15㎝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석비의 표면에는 중앙에 한자(漢字)로「行僉節制使朴公東鎭永世不忘確라고 크게 종서 (縱書)로 음각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도 명(銘)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노천에서 있었으므로 비바람에 할퀴고 깎이어서 판독(判讀)할 수 없었다. 또한 비석의 이면에는「光緖十六年庚寅二月 日 立」이라 쓰여져 있으니, 이는 이 비석의 건립 연월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광서 16년 경인」이란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 27년으로서, 서기(西紀)로는 1890년이 되는 것이다. 1890년이면 올해로 100년이 되는 셈이니, 100년 동안 노천에서 비바람에 시달려 왔으므로 비문(碑文)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리 없다.
이병연(季秉延)이 펴낸 조선환여승람(朝鮮환與勝覽)에 따르면 설비(竪婢)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朴東鎭字士元號湖隱密陽人駱村忠元后性亢□氣磊落不□於 人身致巨萬歷安興鎭僉使忠南捧稅 官素喜施興每□□荒周窮□貧待而擧火者多安興人民立石□德」
이「가공행건애민선정비」는 앞의「가공행건 영세불망비」와 함께 그 주인공이 동일인(同一人)으로서 같은 장소인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항 입구에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애민선정비는 가첨석이 없는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규모를 살펴보면, 비신의 높이가 119㎝, 폭 43㎝, 두께 20㎝ 그리고 농대석의 크기는 가로 65㎝, 세로 44㎝, 높이 15㎝로 이루어졌는데, 표면에는「행첨절제사 가공행건애민선정비」라고 한자(漢字)로 크게 음각되어 있으며, 이면에는「崇禎二百三十三年庚申四月 日 監」이라쓰여져 있다.
이「숭정 233년 경신」은 조선조(朝鮮朝)의 철종(哲宗)11년으로서 서기로는 1860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가공(賈公)의「영세불망비」인 동비(銅碑)보다 1년 전에 이 석비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무려 10여개에 이르는 크고작은 석비가 들어서 있는데, 비각을 세워 이를 보호하지 않으면 영구 보존이 불능할 것이다.
5. 방어사이공원회애민선정비(防禦使李公元會愛民善政碑)
이「이공원회애민선정비」도 위의 가공행건 애민선정비와 함께 안흥항 입구의 같은 장소에 세워져 있다.
이 석비의 규모를 살펴 보면, 가첨석 없이 받침돌(농대석)과 비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신의 높이가 106㎝, 폭 45㎝, 두께 16㎝ 그리고 농대석의 크기는 가로 82㎝, 세로 50㎝, 높이 20㎝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석비 표면의 중앙에는 종서(縱書)로「防禦使李公元會愛民善政碑」라 쓰여져 있고, 그 좌우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읽을 수 없다.
또한 이면(裏面)에는 이 석비의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으나, 역시 오래되어 판독(判讀)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6. 방어사이공희눌영세불망비(防禦使李公熙訥永世不忘碑)
이「이공희눌 영세불망비」도 위의 이공원희 애민선정비와 함께 안흥항의 입구인 같은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
이 영세불망비도 가첨석 없이 농대석과 비신만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141㎝, 폭 72㎝, 두께 27㎝ 그리고 농대석의 크기는 가로 90㎝, 세로 72㎝, 높이 18㎝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석비 표면의 중앙 부분에는 한자(漢字)로 크게 「防禦使李公熙訥永世不忘碑」라 쓰여져 있고 , 그 좌우쪽에도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너무 오래되어 완독(完讀)할 수 없는 것이 흠이었다.
또한 이면에는 이 석비의 건립 연대를 밝히는「癸酉十二月 曰 立」이라고 쓰여 있다. 이 계유는 고종(高宗)10년으로서 서기 1873년에 해당되므로 이 비는 세운지 100여년이 지난 것이다.
김옥현은 조선조(朝鮮朝)의 정조(正祖) 5년(1781)에 세환(世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로서, 연산군(燕山君) 때의 학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데, 그가 16세 때인 정조 21년 (1797) 5월에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서산(瑞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본래 천성이 착하고 지효(至孝)한 옥현은 서산까지 따라가서 아버지를 돌보는 동시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옥리(獄吏)에게 호소하니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치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원님께 아버지의 억울함을 혈서로서 호소하는 등 다각적으로 애원하며 간청했으나, 마침내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서울로 올라가 임금님께 직접 아버지의 억울함을 알리기로 작정하고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서울을 향해 떠났다.
생전 처음 서울에 올라온 옥현은 금호문(金虎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대신(大臣)들이 출입할 때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역시 아무런 보람없이 이미 2개여월이 흐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끼니도 드는둥 마는둥 노숙(露宿)하며 이렇게 수 개월을 지내다보니 건강에도 지장이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에는 아랑곳 없이 오로지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벗고 하루 속히 출옥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은 옥현은 굳은 의지를 되새기며 한결같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어느날, 임금님께서 행차하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혜정교(惠政橋) 밑으로 장소를 옮기어 그곳에서 부복(俯伏)하고 있는데, 마침내 어가(御駕)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가가 혜정교 위를 지날때 옥현은 엄동의 추위도 아랑곳 없이 웃옷을 벗고 쇠를 두들기며 진심으로 아버지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니, 행차하시던 임금님도 이에 감동하시어 민원을 청취하셨다.
이같은 지효한 옥현의 지성으로 그의 아버지는 즉시 감형되어 외지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정조 24년(1800)에 사면(赦免)되었으나, 이 기쁨도 함께 나누지 못한채 옥현은 그동안 쌓인 고생과 영양실조 등으로 인하여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마침내 아버지의 유배지였던 경성에서 사망(1800)하고 말았다.
희비 쌍곡선이라더니 기쁨도 나누기 전에 이같은 불행에 접한 아버지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옥현의 시체를 고향인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로 운구하여 안장(安葬) 했다.
그후 순조(純祖)8년(1808)에 이 갸륵한 옥현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지니, 동년 9월27일에 지금의 태안읍동문리(泰安邑東門里)에 세우고 그 뜻을 기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