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왜구란 13세기부터 16에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을 무대로 하여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등을 약탈해 간 일본(日本)의 해적 집단을 일컫는 것이다.
왜구의 약탈이 가장 심했던 때는 고려 말엽에서부터 조선조의 초기에 이르는 기간이었는데, 이 왜구 활동의 시기를 둘로 나누어 전기와 후기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기는 14세기 초기부터 말기에 걸쳐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연안에서 활동했는데, 주로 식량 탈취와 사람을 납치하여 갔으며, 후기는 15세기 초엽부터 16세기 말엽의 임진왜란(1592)때까지 주로 중국 연안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고려 말엽에 들어와서는 연안은 물론 내륙까지 침범해 들어와 한때 개경(開城)의 치안까지도 위협을 느끼게 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고려에서는 일본(日本)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는 한편, 최영(崔營)과 이성계(李成桂) 등으로 하여금 왜구를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왜구의 침입이 혹심하여 연안은 물론 내륙까지도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되니, 고려왕조(高麗 王朝)로서는 치명적인 문제가 가 아닐 수 없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태안은 왜구의 침입이 더욱 심하여 고려 말엽인 공민왕 22년(1373)에는 왜구 침입으로 인해 태안군이 폐군(廢郡)되는 비참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태안군수는 2·3명의 직원을 데리고 서산군에 붙이고 있었는데, 10년 뒤인 1383년에는 다시 서산군에 왜구가 침입하여 옴으로서 서산군에 붙이고 있던 태안군은 다시 예산군으로 옮겨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이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왜구 침략상을 여실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말엽인 1350년대 초기부터 1380년대 중엽까지 무려 30여 연간 왜구의 침입으로 재산 피해는 물론 인명의 피해까지 당하며 살아온 서 태안 지역 주민들은, 600년 전 역사의 참상을 시간의 흐름 속에 희석시켜 그대로 묻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시대 | 연대 | 침입한지역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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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때 | 1352. 3 | 태안(안흥) | 김휘남(金暉南)이 왜적선 1척 포획 |
1373 | 태안 | 태안군 폐군(서산군에 붙임) | |
고려 우왕때 | 1378. 3 | 태안 | |
1378. 9 | 태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