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일찍 기원전(B.C) 5세기 초에 인도(印度)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베푼 종교인데, 그 뒤 중국(中國)을 거쳐 4세기 말엽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372)에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부견(符堅)이, 중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 온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최초(最初)로 불교가 들어온 것인데,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는 무려 80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 후 백제(百濟)에는 고구려 보다 12년 뒤인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인도의 승려(僧侶)인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중국의 진(晋) 나라로부터 입국하여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신라(新羅)는 고구려 보다 40여 년 뒤인 눌지왕(訥紙王) 때(417∼458) 인도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들어와 불법(佛法)을 폈으나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 소지왕(炤知王) 때(479∼500)에 이르러 고구려로부터 아도(阿道)승려가 3인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신라에 들어와, 포교(布敎)함으로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다,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로 인하여 마침내 국가의 공인(公認)을 받아, 본격적인 불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같이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인데, 여기서 특히 신라인의 불교 수용 과정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합리적인 사유방식(思惟方式)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또한 현재 전래되어 오는 3국의 문화재(文化財)중에서 대부분이 신라의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신라 문화의 발전상을 입증해 주는 것이며, 따라서 고대문화(古代文化)의 중심이 불교 문화였음을 깨닫게 한다. 특히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는 불교의 대중화(大衆化)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민심(民心)을 오로지 불법(佛法)에 집중케 하니, 자연히 불교 문화의 찬란한 꽃이 피게 되었던 것이며, 고려 때는 외국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음으로, 부처의 위력(佛力)으로 국가의 평화를 도모하려고 했었다. 고려가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매우 어려움에 부딛치자 불력(佛力)으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大藏經)을 간행(刊行) 하였는데, 특히 고종(高宗)23년(1236)에 착수하여 무려 15년에 걸쳐 완성을 마친 「8만 대장경」등은 고려의 호국불교(護國佛敎)가 절정(絶頂)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이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그 화려한 꽃이 활짝 피었던 것이다.
태안은 일찍 마한(馬韓) 54개국 중의 하나였던, 신소도국(臣蘇途國)의 영토에 속해 있었으나,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등장하여 고대 국가(國家)의 체제(體制)를 갖추어 나가며 영토 확장을 단행할 때, 마한을 병합(369)하여 백제에 편입시킴으로서 마한은 소멸되고, 태안은 백제의 판도(版圖)에 속하게 되었다. 이같이 「태안」은 다시 조선국의 영토에 편입되어 500여년 발전하여 왔는데, 불행하게도 1910년 일본 강점(日本强占)하에 놓이게 되었다.
36년간 일본 강점하에 있던 「태안」은 드디어 1945년 광복(光復)과 더불어 대한민국(大韓民國)에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태안」은 왕조(王朝)가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 판도 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문화의 유산을 많이 남겨 놓은 나라는 고려와 백제를 들 수 있다.
우선 백제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 「태안」은 일찍 백제 문화권에 속해 있었음으로 그 영향력이 컸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불교 문화의 영향이 컸음은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유물과 유적 등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앞에서 기술(記述)한바와 같이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4세기 말(384)인데, 이 불교가 다시 태안 지역에 포교되는 것은 50여 년 뒤인 5세기 말엽에서 6세기 초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白華山) 중턱에 자리한 태을암(太乙庵) 좌측 약 50여 미터 떨어진 자연 거석(自然巨石)의 암벽(岩壁)에,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을 양각(陽刻)하여 놓았는데, 이 불상의 조각 연대를 6세기 초엽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 마애불의 최초의 것이며, 따라서 이곳 태안 지역이 백제 조상술(百濟彫像術)의 발상지이고, 또한 우리나라 불교 조상 미술(佛敎彫像美術)의 선진 지역이다.
이 태안마애삼존불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의 거석 암벽(岩壁)에 조상(彫像)된 서산마애3존불(瑞山磨崖三尊彿)인데, 이는 수법(手法)이 매우 정교하고 뛰어난 걸작품(傑作品)으로서 조상 미술의 극치를 자아내고 있다.
태안에서 발생한 마애불이 서산 예산 등지를 거쳐 내륙(內陸) 깊숙히 접어들면서 더욱 화려한 꽃을 피어 갔다. 태안의 마애불과 서산의 마애불을 비교하여 보면, 태안의 것은 그 솜씨가 미숙(유치)한데, 서산의 마애불은 매우 세련된 솜씨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태안의 것은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이라면, 서산의 것은 프로가 그린 그림으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에서 오는 탓인지 태안마애불은 보물로, 그리고 서산마애불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륙의 선진 문화를 먼저 받아들인 태안은 그 꽃을 피우지 못하고, 오히려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화려하게 전개되어 갔으니, 반도(半島)라는 지형의 특징이 대륙 문화를 먼저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그 꽃은 내륙에서 핀다는 영국(英國)의 석학 토인비의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현재 태안군 내에는 백제 시대에 건립된 사찰(寺刹)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흥주사가 백제 구수왕(仇首王) 9년(222)·창건되었다고 하나 이는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서기 384년이므로, 불교 전래 160여년 전에 이미 사찰이 세워진 셈이니 신빙성이 없으며, 또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이 보다는 150년 앞서 흥주사를 세웠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150년 전에 태안에 흥주사가 창건되었다고 하는 것은, 억설(臆說)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무렵에 사찰을 세웠다기 보다는 민간에서 불교가 신앙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흥주사는 고려 말에 창건된 절이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제3편 고적과 유물」의 「제2절 전통 사찰」조를 참조하기 바란다.
아울러 백제 무왕(百濟武王) 34년(633)에 창건(創建)되었다고 전하는 태국사(泰國寺)가 있으나,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실증(實證) 자료가 없으니 역시 신빙성이 희박하다.
다음은 고려 시대의 태안을 살펴보기로 하는데, 현재 고려의 불적(佛跡)이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흥주사와 남문리5층석탑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리고 8세기 경의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몽산리 석가여래 좌불상과, 조선조 시대의 태을암(太乙庵), 복성암(複成巖)등의 사찰이 현존해 왔다. 불교 문화의 최성기(最盛期)에는 태안군내에 무려 20여개의 사찰이 난립(亂立)상태였으나, 조선조(朝鮮朝)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가 점차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조선조 후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사찰이 폐사(廢寺)되어 불교 문화의 열세(劣勢)를 면치 못했다.
지금도 군내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과 관련된 지명이나, 폐사지(廢寺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사명미상(寺名未詳)으로 인하여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널리 이름을 떨치었던 근흥면의 안파사(安派寺)·안면읍의 해남사(海南寺) 등을 우선 들 수 있다.
불교 문화를 먼저 받아들인 태안은 한 때 융성한 발전을 보았으나, 이것이 내륙으로 전파되면서 오히려 그곳에서 더욱 화려하게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 불교 문화의 꽃봉오리는 태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봉오리가 활짝 핀 것은 내륙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서산(瑞山)의 실상(實相)을 살펴보면, 일찍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되었다는 충남 3대 명찰(名刹)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개심사(開心寺)를 비롯하여, 운산면의 문수사(文殊寺) 그리고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부석면의 부석사(浮石寺)와 해미면의 일락사(日樂寺) 등은 현존 사찰로서 매우 번창하고 있으며, 그리고 한 때는 법인국사(法印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무학대사(無學大師)·경허선사(鏡虛禪師)·월면(月面) 등의 이름 높은 승려들이 군내 명찰(明刹)에서 수도(修道)하였거나 또는 주석(駐錫)하였으니 이는 서태안(瑞山泰安) 지역의 불교 문화가 앞서가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 것이다.
현재 태안군 내에는 흥주사를 비롯하여 태국사·태을암·복성암·법정사 등 모두 10개에 미치지 못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사찰을 개축하거나 신축(新築)하여 많은 신도(信徒)를 영입하고 포교하여 급진적으로 불교가 발전하는 느낌이다.
오히려 최근에 들어와서는 다른 교인(敎人)보다, 불교 신도가 더욱 증가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마애불 여래입상계(如來立像系)의 발상지인 태안은 일찍 백제 불교 문화의 선진 지역으로 한 때 각광을 받았으나 그동안 1600여년 내려오면서 거듭되는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억불정책(抑佛政策)의 정치적 변화 등으로 말미암아 쇠미(衰微)해졌던 불교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활로를 되찾게 되었으니 이제 태안과 불교는 더욱 그 빛을 발산해 나가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