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흥면은 본래 태안군의 근서면(近西面)과 안흥면(安興面)으로 이루어졌었는 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위의 근서면과 안흥면을 병합하여 면명(面名)을 근흥면으로 개칭(改稱)했다.
이 근흥이란 명칭은 근서면의「近」과 안흥면의「與」자를 따서「近興」이라 명명했으므로 지명으로서의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1927년에 간행된 이민녕(李敏寧)의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근서면의 관할 이었던 수창리 (水昌里)·용요리(龍腰里)·우항리(牛項里)·접지리(接地里)·낭금리(浪金里)·마금리(麻金里)·추동리(楸洞里)·방두리(防斗里)·와야리(瓦也里)·신동리(新洞里)·안기리(安基里)·석전리(石田里)·운동리(雲洞里)·궁기리(宮機里)·석동리(席洞里)·후동리(後洞里)·신흥리(絲與里)·신대리(新垈里) 등 18개 리와, 안흥면의 관할이었던 용천리(龍泉里)·도장리(都莊里)·고장리(古莊里)·안파리(安波里)·황곡리(墳谷里)·정산리(程山里)·성동리(城東里)·성남리(城南里)·신진리(新津里)·가의리(賈誼里) 등 12개 리를 합쳐 모두 30개 리와, 그리고 2개 면을 병합해서 면명을 근흥면이라 하고, 리명(里名)을 다시 두야리·수룡리·마금리·안기리·용신리(龍新里)· 도황리(都墳里)·정죽리(程竹里)·신진도리(新津島里)·가의도리(賈誼島里) 등 9개 리로 축소시켜 종래의 태안군 관할에서 서산군의 관할 구역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1914년 타의에 따라 지방 관제가 개편되어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따라 태안군이 복군(復郡)됨으로서, 근흥면은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된 근흥면은, 특히 근래에 들어와 면민들의 뜨거운 애향심의 열기로 면세(面勢)가 매우 활기차게 흥기(興起)되어 가고 있으니, 이를 그대로 명실 상부한 근흥(近興)이 되고 있다.
이 두야리 마을은 본래 태안군 근서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였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 하면서, 추동리(楸洞里)·방두리(防斗里)·와야리(瓦也里)·신동리(新洞里) 등을 병합하여 리명(里名)을 두야리(斗也里)라 개칭해서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된 두야리는 70여년 내려오다,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復郡)됨에 따라 두야리는 서산군에서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이 두야(斗也)란 지명 유래를 살져보면, 방두리(防斗里)의 과」와 와야리(瓦也里)의「也」자를 따서 두야리라 하였으므로 지명으로서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이 수룡리 마을은 본래 태안군 근서면(泰安郡 近西面)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수창리(水昌里)와 용요리(龍腰里)量 병합해서 리명(里名)을 수룡리라 개칭하여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서산군 근흥면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된 수룡리는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에 따라 수룡리는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금리는 본래 태안군 근서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우항리(牛項里)·접지리(接地里)·낭금리(浪金里)·용요리(龍루里) 둥을 병합하여 리명(里名)을 다시 마금리(磨金里)라 개칭하고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근흥면에 편입된 마금리는 그후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에 태안군이 다시 복군됨에 따라 마금리는 태안군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마금리는 달리 마금동(磨金洞)·마김(磨劍)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서 마치 동네가 온화하고 포근함이 막은 것 같다 하여 우리말로 「막음→마금」이라 부르던 것을 지명의 한자표기(漢字表記)에 따라 본래의 뜻과는 관계없이 취음으로 마금(磨金) 또는 마김(磨劍)이라 기록 함으로써 혼동을 가져오게 했다.
많은 인사들이 단순히 이「磨金과 磨劍」의 뜻을 풀이하여 옛날 이 곳에서 금세공솔(金細工術)이 발달했다느니 또는 군사들이 칼을 갈았다는 식으로 무리하게 풀이함으로서 견강부회(牽强附會)를 저질렀는데, 이는 모두 막음(원형은「막다」이다)의 뜻을 이해치 못한 데서 야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금(磨金(里)의 지명 유래를 한자의 훈독(訓讀)에서 생각하면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니 독자들께서 혼동 없기를 바란다.
이 안기리는 본래 태안군 근서 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안기리·석전리(石田里)·운동리(需洞里)·궁기리(宮機里)·석동리(席洞里) 등을 폐합하여, 리명(里名)을 다시 안기리라 하고 서산군 근흥면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 시켰다.
그런데 이 안기리(安基里)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이 지역이 지형적으로 보아 배후에 산으로 둘러싸인 평화롭고 아늑한 안쪽에 터를 잡고 협성된 마을이라 하여 그대로「안터」라고 호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안터를 한자 표기(漢字表記)할 때 음훈(音訓)을 취했기 때문에 안기(安基)가 되었는데, 실은 순한문체(純漢文體)로 기술했다면 마땅히 내기(內基)여야 한다.
그러나 이같이 음훈복합(音訓複合)으로 표기된 지명을 전국 각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므로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용신리는 본래 태안군 근서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였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신흥리(新興里)·신대리(新垈里)·후동리(後洞里)·석동리(席洞里)의 일부와, 그리고 안흥면의 용천리(龍泉里)를 병합하여 리명(里名)을 용신리(龍新里)라 개칭하고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켜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부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용신(龍新)의 유래를 살펴보면 용천리(龍泉里)의「龍」과 신흥리(新興里)의 「新」자를 따서 지은 리명(里名)이므로 지명으로서의 측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이 도황리는 본래 태안군 안흥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도장리(都莊里)·고장리(古蔣里)·안파리(安波里)·황곡리(璜谷里) 등을 합쳐 리명(里名)을 다시 도황리라 하여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이같이 근흥면에 편입된 도황리는 그후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에 따라 도황리는 다시 본래의 태안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황(都璜)이란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위의 도장리의 도(都)와, 황곡리의 황(璜)자를 따서 도황(都璜)이라 하였으므로 지명으로서의 특별한 뜻은 지니고 있지는 않다.
도황리는 현재 2개 리로 분리되어 있다.
이 정죽리는 본래 태안군 안흥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정산리(程山里)·죽림리(竹林里)·신기리(申基里)·성동리(城洞里)·성남리(城南里) 등을 합쳐 리명(里名)을 다시 정죽리(程竹里)라 개칭하고,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켜 그후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에 따라, 정죽리는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죽리(程竹里)란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정산리(程山里)의 정「程」과 죽림리(竹林里)의「竹」자를 따서 정죽(程竹)이라 하였으므로, 지명으로서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정죽리는 행정적으로 현재 5개 구로 나뉘어져 있는데, 근흥면의 법정 9개리 중에서 제일 큰 지역이다.
이 신진도리는 본래 태안군 안흥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신진리(新津里)와, 마도(馬島)를 병합하여 리명(里名)을 신진도리(新津島里)라 개편하고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그후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에 따라 신진도리는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가의도리는 본래 태안군 안흥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가의도(賈誼島)를 하나의 리(里)로 분리시켜「가의도리」라 명명하고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근흥면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어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복군됨에 따라 가의도리는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가의(賈誼)란 유래를 살펴보면, 옛날 중국의 가의란 사람이 이 섬에 피신하여 살았으므로 그 이름을 붙이어 「가의도」라 명명했다는 설과, 또는 이 섬이 신진도에서 볼 때 서쪽의 가에 위치해 있으므로 그대로 「가의섬」이라고 호칭했다는 것이다.
이 두 내용중에서 후자가 맞는다면 가의섬을 한자로 가의도(賈탄島)·가의(賈誼)라 표기한 것은, 한자의 취음(取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