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석은 조존성(1554~1627)의 것인데, 조존성은 36세 때인 조선조의 선조 24년(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1593년엔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그 뒤 성균관의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이어 예조좌랑(禮曹佐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호조정랑(戶曺正郞)· 해운판관(海運判官)등을 거쳐 1607년에는 서산군수를 역임하고, 또 1623년에는 형호조참판(刑尸曺參判)·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 府副總管)을 역임 하였다.
그리고 1624년 이괄(季适)의 난 때는 검찰사(檢察使)로 인조(仁祖)를 공주로 호종 하였다 환도(還都)한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 갔다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가 되었다.
그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분조(分朝)의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세자(世子)를 따라 전주(全州)에 내려갔다 환도해서 병사하니 향년 73세였다.
이 조존성의 지석(誌石)은 지난 1976년 5월 10일에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성터에서 발견한 것이다.(발견자 박춘석, 최현묵)
조존성의 자는 수초(守初), 호는 정곡(정谷), 용호(龍湖)이며 본관은 경기도양주(楊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