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태안 전래와 그 전개 과정을 알아보기 전에, 천도교의 창도(創道) 동기와 그 과정을 대략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근세조선(近世朝鮮)의 500년을 통해 볼 때 가장 굴욕적(屈辱的)이고 처절(悽絶)했던 사건은 선조(宣祖) 26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인조(仁祖)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우선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삼전도(三田度=松坡)의 수항단(受降壇)에 올라 청태종(淸太宗) 앞에 3배 9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린 것은 우리 5,000년의 민족사(民族史)중에서 가장 치욕적(恥辱的)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굴욕적이고 잔인한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爲政者)들은 각성하지 못하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하니, 사회는 혼탁해지고 따라서 민족적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 무렵 외래 종교인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는데, 이에 최초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일부의 실학자(實學者)들이었다. 이수광(李수光)·이익(李瀷) 등의 실학자들이 이 천주교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이를 학문의 측면에서 서학(西學)이라 호칭하였다.
이렇게 서학이 점점 확산되어 감에 따라, 인심이 각박해지고 사회가 혼탁해져서 사상적 개혁이 요청되고 있을 때, 수운 최제우(水雲崔濟愚)가 분연(奮然)히 일어나 사회를 개혁 하고자 그의 사상과 신념을 대중 앞에 선포하니 이를 동학(東學)이라 불렀다.
이렇게 최제우에 의해 창도(創道)된 동학은 천주교인 서학에 반대하여 일으킨 일종의 우리의 민족 종교인 것이다. 동학은 노도(怒濤)와 같이 삽시간에 서민층으로 전파되어 하나의 사회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이런 실세(實勢)를 보고 있던 조정(朝廷)에서는 당황하여 마침내 고종(高宗) 원년(1864) 3월에 이르러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씌워 사형(死刑)에 처했다. 교조(敎祖)인 최제우를 처형함으로서 동학이 근절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동학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조직이 더욱 결속되어 지하(地下)로 숨어든 뒤에, 드디어 1894년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동학도(東學徒)들이 봉기하니 이를 동학혁명(東學革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동학 혁명은 동학당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농민의 혁명이었으나, 정부의 힘만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결국 중국(淸)과 일본(日本)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렇게 동학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후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었다.
1897년 2세 교조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제3세 교조의 교통(敎統)을 이어 받은 손병희(蓀秉熙)는, 이 무렵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 개칭하고 교세 확장에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
이 같은 포교의 노력으로 인하여 교세는 점점 부흥되어 마침내 1919년 기미 3·1운동의 추진력으로 계승되어 천도교는 급기야 민족 종교로서의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천도교가 태안 지역에 전래된 것을 19세기 말엽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는 천도교가 창도된지 30여 년의 뒤로서,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서산군 지곡면에 살고있던 최형순(崔亨淳)이 고종(高宗) 27년(1890) 3월 16일 당시 제2세 교조(敎祖)로 있던 최시형(崔時亨)을 심방하여 천도교에 입교할 뜻을 밝히니, 교조가 즉석에서 쾌의 수락하고 간략한 입교(入敎) 절차를 마친 뒤, 충청남북도의 전지역에 걸쳐 전교(傳敎)할 막중한 사명을 띠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890년 3월 서산지역에 처음으로 천도교가 전래되는 것이다. 이렇게 막중한 책임과 명령을 받고 지곡에 돌아온 최형순은 치밀한 지하 조직을 짜면서 전교에 동분서주하였으니, 이 무렵에 태안 지역에도 천도교가 전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지하경로를 통해 1890년 태안 지역에 포교된 천도교는 막대한 교세로 확장되어 갔는데, 특히 혁명직전인 1894년의 5·6월경에는 농민대중이 앞 다루어 동학교단에 입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의경의「갑오년 동학군의 전주점령과 민중의 동태」에서 보면 「운수가 참말로 있어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입도한지 불과 며칠에 전지문지(轉知聞知)하여 동학의 바람이 사방으로 퍼지는데 하루에 몇 십 명씩 입도를 하곤 하였다.
마치 봄 잔디에 불붙듯이 전도가 어찌나 잘되는지 불과 1·2삭(朔)에 서산일군(瑞山一郡)이 거의 동학화(東學化)되어 버렸다.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첫째 시운이 번복하는 까닭이요, 만인평등을 표방한 까닭이다. 그래서 재래로 하층계급에서 불평으로 지내던 가난뱅이 상놈 백정 종 등 온갖 하층계급은 물밀 듯이 다 들어와 버렸다. 더구나 때마침 전라도 등지에서 동학군이 승승장구한다는 기쁜 소식이 날로 확산되어 알려지니 누가 기운이 아니 나겠는가, 그래서 모두 다투어 입도를 하는데 길 가던 자는 우물이나 개천을 향하여 입도식을 하고, 산에서 나무를 베던 자는 숫돌 물을 놓고 다투어 입도를 하였다. 하루라도 먼저하면 하루 더 양반이요, 하루라도 뒤지면 하루 더 상놈이라는 생각에서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입도부터 하고 보았다. 참말 야단법석이었다」이렇게 대부분의 농민들이 앞다투어 입교하는 것은 앞으로 닥쳐올 동학천하(東學天下)에 동참하여 그동안의 고생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상하귀천 남존여비의 분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상호 존중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엄습하여 왔음으로 불과 한 두달 사이에 서산군이 동학화 된 것이며 따라서 이 무렵 태안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히려 서산군 보다 교세가 더욱 확대되어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태안군 전지역 농민들이 대부분 입도 하였다고 믿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태안군 내에서도 더욱 극렬했던 지역은 이원면·원북면·근흥면·안면읍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혁명당시 이 지역 출신들이 영도하였음을 볼 때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태안 지역에서도 제일 먼저 천도교가 전래된 곳은 이원면 포지리(梨園面 浦地里)인데, 여기서 다시 원북면 방갈리(遠北面 防葛里)로 전교(傳敎)되어, 그 세력이 점점 확대되면서 군내 전지역으로 파급되어 갔던 것이다.
이 무렵 태안 지역에는 예포(禮包), 서산지역에는 덕포(德包)를 설치하고 각각 대접주(大接主)를 임명했는데, 예포의 대접주가 된 상암 박덕칠(湘菴 朴德七)은 원북면과 이원면의 동학교인을 규합하여 혁명군으로 무장시키고 분연히 일어나(蹶起) 태안군아(泰安郡衙)를 점령하니 이때가 1894년 10월 1일이었다. 이렇게 태안군청을 점령한 북접(北接)의 동학군은 건물에 불을 지르는 한편, 태안부사 신백희(申百熙)·별유사 김경제(別諭使金慶濟)·영관 염도희(領官廉道希)등을 장터로 끌어내어 참수(斬首)하였다.
그 후 예포 덕포 등이 합세한 북접의 동학혁명군은 해미의 승전곡 전투를 비롯하여 예산 신례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사기충전 하였으나, 결국은 동년 10월 28일 홍주(洪城) 전투에서 참패하여 동학군은 사방으로 흩어진 채 재기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마침내 지하로 잠적하고 말았다.
동학혁명 후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고 또한 정당한 민족종교로서의 공인을 받게되자, 1921년 (辛西) 태안에 천도교 교구가 설치되어 합법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도학혁명 당시의 교세와는 천양지차이며 따라서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매우 열세에 처해있는 실정이다.
현재 태안교구의 신도는 모두 100여명 내외이며, 또한 방갈리 전교실도 10여명으로서 나날이 감소되어 가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