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기원전 57년에 진한(辰韓) 12개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발전한 나라인데, 한반도의 남동쪽인 경주 지역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대륙의 선진문화 영향을 뒤늦게 받아, 백제나 고구려보다 고대 국가 형성이 제일 늦었다.
신라는 4세기 말엽인 내물왕(奈勿王)때에 고대 국가의 기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6세기 초엽인 법흥왕(法興王)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렇게 고대국가의 완성을 마친 신라는 다음 진흥왕(振興王)때에 이르러 안으로 화랑제도(花郞制度)를 두어 무사정신( 武士 精神)을 배양하고, 또한 국사( 國史)를 편찬하여 내외로 국위를 과시하였으며, 아울러 불교를 장려하는 동시에 대륙의 선진 문화를 수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그리고 밖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는 백제의 옛 땅(故土) 한강 유역을 강점(强占)함으로서, 대륙(唐)과 통교(通交) 할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문호(門戶)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무렵 가야 연맹(伽倻聯盟)을 공략(攻掠)하여 병합시킴으로서, 신라의 영토는 급속히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정치적 야망에 불타는 신라는 종래의 후진성을 탈피하고 과감하게 비약 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신라는 이 같은 여세를 몰고 7세기에 이르러 외교에 뛰어난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등으로 하여금 대당외교(對唐外交)를 실시케 함으로서, 마침내 나당동맹(羅唐同盟)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비교적 쉽게 나당 동맹을 체결한 신라와 당나라는 합세하여 660년(의자왕 20)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668년(보장왕 27)에는 고구려를 정복(正服)시켰다.
이렇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본래의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대로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둑부(熊津都督府)·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둑부(安東都督府) 그리고 신라의 영토에는 계림도호부(鷄林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이 같은 당나라의 정치적 흉계(凶計)에 분통함을 참을 수 없어, 이에 굴하지 않고 신라는 완강하게 일어나 대당전(對唐戰)을 전개하여, 무려 8년 간의 악전 고투 끝에 마침내 676년(문무왕 16)에 당군(唐軍)을 축출함으로서, 3국 통일을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통일이라고 하지만 실은 한반도 전역에 걸친 통일이 아니라 대동강과 원산만(元山灣)을 연결하는 이남 지역만의 통일이었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3국을 통일한 신라는 광대한 영토의 관리와 더불어, 전제 왕권의 강화를 위해 관료 체제를 재정비하고, 또 지방조직을 개편하여 전국에 구주 오소경(九州五小京)을 설치했다.
이 무렵 태안은 웅천주(公州)의 관할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5년(756)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태안의 성대혜현(省大兮懸)이 소태현(蘇泰懸)으로 개칭된다
290여년간 백제의 영토였던 태안은, 신라의 3국 통일로 인하여 다시 통일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270여년 내려 왔으나, 오늘날 신라의 문화재로 보존되어 오는 것은 매우 희소한 편이다.
현재 유일하게 불상(佛像)이 한 점 관리 중에 있는데 이는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으로서, 남면 몽산리 청계산 기슭의 밭에 놓여 있다. (이 불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2편은 고적과 유물조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수법(手法)이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여 발달한 신라 불교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이다.
특히 신라 불교는 호국 사상을 고취하여 신라인의 사상적 깊이를 더해주었고, 승려들의 해외 활동을 통해 당시의 앞서가는 당(唐)의 문화를 수입하여 불교 문화의 극성을 이룸으로서,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때 불교 문화의 선진 지역인 태안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불적(佛跡)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사료되나, 유감스럽게도 몽산리의 석가여래좌상과 태안여상이 소장하고 있는 몇 점의 토기가 있을 뿐이다.
마한시대 (B·C 18∼369) |
백제시대 (369∼660) |
통일신라시대 (660∼935) |
현지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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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소 도 국 고 랍 국 |
성대 혜 현 | 소태현(또는 소주)(757) | 태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