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석기 시대를 그대로 빗살무늬 토기시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 빗살무늬 토기인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에 시베리아 몽고지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하여 기원전 약 3000년경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그 생활 터전을 확대시켜 갔던 것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러시아의 북부 카렐리아(KARELIA) 지방에서 발생하여, 서쪽으로는 북유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는 우랄산맥을 넘어서 바이칼호를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학자들의 통설이다.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쉽게 설명을 한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빗살무늬 토기인의 경로를 3갈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로를 통하여 우리 한반도에 들어온 신석기인들은 전국적으로 생활을 개척해 나갔는데, 이들이 남겨 놓은 유적이 오늘날 우리 국내에서 발견된 것만 하여도 수 백 개소에 이른다.
특히 조국 광복(祖國光復)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만 하여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몇 개 예시해 보면, 우선 암사리 유적(서울 성동구)·시도패총(경기도 부천시)·동삼동패총(부산 영도구) 등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지에서 주로 토기·석기·골각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서울의 암사리 유적에서는 8개의 주거지(住居址)와 노지(爐址)가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같은 유물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어로(漁撈)와 농경생활(農耕生活)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노지(爐址)를 볼 때 난방시설(煖房施設)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는 사회 단위가 씨족(氏族)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씨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따라서 종교·전쟁 또는 생산활동 등에 관한 중대한 일에는 반드시 씨족회의 의결을 거쳐 시행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밟았다.
다음 신석기인들의 경제 생활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주로 고기잡이와 사냥 등을 통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여 오다,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진적으로 인간의 지혜가 열리고, 이에 따라 기술이 발달되어 농경의 생산력이 증대되어 갔다.
또한 이 때의 신앙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면 사람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특히 자연에 대한 공포심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만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으면, 그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靈魂不滅說)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계세사상(繼世思想)이 싹터 부장( 副葬)하는 풍습이 나오게 된 것이다 .
태안 지역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석기인이 한반도 전역(全域)에 걸쳐 활동하기 시작한 기원전 3000년경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태안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에서 5000년경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다.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한 바에 따르면 태안반도에서는 아직까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사례는 없으나, 신석기 유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안면도( 安眠島)의 고남면에서 발견된 10여 개소의 패총, 이른바 고남 패총군과 남면의 달산 패총군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유적인데, 이 속에서 출토된 한 두 점의 구석기 유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었다.
이 같은 유적과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우리 태안 지역에는 지금으로부터 4500~5000년경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