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태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방관제(地方管制)를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왕건이 고려를 세워 다스리기 시작한지 무려 65년이 지난 성종(成宗)2년(983)에, 전국을 12주로 나누어 중앙에서 목사(牧使)를 파견하였다.
이 12주(州)는 ①광주(廣州) ②양주(揚州) ③황주(黃州) ④해주(海州) ⑤충주(忠州) ⑥청주(淸州)⑦공주(公州) ⑧전주(全州) ⑨나주(羅州) ⑩승주(昇州) ⑪상주(尙州) ⑫진주(晋州)등인데, 공주가 충청남도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때의 태안은 공주 목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성종 14년(995)에 다시 관제 개편을 단행하여 전국을 10도(道) 4도호부(都護府)로 나누고 12목의 목사를 절도사(節度使)로 개칭하였다.
이때 설치한 10도중 하남도(河南道)가 지금의 충청남도에 해당되는데, 이 하남도는 공주와 운주(運州)로 이루어 졌었다.
또한 이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현종(顯宗)9년(1018)에 다시 행정 구역이 개편되어 전국을 5도 양계(五道兩界)로 나누고 그 안에 3경(京)ㆍ4도호부(都護府)ㆍ8목(牧)ㆍ15부(府)ㆍ129군(郡)ㆍ335현(縣) ㆍ29진(鎭)을 설치하고 다시 그 밑에 촌(村)ㆍ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 등을 두었는데, 이때 태안은 지금의 홍성인 운주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충렬왕(忠烈王)24년(1298)에 소태현(蘇泰縣) 출신 이대순(李大順)이 원(元)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소태가 태안(泰安)으로 개칭되고 따라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태안으로 개칭되어 오늘까지 무려 700년 가까이 불리워지고 있는 태안의 명칭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준말로서 국가가 태평하고 국민이 평안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준말인 태안만의 의미론 「태평하고 안락하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바로 태안인 것이다.
현재 태안군 내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유적으로는 태안읍 상옥리에 있는 홍주사와, 태안읍 남문리 탑골에 있는 남문리 5층 석탑과 흥주사 3층석탑 그리고 태안여상이 소장하고 있는 청동 숟가락(銅匙) 몇 벌과 구리 그릇(銅器)이 몇 점 있으며 그리고 백화산성의 성벽 일부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려조 때 명명된 태안(泰安)이란 지명이 700년 가까이 내려오면서 변함 없이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문화재적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고려시대 본관에 설치되었던 향ㆍ소ㆍ부곡(鄕ㆍ所ㆍ部曲)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군명 | 향(鄕) | 소(所) | 부곡(部曲) |
---|---|---|---|
태안군 | 광 지 향(廣地鄕) 복 평 향(福平鄕) |
안 면 소(安眠所) 오 산 소(吳山所) 양 골 소(梁骨所) |
고려의 대송 외교 정책(對宋外交政策)은 정치적인 원조가 아니라, 앞서가는 송나라의 문물을 수입하여 고려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려는데 반하여, 송나라는 문화 교류보다 북방민족(遼ㆍ金ㆍ元)과 대항하기 위해 고려와 정치적인 동맹을 꾀하려고 했었다.
이와 같이 고려와 송의 외교정책이 서로 달랐지만 결국은 고려가 송의 문화를 수입하려고 하고, 또 송이 고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그 뜻은 달랐어도, 이것이 잘 조화되어 양국은 친선 외교를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고려는 침체된 사회를 벗어나려고 송과의 무역을 활발하게 추진시켰는데, 이때의 무역 방식은 사무역(私貿易)과 공무역(公貿易)으로 전개되었다.
사무역은 주로 양국의 사절단(使節團)이 내왕할 때 이루어졌고, 공무역은 정식으로 무역선을 통하여 이루어졌었다.
당시의 무역 통로는 국제 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진 예성강(禮成江) 입구에 있는 벽란도(碧瀾渡)를 중심으로 두 개의 항로(航路)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11세기 말엽(문종36)까지는 ①벽란도→옹진→중국의 산동성(등주) 그후는 ②벽란도→안흥항→흑산도→중국의 절강성(명주)등으로 되어 있었다.
태안의 안흥항은 이때부터 국제 무역선이 왕래하는 이름 높은 명항(名港)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지금의 안흥항이 아니라 안흥항 맞은 편에 있는 요아진(要兒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요아진은 지금은 신진도(新津島)를 일컫는 것이다.
요아진은 육지와 연륙(連陸)되어 있던 곳으로의 사신(使臣)이 내왕하며 물화(物貨)가 상통하던 국제적 요충지였다.
안흥성 서문(西門)밖 아래쪽 돌출 지점에서 노음노적봉(蘆音露積峰)밑 유선암(遊仙岩) 바같쪽 돌출 지역을 연결하는 제방(堤防)을 이룩해 놓았는데, 불시에 태풍과 해일(海溢)로 인하여 제방이 파괴(破堰)되었다.
이로 인하여 요아진으로 통행하던 평사퇴(平沙堆)가 유실(絶斷)되어 이때부터 나룻배(渡船)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이로써 요아진이 신진도(新津島)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여송시대(麗宋時對)의 무역로(貿易路)는 주로 황해도ㆍ경기도ㆍ충청남도ㆍ전라남도의 서해안이 이용되었다.
그런데 안흥항은 그보다도 훨씬 앞선 이미 3국 시대부터 문화 교류의 국제항으로 활용된 지역임을 여러 물증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송나라와 교역(交易)한 품목을 살펴보면 수출품으로 금ㆍ은ㆍ동ㆍ인삼ㆍ복령(茯령)ㆍ 잣(松子)ㆍ표피(豹皮)ㆍ해표피(海豹皮)ㆍ황칠(黃漆)ㆍ능라(綾羅)ㆍ저포(苧布)ㆍ향유(香油)ㆍ궁시(弓矢)ㆍ금은 세공 장식품ㆍ화문석(花紋席)ㆍ서랑모필(鼠狼毛筆)ㆍ 접부채ㆍ백추치(白錘紙) 그리고 백연묵(松烟墨)ㆍ등이고 수입품으로는 자기(瓷器)ㆍ능견(綾絹)ㆍ금라(錦羅)ㆍ약재(藥材)ㆍ차(茶)ㆍ향료(香料)ㆍ악기(樂器)ㆍ문방구(文房具)ㆍ서적(書籍)그리고 화폐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