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백제는 마한(馬韓) 54개국 중에서 하나였던 백제(伯濟)에서 발전한 나라인데, 처음은 한강( 漢江)의 북쪽인 위례(慰禮) 지역에서 일어나 점진적인 발전을 도모하면서, 다시 한강 유역을 지배하는 부족 연맹 국가로 등장했다.
부여 씨족(扶餘氏族)을 중심으로 남하한 유이민(流移民)이 위례성에서 여러 부족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백제라 하였다.
백제는 온조(溫祚)를 시조(始祖)로 기원전 18년에 세워진 나라인데, 그 후 3세가 중엽인 고이왕( 古爾王) 때부터 고대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여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近肖古王)때에 이르러 고대 국가의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고대 국가의 완성을 마친 근초고왕은, 남쪽에 자리한 마한의 전지역을 완전히 병합(369)하고, 다시 북쪽으로 침공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점령하는 한편, 이어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까지 공략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등 백제의 국위를 떨치었다.(371)
이같이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과 더불어 외국(東晋·日本)과 통교를 하며 왕권의 전제화를 굳히고, 나아가 왕위 부자 상속제(王位 父子 相續制) 등을 마련하여 정비된 국가의 면모와 그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사(百濟史)를 저술케 하였다.
그러나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침략을 받고 고국원왕을 잃은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이 남하 정책을 펴면서 백제를 침공하여 위례성(慰禮城)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을 베어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475년 부득이 500년 가까이 내려오던 위례성을 버리고 공주(熊津城)로 천도(遷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서울을 공주로 옮긴 백제는 이곳에서 60여 년 내려오다, 성왕(聖王)때에 이르러 백제의 중흥(中興)을 도모하고자 538년(성왕16년)에 다시 서울을 부여(泗비城)로 옮겼다.
부여로 천도한 성왕은 중앙의 22부 지방의 5부 5방의 행정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불교를 진흥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사상적 통일을 시도하였다.
또한 성왕은 외국(中國·日本)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여, 특히 중국의 문화를 수입하여 백제 문화를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백제 문화와 불교를 일본에 전하여 일본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대의 공헌을 했다.
백제 중흥 정책의 순조로운 항해를 거듭하는 성왕은 551년에 마침내 신라와 합세하여 고구려 군사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의 옛 땅(故土)을 찾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은 신라의 정치적인 야망으로 인해 백제의 수복지(收復地)를 신라가 점령함으로서, 백제의 중흥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백제는 지나친 국력 소모와 사치스런 생활 등으로 인하여 660년 의자왕(義慈王) 때에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서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어 근초고왕이 마한의 전지역과 대방군 등을 병합하여 고대 정복 국가(古代 正服 國家)로 등장하면서 발전해 갔다.
369년 근초고왕이 마한54개국을 완전 정복하여 백제국에 병합할 때 태안에 위치했던「신소도국」과「고랍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백제의 판도에 편입되는데, 이때 태안은 성대혜현(省大兮懸)으로 개편된다.
백제의 성대혜현이 된 태안은 5세기 말엽부터 대륙과 통교(通交)를 하였는데, 이를 실증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 중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마애3불)이다.
이 마애삼존불은 백화산의 태을암 옆의 자연 암벽(自然岩壁)에 조상(彫像)된 불상을 일컬음인데, 이는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시초요, 또한 불교 조상미술의 시원지가 되는 것이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2편 고적과 유물조를 참조하기 바란다. )
태안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의 유물로는 우선 태안마애3불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 사찰(寺刹)과 토기류(土器類)가 있으나, 아직까지 태안 지역에서는 완전한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은 없다. 다만 태안여상과 안남중학교에 소장된 약간의 토기는 있으나, 이것은 경작지(耕作地)나 야산 등지서 수습된 것이며, 또는 타군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도 있다.
그리고 근흥면 안흥성내에 위치한 태국사와 태안읍 상옥리에 있는 흥주사가 백제 시대에 창건된 것이라고 하나, 이를 실증할 수 있는 사료가 없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특히 흥주사는 고려 말엽에 창건된 것이 확실하다. (제2편 고적과 유물조를 참조하기 바란다.)
우리 태안군은 현존하는 유물과 문헌 등을 통해 고찰해 볼 때, 마애불상이 조상되는 5세기말이나 6세기 초보다 훨씬 앞선 4세기경부터 이미 대륙과 통교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여하간 태안은 일찍 대륙 문화와 접촉한 백제 문화권의 선진 지역이다. 특히 불교 문화의 선진 지역임을 자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