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본군의 근흥면 용신리 2구 원안 마을에서 전래되어 오는 것인데,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 제11회 졸업생(1987년도 졸업)인 정미숙의 부모님께서 직접 목격했다는 실화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전 정양의 부모님께서 어느 가을날 풍년으로 가을걷이(秋收)에 눈코뜰 사이 없이 한창 바쁠 때, 밭에서 고추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쪽의 바다에서 길이 약 100여 미터, 혹이 약 2.3미터쯤 되는 거대한 물체가 물결을 일으키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그대로 날아서 마을 앞산을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있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져 저수지지가 범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다음날부터 폭우가 쏟아져 저수지가 범람(氾濫)하고 가옥은 빗물과 해일(海溢)로 잠기게 도어 정양의 부모님께선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오빠를 싸서 안고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외조부(外祖父)댁으로 피난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로 날아간 이 실체(實體)는 무엇인가 이를 둘러싸고 동네 사람들끼리 의견이 부분하였는데, 결국은 용이 아니라 강철이(鋼鐵이)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강철이」란 전설상의 악독한 동물인데 이 강철이가 머물거나 또는 지나간 곳은 몹시 가물어서 곡식은 물론 초목(草木)마져도 다 말라 죽는다는 것이다.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라." 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강철이 지나간 고에는 곡식이 되지 않는것처럼, 운이 나빠서 거의 다 잘 도어 가던 일도 나쁜 방해자가 나타나 실패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강철이에 대해서는 지역에 따라 그 해석이 구구하다. 즉 이 마을에서는「강철이」란 구렁이가 10년 동안 용이 되기 위해 도(道)를 닦는데, 만약 한번이라도 부정한 것을 보게 되면 용이 되지 못하고 강철이가 된다는 것이다.
용이 되지 못한 강철이는 이를 복수하기 위해 강철이가 나온 곳은 홍수로써 방해하고, 또한 강철이가 들어간 곳은 몹시 심한 가뭄으로써 방해하고 있다는 전설이다. 이 같은 일이 있은 다음날 홍수가 일어났음으로 이는 분명히 강철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이 삼형제(三兄弟)바위(일명 삼형제섬)는 근흥면 용신리(近興面 龍新里)2구에 있는 속칭 원안 앞 바닷가 왼쪽에 우뚝 솟아 있는 3개의 바위를 일컫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3개의 바위라고는 하지만 3개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래부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위 부분만 3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1개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지만 바닷물이 나가면 육지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삼형제 바위의 길이는 약 20여미터네 높이 약 8미터에 달하고 있는데 만조때에 보면 이는 분명히 바닷물에 둘러싸인 하나의 아담한 섬으로서 그 풍치가 너무 아름다와 마치 동양화의 한 폭을 감상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소객(詩人)이 아니라도 이 정경(情景)을 보면 저절로 한 수의 시상(詩想)이 떠 오를 듯한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가 하면 낙조(落照)에 물들은 이 삼형제 바위는 고독함을 감추지 못한채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무엇인가 한없이 기다리다 지쳐버린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삼형제 바위가 있는 포구는 마치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어 아늑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곳이라도 하다. 또한 해안가에는 흰모래가 깔려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학생들의 소풍하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포구의 명칭은 없고 옛부터 이 곳을 부를 때는 삼형제 바위 또는 삼형제 섬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이기도 하였다. 한 때의 성어기에는 이곳 포구에서 많은 어민(漁民)들이 살았던 흔적이 지금도 역력히 남아 있었다. 즉 독살과 집터의 흔적이 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많은 집들이 어디로 갔는지 다만 해안가 소나무 숲속엔 집 한채만이 외롭게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이 곳엔 70대 노부부가 지난 날의 비밀을 지닌채 바다를 지키며 삼형제 바위와 함께 정답게 밀어를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가 이 노부부에게 삼형제 바위에 대한 유래를 물었더니 처음에는 모른다고 거절하다 다시 간곡히 말씀을 드리니 지난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옛날 이 포구에서 어부 한 가정이 살고 있었는데 생업은 비록 고달픈 어업이었지만 그들은 불평불만 없이 언제나 단란하고 행복하게 웃음꽃을 피우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부는 늘 하던대로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멀리 나갔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여느때 같으면 배가 이미 돌아왔어야 하는데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밤은 깊어만 갔다. 어부의 아내는 초조한 마음과 불길한 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날이 밝자마자 어부의 아내는 남편을 찾아 배를 타고 멀리 바다로 찾아 나갔다. 바다로 찾아 나갔지만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어디서 찾을 것인가 막연하였다. 날씨는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일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여 바다는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겨울 날씨라 겉잡을 수가 없었다. 남편을 찾아나선 지어미는 할 수없이 뱃머리를 돌려 귀항(歸港)을 서둘렀으나 너무 멀리 나갔기 때문에 단 시간에 돌아올 수 없엇다.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고 이에 따라 파도가 심하여 배는 구항도중 전복되고 어부의 아내는 실종되고 말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 아들들은 해는 저물고 날씨는 점점 추워오는데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방안에서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3형제는 바닷가로 나갔다. 바다는 풍랑으로 험악하고 바람은 몹시 차가왓다. 3형제는 나란히 서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부모님을 불러 보았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 3형제의 마음은 불길한 예감으로 그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시간은 수없이 흐르고 찬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그러나 이들 3형제는 집으로 돌아갈 것을 잊은 채 부동자세로 서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다 그대로 얼어죽고(凍死)말았다. 이렇게 부모님을 기다리다 죽은 3형제의 시체는 그 자리에서 3개의 돌로 변학 말았다. 이리하여 한 가정의 5식구가 몰사(沒死)하고 만 것이다.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분명히 간장을 에어내는 인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삼형제가 죽어서 돌로 변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3형제 바위라고 불렀던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근흥면 정죽리(近興面 程竹里)1구의 정산포에서 옛날에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정산포는 조그마한 포구(浦口)로서 이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주로 생활의 근거지를 바달에 두고 살아오는 순민(順民)들이었다.
이 정산포 사람들은 좋고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기일 같이 생각하며 서로 돕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마치 한 가정같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일찍부터 이 마을에는 오씨일가(吳氏 一家)가 살고 있었는데, 집안이 매우 화목하고 부지런하며 따라서 남을 이해하고 돕는 봉사 정신이 투철하였기 때문에, 항상 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또한 이 소식이 이웃 마을에 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렇게 남들로부터칭찬을 받으며 살아가는 부러운 가정이었으나,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과 같이 이 오씨 가정에도 풀리지 않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년한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오씨 가정에는 출가했으면 이미 어머니가 되어 있을 20이 넘은 딸이 있는데, 한군데서도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처녀 20세라면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학생의 신분으로서 오로지 학업에 전념할 때이지 출가 문제를 가지고 논할 때는 아니다. 그러나 옛날의 처녀 나이 20이 지났으면 이미 혼기를 놓친 노처녀로서 부모의 입장에선 자나깨나 걱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오씨 부부는과년한 딸을 두고 걱정이 태산같았으나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잇는 보통의 처녀가 아니라 흔히 보기드문 특수한 딸이었다. 키는 6척이고 몸은 뚱뚱하며 용모 또한 보잘 것 없는 추녀(醜女)에다. 성미가 거칠고 또한 왈가닥인 별난 처녀였기 때문에 혼기를 놓친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선 좋고 나쁘던 간에 자기의 딸이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오씨집을 지나던 보따리 장수인 부인이 찾아 들었다.
보따리 장수는 마루에 걸터앉으며, 하는 일이 고되다는 듯이 "후유우"하고 길게 한숨을 쉬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이었다. 이때 오씨부인은 상품을 구경하려고 마루에 걸터앉는데, 삐드득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거구인 딸이 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딸은 어머니 옆에 앉았다. 보따리 장수는 굳이 묻지 않아도 이 집의 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장사는 결혼 여부를 물었다. 물론 미혼이라고 했다. 그럼 내가 좋은 곳으로 중매(中媒)를 하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자신있게 보따리 장수는 장수는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못생긴 딸을 누가 데려간담!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면서도 중매하겠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오보니 한편으로는 흐뭇한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따리 장수가 이 집 달을 보자마자 중매를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 산너머 동네에 역시 거구인 노총각이 있는데 아직까지 장가를 들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번에 행사차 들렸을 때 중매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처녀를 보자마자 중매를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며, 또한 이 두 사람은 가장 이상적인 천정배필(天定 配匹)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보따리 장수는 며칠 후에 다시 들리겠다고 하며 총총 걸음으로 이웃 마을로 사라져갔다. 이 여인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학 있기 때문에 각 가정의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특히 혼기에 있는 남녀의 중매를 많이 하여 귿르로 하여금 행복한 가정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부터 신망이 두터운 중매장이로 통하기도 하였다. 이 중매장이 아주머니는 산너머 노총각 집을 찾아갔다.
반가히 맞아주었다. 중매 아주머니는 좋은 혼처가 있음을 우선 알렸다. 그리고 처녀의 됨됨이와 지안의 내력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니 총각측에서는 좋다는 것이었다.
이 혼사의 주인공인 처녀 총각은 몰론 양가의 부모님들도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다. 그런데 중매장이가 총각측에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은 결혼식 당일에 신부에게 하루 세기니를 모두 팥죽을 쑤어 먹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날밤(初夜)에 신부가 잠이 들거든 신부 옆에 또을 한 무더기 누어놓데 마치 신부가 싼 것 같이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총각은 중매장이 라을 그대로 지키기로 약속을 하고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고 초야를 보냈다. 아침에 잠에서 깬 신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똥이람. 하루종일 팥죽만 먹은 데다 피곤해서 깊이 잠이 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똥을 싼 줄 알고 얼굴빛이 부르락 붉으락 하며 몸둘 바를 몰랐다. 신혼 초야에 이 같은 실수를 하다니 이게 무슨 망신이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픈 생각이었다. 시집살이 하루만에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똥을 빠리 치워야하겠기에 신부는 얼떨결에 오요요 하고 개를 불렀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편이 오요요는 강아지를 부르는 소리인데 강아지는 이 동을 다 먹지 못할거요. 그러니 워리워리 부러야 하요. 아내는 다시 워리 워리 불렀다. 그랬더니 마침 커다란 수캐가 들어와서 말끔히 먹어치우고 나갔다.
신혼 초야에 이 같은 실수를 범하고 나더니 말괄량이의 여자가 하루 아침 사이로 온순하고 얌전한 로 탈바꿈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흘러 이들 부부사이에는 아들 3형제를 두고 남부럽잖게 단란하게 살아오던 어느 날, 바느질하는 아내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아내를 향해 여보 신혼 초야에 똥을 싼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오. 그땐 정말 미안하오. 이젠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이니 용서하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내는 웃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신의 없는 사람과 더 살 수 없다며 사랑하던 3형제 아들과 남편을 남겨둔 채 어디론가 멀리 사라져 갔다.
근흥면 정죽리( 近興面 程竹里)1구에 정산포(程山浦)란 조그마한 포구(浦口)가 있는데, 이 포구는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인구는 약 200여명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읻. 주민들은 주로 어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는 김의 양식(養殖)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포구는 아래 윗마을 합쳐야 모드 1킬로 남짓한 길이인데 마치 활같이 구부러져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비교적 조용한 포구였다.
그런데 옛날 이 포구에 며느리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시키기로 이름난 시어머니와, 그와 느 대조적으로 마음씨 착하고 효성스런 며느리로 널리 알려진 고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
고부간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특히 지난날의 고부간의 불화는 주로 일방적인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구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지난날 수직 사회에서의 며느리의 위치란 그저 순종하고 복종해야만 하는 죽골종 그것뿐이었다. 그러기에 지난날 우리 나라 며느리들의 시집살이에 대한 애화(哀話) 는 하나의 문학으로 승화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 사례를 하나 들어보면 「한국고전 비평집(1)의 정음사 발행 민요의 연구」에
사촌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떻던고
열새무명 반물치마
눈물씻기에 다젖었네
열냥짜리 온가락지
콧물씻기에 다녹아버렸네
그리고 서산군 발행(1982)의 신간 서산군지 풍속조에 따르면,
형님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떻던고
부디부디 일러주오
동생동생 사촌형님
시집살이 말도말게
다홍치마 걸어놓고
들어올적 나올적에
눈물씻기 다젖었네
이 같은 유사한 민요는 전국 각처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니 당시의 고된 시집살이를 이렇게 노래에 실어 흘려 보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날에 비하면 거의 없어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특히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회체제 변화에 따라 핵가족의 파생과 또한 문화 발전과 더불어 국민 생활의 질이 향상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에 따라 고부간의 갈등도 사라져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날의 고부간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결국은 일방이 비극으로 끝나는 사례가 속출하였는데, 옛날에 있었던 이 정산포의 고부간의 갈등도 사라져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날의 고부간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결국은 일방이 비극으로 끝나는 사례가 속출하는데, 옛날에 있었던 이 정산포의 고부간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혹독한 구박을 받으면서도 이에 굴종(屈從)하면서 살아오는 며느리 그가 어느날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벼방아를 찧고 있는데, 시어머니의 혼자 방아찧기에 얼마나 힘드느냐 라는 위로는커녕 오히려 잔소리가 심하니 며느리는 은근히 화가 치솟아 더욱 힘주어 방아를 찧다 곡식 낱말이 몇 개 절구에서 튀어나와 땅에 떨어졌다. 며느리는 얼떨결에 재빨리 낱알을 주어 입에 넣은 채 씹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보고 있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절굿공이를 빼앗아 들고 며느리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이년아 쌀 한톨이 얼마나 소중한데 네 맘대로 주어 먹어 이 시어머니를 무얼로 알고 그런느냐 어디서 배운 행동이냐 하며 계속 때리니 며느리는 어머님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머님 어머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면서 그 다리에 쓰러진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얼마나 비통했으면 눔마저 감지 못하고 주었으랴, 며느리의 무덤에는 이름 모를 처음보는 가냥픈 꽃이 무덤을 덮을 정도로 활짝 피어 있는데, 그 꽃의 생김새는 마치 사람의 혓바닥 같이 생긴 빨간 꽃잎 바탕에 쌀모양이 흰 빛이 돋보이는 꽃이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보면서 정말 이상한 꽃이로다. 꽃의 생김새로 보아 이는 분명히 며느리가 쌀을 씹다 주었으니 그 넋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꽃의 이름을「며느리 넋의 꽃」으로 부르자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정산포 입구 바른 쪽 당집 근처에는 이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 그 유래를 아는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감상한다고 한다.
이 용굴은 근흥면 정죽리(近興面 程竹里)의 안흥항(安興港)입구 약 100미터 지점인 안흥성(安興城)밑의 한 길 옆에 있다. 길 옆에 큰 굴이 있기 때문에 보행자는 물론 달리는 차내(車內)에서 까지도 식별할 수 있는 곳이다. 한창 무더운 여름철이면 보행자들이 굴속에 들어가서 쉬었다 가기도 하는데 매우 시원하다. 필자가 직접 이용굴을 답사한 일이 있는데(1987.6.25)굴의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었다.
굴의 입구의 높이는 약 6미터 20센티이고, 아랴의 폭은 1미터 85센티 그리고 위쪽의 폭은 약 2미터 25센티로서 아래위의 너비가 틀렸다. 그리고 입구에서 약 2미터쯤 들어가면 가로 약 4미터 90센티, 세로 약 5미터 40센티의 넓은 곳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는 굴의 천장이 하늘로 뚫려 있었다.
그리고 굴은 입구에서 직선으로 뚫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 약 2미터쯤 들어간 바른쪽에서 직선으로 야 28미터 가량 뚫려 있는데, 굴의 끝 부분은 점저 좁아져서 선채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즉 천장의 높이가 1미터 60센티이고 너비가 70센티였다.
또한 이 용굴은 총 길이는 약 30미터에 달하고 있었다. 이 용굴의 전설에 대하여 살펴보면 아주 먼 옛날에 100년 묵은 구렁이가 있었는데, 도를 닦고 용이 되어 승천하기 위해 적당한 굴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이굴을 발견하고 여기서 도를 닦는 후에 하늘로 무사히 올라갔다는 것이다.
굴의 천장이 뚫려 있는 것은 용이 승천할 때 뚫어진 것이라고 한다.
근흥면 정죽리 하면 안흥항이 떠오르고 안흥성이 생각난다.그 안흥성 밑으로 뚫어진 길을 가다보면 안흥항을 바로 눈 앞에 두고 길 옆에 컴컴한 굴의 입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굴을 사람들은 「용굴」이라 부른다.
굴 안에 들어서면 굴의 길이가 길지도 않고 또 넓고 크지도 않은데 이 구의 특징은 굴이 들어가다 천장이 뚫려 있는 것이 다르다. 바로 이 뚫어진 곳으로 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옛날 신진도에는 100년 묵은 구렁익 있었는데 이 구렁이는 용이 되고 싶었으나 도를 닦을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어느날 이 구렁이는 산신령에게 자기의 처지를 말했다.
"산신령님 제가 100년을 살아왔는데 이대로 죽기는 억울합니다. 용이 되고싶습니다. 다시 100년동안 도를 닦아야 용이 될 수 있다는데 어디로 가서 도를 닦아야 할는지요?"
그러자 산신령은 이 구렁이에게 조건부로 도닦을 장소를 일러주었다.
"좋다. 내가 그 장소를 알려줄터이니 나와 약속을 하자."
"무슨 약속인가요?"
"네가 도를 닦아 용이 되면 안흥 앞바다에 풍랑이 심하여 좌초하는 배가 많아 그러니 네가 용이 된 다음 풍랑을 잠재워 주면 내가 그 장소를 알려주겠다. "
"좋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산신령은 바로 마주 보이는 안흥성 밑에 그런 장소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 곳에 가면 사방 네 몸둥이 길이와 똑 같다니 제가 가서 제 몸길이와 같은 굴을 찾아보겠습니다. "
지금 이 굴의 길이를 정확히 모르지만 그 구렁이가 몹시도 컸던 모양이다. 그 후 이 구렁이는 다시 100년동안 도를 닦고 승천했다 하는데 산신령과의 약속 때문인지 안흥 앞바다의 풍랑이 이때부터 한결 줄어들었고 난파선도 줄어들었다는 참으로 전설같은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