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마섬은 길마섬의 와전인데 고남면 고남리 (古南面 古南里)4구의 의점(衣店)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태안에서 약 40킬로미터, 그리고 안면읍에서 약 16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이다. 고남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10여분 정도 걷다보면 바닷가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80여호의 아담한 집촌( 集村)마을이 있는데 여기에 400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농업이 주업(主業)이지만 해안가이므로 김과 바지락 등의 양식(養殖)을 하여 농외소득(農外所得)이 년 평균 호당 약 250여 만원을 올리고 있는 비교적 부유(富裕)한 마을이다. 지금은 육상교통(陸上交通 )이 매우 발달하고 있으므로 지난날의 광천(廣川)과 대천(大川)을 상대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서낙 중심의 해상교통이 쇠퇴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자연히 옛보습은 사라지고 다만 한 때 성시(盛市)를 이루었던 장터만이 쓸쓸하게 남아있어 지난날을 회상케하고 있다. 이같이 육상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해선 수시로 운영되고 있는 버스를 이용하여 서산이나 태안 등지의 시장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변두리의 면소재 장(場)들은 제대로 활기를 찾기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상설 가게는 그 영세성(零細性)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남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날 해상 교통이 중심이었던 때는 시장의 활기를 띄었지만 육상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주민들은 자연히 편리한 쪽을 택하게 되어 해상 교통이 쇠퇴해진 것이다.
해상 교통은 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주민들의 이용에 불편을 주고 있지만, 육상교통은 일기와 관계없이 전천후(全天候)운행되고, 또한 도로가 포장되어 시간도 단축되어서 더욱 편리하기 때문에 자연히 육상교통이 날로 발달해 가고있는지도 모른다. 이 고남리의 의점 마을 유래도 살은 지난날의 번창하던 때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해상교통의 중심지고남리 4구 의점(衣店)마을, 의류업(衣類業)이 왕성하여 시장의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지그도 그 이름이 전래되어 지명(地名)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의점 마을의 장풀(바닷물이 드나들면서 U자 형으로 움푹 파인 긴 개울)앞에는 지난날의 의점 마을의 내력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버티고 서 있는 전설에 쌓인 질마섬이 있다. 질마섬이란 말(馬)이 짐을 지고 있는 섬이란 뜻이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옛날에 말을 기르고 있는 농가의 할머니가 말에게 죽을 먹이기 위해 죽을 쑤어가지고 통에 넣은 채 말을 매어놓은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때는 여름철이라 집안에 말을 매어놓으면 위생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에 집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해안가에 매어 놓았던 것이다. 할머니집에서 말을 기르는 것은 영농(榮農)의 목적이 아니라, 주로 짐을 운반할 계획이었다. 할머니가 죽통을 이고 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여느때 같으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좋아하고 있을터 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죽통을 이고오는 할머니를 흘긋 한 번 보더니 그대로 장풀쪽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할머니는 무거운 죽통을 인채 소리쳐 말을 불러 보았지만 말은 그대로 장폴을 건너고 있었다.
장풀을 건너가면 그 곳은 질펀한 바닷가인데 조수(潮水)가 빠져나가면 드러나는 풀밭이다. 이 풀은 일명 잔디 풀(혁명상의 명칭은 알 수 없으나, 진디풀이란 이 지역에서 부르는 방언인 것이다. )이라고 하는데, 말이 즐겨 뜯어먹는 풀이다. 지금도 말이 좋아하는 풀인데 옛날엔 어린애들도 즐겨 이 잔디 풀을 뽑아서 그 뿌리를 먹는데 달콤한 것이 제법 구미에 당기는 훌이다. 그런데 말이 죽은 아랑곳없이 풀밭으로 달려간 것은 몹시 배가 고픈데 죽은 가져오지 않고 건너다 보이는 맞은 편에는 먹음직스런 풀밭이 손짓하고 잇는데 고삐가 풀리게 되자 곧바로 풀밭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오직 배가 고파서 마음이 풀밭에 쏠렸으면 죽을 포기하고 진지풀을 찾아서 달려갔을까, 할머니는 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한참 동안 죽통을 인채 서 있다가 돌로 변하는 이변(異變)이 생기고 말았다. 그런 가 하면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말도 돌로 변하고 말았다. 정말 신묘(神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할머니와 말이 거의 동시에 돌로 변하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이 곳을 찾으면 바위모양이 마치 말이 등에 짐을 지고 있는 것과 바로 앞에는 할머니가 죽통을 인채 서 있는 모습이 실물에 가까울 정도로 뚜렷하게 남아있어 이 전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발을 멈추고 무궁한 신의 조화를 연상해 보는 지도 모르리라.
이 노루땡이란 속칭 자연부락명의 지명으로서 "노루땅"의 와전인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실례를 들면 강변이 "갱변"으로 간수가 "갠수"로, 벼라기 "베락"등등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 이는 수 백년 내려오면서 대중 속에서 언어의 습관상 와전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노루땡이라고 불리우게 된 연우는 다음과 같다. 조선조의 영조(英祖)때의 일이다. 이곳에 고씨(高氏)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따뜻한 어느 봄날 산나물을 뜯으려고 뒷동산에 올라간 할머니는 열심히 산나물을 뜯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물을 뜯다 놀랜 할머니는 잠시 손을 멈추고 총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노루 한 마리가 허둥지둥 뛰어나 할머니 앞에다가 서더니 무엇인가 도와달라는 시늉을 하다가 급히 치마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 할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사냥꾼에 쫓기고 있는 노루가 불쌍하며 재빨리 치마를 벗어 노루를 덮어주고 그 위에 다시 나뭇잎을 모아 완전히 숨겨 주었다. 이렇게 노루를 숨겨주고 주위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산등성이에서 총을 든 포수 한 사람이 헐레벌떡 할머니 쪽으로 달려오더니 숨찬 목소리로 할머니 방금 이쪽으로 도망쳐온 노루를 보지 못했습니까? 학 묻는 것이었다. 이에 할머니는 침착한 목소리를 예! 노루요, 노룬지 산돼지인지는 모르지만 방금 커다란 송아지 만한 산짐승 한 마리가 저쪽 계곡으로 도망쳐 갔습니다. 이렇게 할머니가 대답하자 사냥꾼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노루가 달아난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얼마후 할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고 노루를 꺼내 주었다. 노루야 이젠 살았다. 사냥꾼은 저쪽으로 뛰어 갔으니 너는 그의 반대쪽인 이쪽으로 도망쳐 가거라. 이 말에 노루는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맙다고 머리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루는 즉시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잡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할머니의 치마자락을 물고 당기며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이에 눈치챈 할머니는 노루를 따라 한참 동안 걸어갔다. 이렇게 얼마쯤 걷다가 양지바른 아늑한 곳에 이르자 노루는 발길을 멈추고 서더니 앞발로 땅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치와 주위 환경 등으로 미루어 보아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산소 자리로 적지 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에 할머니는 응! 알았다. 이곳이 산소 자리로서 좋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할아범이 죽거든 이 자리에 죽거든 이 자리에 무덤을 쓰란 말이지 노루야! 이렇게 할머니가 묻자 그렇다는 듯이 머리를 여러번 흔들고는 어디론가 뛰어가고 말았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할머니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손해볼 것 없으니 노루가 시킨대로 해보자 하고 할머니는 그곳에 큰 돌을 주어다 표시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일이 있는 수년 뒤에 마침내 남편이 죽었다. 할머니는 지체하지 않고 수년 전에 노루가 알려준 그 곳에 남편의 무덤을 썼다. 그후 고씨 할머니의 집안은 점점 가세가 번창해지고 자손들이 창성하여 남부러워할 것이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이 널리 동네에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노루가 잡아준 산소 자리가 명당(明堂)이라 하여 그후부터 이 동네의 이름이「노루땡이」로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곳 정곡리 마을에는 고씨 할머니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노루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