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 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태조는 통치의 이념으로 3대 정책을 내세웠다.
첫째 외교정책으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펴고, 둘째 문화정책으로 숭유억불주의(崇儒抑佛主義) 그리고 세 번째로는 경제정책으로 농본주의(農本主義)를 실시했다.
이같이 조선 왕조는 3대 정책을 추진시키는 동시에 독자적인 체제를 정비해 나가며 많은 시련을 겪었으나, 결국은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하는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그리고 의정부(議政府)를 정비하여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시키고, 나아가 경제 및 사회적 기틀을 다져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사업은 한글( 訓民正音)의 제정과 과학의 진흥으로 문화적인 기틀을 정립되어 간 것이다.
이렇게 조선조의 전기에 있어서는 왕권이 확립되고 따라서 사회적 안정이 지속되었으나,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조정에서 국론(國論)이 분열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사화(士禍)가 계속 일어나고 이어 당쟁(黨爭)이 시작되었다.
당쟁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한 때에 설상가상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일어나 국가는 존망 위기에 처하게 됐었다.
이 임진왜란은 정유재란(1597)과 함께 7년간 계속되다 결국 왜군의 철병으로 전쟁은 끝이 났으나,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토는 초토화 되어버렸으니, 이때에 고귀한 우리의 문화재는 거의 다 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비참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당시의 위정자들은 각성을 못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더니, 30여년만에 다시 병자호란(1636)의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우리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것으로서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청태종(淸太宗)앞에서 무릎을 꿇고 3배 9고두(三拜九叩頭)를 해야 했다.
이 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치룬 당시의 조정으로서는 모든 제도를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질화된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는가 하면, 정주학(程朱學)의 독선을 지양하기 위해 실학(實學)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조선조의 말기에 들어와 유럽의 문물이 들어오는가 하면 동학(東學)이 일어나는 등 근대화의 길이 열리는 듯 하였으나, 결국 세도 정치·3정문란과 더불어 홍경래(洪景來)의 난, 그리고 농민들의 반란 등 양반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부딪치게 되어 마침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말았다.
그후 1897년 500여 년 내려오던 조선국을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왕을 황제(皇帝)라 하여 내외에 독립제국(獨立帝國)임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한제국의 독립국가로서 출발했으나, 위정자(爲政者)들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1910년 마침내 일본에 강점(强占)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