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인 입지조건이 태안으로 하여금 공업발전의 기회를 주지 안했다.
우리 나라 공업사(工業史)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나라의 공업은 가내공업에서 비롯되는데, 특히 담양(潭陽)의 죽제픔. 강화(江華)의 돗자리(花紋席). 안성(安城)의 유기(鍮器)는 우리 나라 삼대 가내공업으로서 오랜 전통으로 널리 알려져왔으나, 근대적인 기계공업의 발전에 따라 가내공업은 거의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죽제품은 "프라스믹" 제품의 등장으로 인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또한 우리의 전통을 자랑하던 유기공업은 "스테인레스" 그릇의 출현으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강화의 화문석은 아직도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다 근래에 들어와 활기를 띠고 있으나 역시 영세성울 면치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날 태안의 가내공업 실태를 살펴보면 길쌈(紡織). 요업(窯業). 죽세공(竹細工) 등이 주로 발전하여 왔는데, 이 중에서도 죽세공이 더욱 왕성하였다. 이 가내공업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들은 주로 일용 필수품에서 어업용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였다.
특히 지난 1925년에는 죽세공의 기술을 의히기 위해 죽세공의 중심지인 제주도에서 기술 강사를 초빙하여 태안읍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청년들을 모집해서 죽세공 기술을 2개월 동안 연수시켰다.
이 연수생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는 다시 담양으로 파견시켜 3개월간 기술을 체득케 했는데, 이때의 모든 경비는 관비로 지급했다. 이렇게 기술 연수를 받고 돌아온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제품은 부채. 바구니. 트렁크(여행용 큰 가방). 숯상자. 용수. 삿갓. 밥바구니(飯). 도시락. 밀감상자. 휴지통 둥 다양한 일용품을 만들었는데, 이 중에서 밀감상자는 일본(日本)으로 수출 하였다.
또한 요업은 군내 각처에서 매우 발달하였다. 이는 각지에서 도기 원료가 다량으로 산출되었기 때문인데, 특히 삭선의 백토(白士)는 유명했었다. 이 백토는 도기 원료로 사용되는 한편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채취하여 식용(食用)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서산군지"(이민녕저)에 보인다. 이와같이 태안군의 공업은 남면(南面)의 죽세공을 중심으로 요업, 부녀자의 직조 그리고 싸리와 버들을 이용한 일용품의 제조가 매우 왕성하였으나 공업의 근대화로 인해 가내공업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이제 새로운 기계공업으로 탈바꿈하였으나, 본군은 입지조건이 공업단지나 중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 적지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 태안읍 삭선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었지만 아직 100% 가동되지 않는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공장의 규모를 종업원 수에 따라 살펴보면 그 순위가 삭선농공단지에 있는 광일전선(주)과 근흥면에 있는 한주개발(주) 등인데,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도표와 같다.
구분 | 계 | 냉동식품 | 음식료품 | 레미콘.벽돌 | 선박건조및수리 | 기타제조업 | 도정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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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59 | 4 | 2 | 5 | 3 | 8 | 32 |
태안읍 | 22 | 2 | 4 | 3 | - | 5 | 8 |
안면읍 | 6 | - | - | - | 1 | - | 5 |
고남면 | 4 | - | - | - | - | - | 4 |
남 면 | 8 | 1 | 2 | - | 1 | 2 | 2 |
근흥면 | 9 | 1 | - | 1 | 1 | 1 | 5 |
소원면 | 4 | - | - | - | - | - | 4 |
원북면 | 6 | - | 1 | 1 | - | - | 4 |
이원면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