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은 서해안에 돌출한 반도이므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안선이 길고 따라서 굴곡이 심한 곳이다.
이같은 지리적인 요건으로 인하여 옛부터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므로 해안선의 각 요처에 진영(鎭營)을 두고 그 방위에 힘을 쏟아온 곳이다.
진영이란 조선조(朝鮮朝) 때에 각 병영(兵營)·수영(水營)·감영(監營) 밑에 설치했던 지방대(地方隊)의 직소(職所)를 일컬음인데, 이를 지키는 진영장(鎭營將)으로 우후(虞侯)·첨사(僉使)·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萬戶) 등의 계급이 이에 딸려 있었다.
이 소근진은 소원면 소근리에 설치했던 진영(鎭營)을 일컬음인데, 태안군내에서는 최초의 진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 진을 설치(設鎭)한 것은 영락 2년 갑신(永樂二年甲申)으로 조선조(朝鮮朝)의 태종(太宗)4년(1404)인데, 당시는 만호(萬戶)를 두어 다스렸으며, 명칭은 오근이포(汚斤伊浦)라고 했다.
그 후 60여년이 지난 성화 3년 정해(成化三年丁亥) 조선조 세종(世宗)12년 (1467)에 영장(營將)이 첨사(僉使)로 승격하고 따라서 진호(鎭號)를 소근진(所斤鎭)으로 고치었다.(改鎭)
그리하여 좌도 수군 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이 되어 첨절제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1467년에 소근진으로 개진(改鎭)된 명칭이 지명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데, 그 이전의 명칭을 보면 1530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319쪽에는 오근이포(汚斤伊浦), 민족문화추진회가 발행한 고전국역총서42, 국역 신중동국여지승람Ⅲ 원문편(原文篇) 41쪽에는「오근이포(汚斤伊浦)」로 되어 있고, 국역편 소근포진조(所斤浦鎭條) 131쪽에는「후근이포(朽斤伊浦)」로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한 책에서도 일치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72년에 간행된 태안읍지에는 오근이포(汚斤伊浦) 그리고 그 후 1927년에 발행된 서산군지에는 다시 오근이포(朽斤伊浦)로 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汚→朽→汚→所(오→후→오→소)로 변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는데, 상게서(上揭書) 서산군지에「所斤浦鎭一名朽斤伊浦......라 하였으니「오와후·소」의 음운학적(音韻學的) 연구가 기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근진에서는 안흥지역에 분견대(分遣障)를 설치했는데, 이를 안흥량수(安興粱戌)라 하여 소근진첨사가 군병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9세기 말엽 소근진에 배치되었던 군비 실태를 보면 첨사무종3품(僉使武從三品)1명, 방졸(防卒)41명, 선창대장(船倉代將)1명, 지고관(知鼓官)1명, 기패관(旗牌官)10명, 교사(敎師)2명, 훈도(訓導)2명, 포도관(捕盜官)4명, 군졸(軍卒)303명 그리고 전선(戰船)1척, 방선(防船)1척, 병선(兵船)1척, 사후선(伺候船)3척이 배치 됐었다.
이 안흥진은 근흥면 정죽리(近興面程竹里)의 안흥성내에 두었으나, 그 원류(源流)는 요아진(要兒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조(高麗朝) 때 설치 되었던 이 요아진은 지금의 신진도(新津島)를 일컬음인데, 요아진이 어느때 폐진(廢鎭) 되었는지 그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여송 양국(麗宋兩國)의 공적인 통교가 두절된 명종(1171~1197) 때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후 조선조(朝鮮朝)의 세종(世宗)12년(1467)에 소근진 첨사(所斤鎭僉使)의 파견대인 안흥량수(安興梁戌)를 실치 하였는데, 186년 뒤인 효종(孝宗)4년 (1653)에 이를 화정도(花亭島)로 옮겼다.
화정도로 옮긴 안흥량수는 2년 뒤인 1655년(孝宗 6)에 안흥성(安興城)의 축조와 더불어 다시 성내로 옮겨 와 진영으로 독립함으로서 비로소 안흥진(安興鎭)이 설치 된 것이다.
안흥진의 군비 실태를 보면 첨사 무종 3품(武從三品)1명, 진방졸(鎭防卒)87명, 지고관(知鼓官)1명, 선창대장(船倉代將)2명, 기패관(旗牌官)10명, 교사(敎師)2명, 포도관(捕盜官)4명, 훈도(訓導)2명, 화포교사(火砲敎師)2명, 군졸(單卒)304명 그리고 거북선(龜船)1척, 병선 1척 방선 1척, 사후선 3척 등이 배치 되어 있었다.
안흥진의 설진은 소근진 보다 100여년 뒤에 이루어졌지만, 진성(鎭城)의 규모나 군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소근진보다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진명 | 방졸 | 군졸 | 선창대장 | 화포교사 | 거북선 | 첨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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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진 | 87명 | 304명 | 2명 | 2명 | 1척 | 1 명(종3품) |
소근진 | 41명 | 303명 | 1명 | 0 | 0 | 1 명(종3품) |
이 안흥량수는 본래 소근진첨사의 파견대가 수자리하던 곳인데, 1655년(孝宗 6) 안흥진으로 승격되어 안흥성내에 설진하였다.
최초로 안흥량수가 설치된 것은 1467년(世宗 12)인데, 그 장소는 분명치 않다.
그뒤 1653년(孝宗 4)에 화정도(花亭島)로 옮겼다가 2년 뒤에 안흥성의 완공과 더불어 성내로 옮겨 와서 진으로 승격하였다. 그런데 이 화정도가 어느 섬인지 분명치 않다.
이 요아량수는 본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분병(分兵)이 수자리하던 곳인데, 본대(本隊)의 위치와 명칭이 미상(未詳)이다.
또한 요아량수의 설치 장소가 막연하게 안면도(安眠島)라고만 하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신중동국여지승람(1530年刊)의 서산군 관방조(關防條)에 보면「要兒梁戌在郡南一百四十二里水軍節度使兵戍之」란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을 보면「요아량수는 군에서 남쪽으로 142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로 되어 있는데, 이 142리는 55.8㎞에 해당 된다.
이 142리가 어느정도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믿고 ㎞로 환산하면 위와 같이 55.8㎞가 된다.
그러므로 우선 서산에서부터 55.8㎞에 해당되는 지점을 안면도내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 거리는 승언리의「병술안」과 나암도(羅岩島)가 이에 해당 된다.
병술안(兵戌岸)은 본래 병수안(兵戍岸)이었는데, 수(戍)와 술(戌)을 혼동한데 서 술로 오기하여「병술안」으로 와전된 것이다.
이 병수(兵戍)란 병사(兵士)가 수자리한데서 유래한 명칭으로서 요아량수(要兒梁戍)와 공통점은 있으나 지명으로서의「병수안」과「요아량수는 동의어(同義語)가 아니다.
또한 나암도(羅岩島)는 지리적 조건과 오늘날 전래되는 지명 등으로 미루어보아 수자리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 따르면 분명히 요아량(要兒梁)은 지금의 고남면 영목(古南面嶺項)으로 명기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의 차도(車道)를 증심으로 거리를 살펴볼 때, 서산에서 영목까지는 무려 69.5㎞에 이르고 있으므로 위의 55.8㎞와 비교하면 13.7㎞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여하간 이 문제에 관해선 앞으로 보다더 구체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습진벌은 군대를 간열(簡閱)하던 장소로서 현재의 태안읍 평천리에 있었는데, 그 면적이 무려 10여정(정)이 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중엽 태안방어사(奉安防禦使)가 매년 춘추로 두 차례에 걸쳐 군대를 간열하여 왔는데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폐지되고, 그 터는 개인 소유화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